아빠와 뽀삐의 거리

그날의 경계 존중 수업

by 달토

성폭력 예방 수업의 주제는 '경계 존중'이었다.


'경계'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조금 낯설다.

하지만 누구나 매일 느끼며 살아가는 개념이기도 하다.


"경계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중받아야 해요.
친밀도와 신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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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나의 경계 알아보기' 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에드워드 홀의 인간관계의 거리처럼,
가까운 원부터 바깥 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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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쪽에는
아주 가까워도 괜찮은 사람.


그다음 원에는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선이 있는 사람.


조금 떨어진 원,
그리고 가장 바깥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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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각자의 마음속 원을 떠올리며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칠판에 적었다.


친구의 이름도 있었고,
가족의 이름도 있었다.




다음 순서는 민수였다.


민수는 가장 안쪽 동그라미에

'뽀삐'라고 적었다.


"1번… 뽀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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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멈칫했다.

"뽀삐가 누구야?"
"우리 집 강아지요!"
"아하."


교실에 웃음이 흘렀다.

아무렴, 누군가에게는 반려견이

가장 안쪽 원에 있는 존재일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민수는
가장 바깥의 원에 이름 하나를 적고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덩그러니 남은 한 단어.


'아빠.'


순간,

괜히 내가 눈썹을 들썩였다.


"오…?"

아무도 더 묻지 않았다.

그 한 단어 안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무언가가
이미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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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들이 하나둘 채워질수록
같은 상대임에도 원은 조금씩 달랐다.


"너, 담임선생님이랑 포옹할 수 있어?"
"난 어깨동무까지만 가능한데."
"이렇게 서로 경계가 다르다고?"


아이들은 칠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같은 교실에 있어도
각자가 허락하는 거리는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이
그제야 눈에 보이기 시작한 듯했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자리로 돌아갔다.
칠판은 다시 깨끗해졌고
교실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조금 후, 이상한 일이 생겼다.

"너의 손을 잡아도 될까?"
"네 의자에 앉아도 될까?"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묻기 시작했다.
장난처럼 웃기도 하고,
괜히 더 큰 소리로 확인하기도 하면서.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꼭 허락을 받아야 할 것처럼.


마침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고,
그 풍경을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교실은

조금 더 소란스러웠지만

조금 더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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