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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랑 Sep 13. 2024

대한민국 결혼 문화 과연 옳은가?

패러다임 해체 ④ 결혼 패러다임 파괴


현대 사회 패러다임 속 결혼관,

과연 옳은가?


나는 한때 가족이 갖고 싶어서 결혼정보회사에서 인정받기 좋은 여성이 되고자 했다.


화목하고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에, 졸업하고 내내 월세살이를 하고 학자금을 갚고 가족을 도와주느라 돈을 많이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결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못내 단정지었다.


이런 내 단점을 모두 ‘커버’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장점을 많이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사랑받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항상 내 편이 되어 줄 짝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가난한 사람은, 남들보다 불행했던 사람은 가족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하는 줄 알았다.


미디어를 조금만 둘러봐도, 애초에 결혼의 전 단계인 연애를 시작하려고만 해도 무슨 조건이 그리도 많은지 외우기도 힘들 정도다. 나이, 키, 몸무게, 학벌, 수입, 모은 돈, 자가 여부, 심지어 부모님의 인성 및 노후 대비 여부까지.


이 모든 조건을 다 갖추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갖추어야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결혼정보회사 및 미디어의 어그로라지만…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육각형”, “7의 여자/남자” … 신조어인지 전문 용어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나만 이런 용어에서 우리나라 특유의 점수 매기는 경쟁 의식을 느끼는 걸까. 무슨 게임 캐릭터를 보고 품평하는 것 같다. 또한 개성의 말소라고 할까? 현대인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존중되지 않는 몰개성한 용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말했다.


꼭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야만 사랑을 받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짝꿍처럼 유기 불안이 따라왔다. 내가 대단하고 멋진 “7의 여자(육각형은 이미 불가능)”가 아니면(자기 부정) 상대방이 떠날 것이라고(타인 부정) 무의식중 항상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혼란형 애착 유형’이라고 한다는데,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 방식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이후 ‘결혼’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심도 깊은 고민을 했다.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에는 미디어와 부모 세대의 입김이 강력하게 관여하고 있음이 자명했다.


돈, 연봉, 신혼집, 청접장, 결혼식장, 스드메, 축의금, ‘뿌린 거 거두어야 한다’는 부모님, 체면, 하객 아르바이트, 스냅 사진, 시댁, 친정… 으아악. 모두 장애물 같다. 이것들 사이에 과연 ‘나’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자아’란 것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 모든 것을 은연중 ‘사랑받을 자격’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온갖 미디어에 나오는 획일화된 형식에 나를 맞출 줄 알아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결혼할 수 있다고, 가족을 가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결혼에 관한 여러 관여 요소를 다 끊어내고 오직 ‘사랑’만 생각하였을 때 문제는 너무나도 심플해진다. 그리고 본질에 가까워진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돈이 없어도, 부모가 없어도 상관없으니 날 사랑해 줄 영혼과 짝이 되고 싶다고.


천국이든 지옥이든, 양지바른 곳이든 진창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손 잡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아니라면 무엇 하러 결혼을 하는가? 아낌없는 사랑이 없는 결혼은 안 하는 게 낫다.


그러나 나조차 스스로 행복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나조차 스스로를 사랑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인가? 나조차 내일이 전혀 기대되지 않는 재난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데, 어떻게 타인과의 미래를 함께 그린단 말인가.


나는 가족을 만들려면 사회에서 원하는 ‘훌륭한 여성상’에 나를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정말 어긋난 생각이었다.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나의 행복과 자아 정체성이었다. 하루하루 충실하고 설레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어떻게 반짝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의 나는 바람 앞에 꺼질 듯 말 듯 한 등불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내가 가진 고유한 반짝임을 먼저 찾지 않으면 사랑도 결혼도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받고 서로 응원할 수 있으려면, 양지바른 곳이든 진창이든 함께할 사람을 찾으려면, 우선은 나 먼저 나의 이상을 용기 있게 실현할 줄 알아야 함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순수로의

회귀


결혼에 대하여서도 사랑이라는 본질만을 생각하는 코어주의corism의 적용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진정한 사랑이란 말이 농담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공고한 결혼 패러다임에 탈제도, 탈관습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그래서 퀴어들이 좋다. 일반적인 헤테로(이성애자)들의 연애-결혼-출산 형태는 단계를 거칠수록 점점 제도와 관습의 억압을 받는다. 그러나 퀴어(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의 사랑은 애초에 인연의 첫 시작점인 연애 단계에서부터 제도와 관습의 억압을 받는다. 심지어 그들의 결혼은 제도화되어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퀴어의 사랑이야말로 오히려 사랑의 본질, 사랑의 코어에 더욱 가깝지 않나 싶다.


실제로 내 주변 퀴어 친구들은 참으로 자유롭고, 진득하며, 매우 주체적이고, 애처로운 사랑을 한다. 그들은 마치 2000년대 초중반 소몰이 발라드 뮤직비디오 감성으로 사랑을 하는 듯하다. 또한 그들은 많은 경우 사랑을 위해 모든 것(가족, 친구, 사회적 시선, ...)을 포기할 각오를 한다.


어떻게 아니 그러겠는가? 가끔 사랑을 향한 그들의 용기를 보고 있노라면 경이로움이 팔뚝을 타고 오소소 솟아오르며, 나의 뇌를 친다. 우리 헤테로는 한 번이라도 '안 따지는 연애'를 해 본 적이 있는가? 한 번이라도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난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대해 본 적이 있는가?


헤테로들이 연애 및 결혼을 고려하는 대상에 대하여 "육각형", "7의 남녀" 어쩌구 잣대를 들이밀며 째째하게 서로를 재고 따지고 대보고 물어뜯을 때, 그들은 시종일관 "Love is love, Love wins."를 외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본질인가?


그러니 우리는 이성애 형태의 사랑에 대하여서도 일단은 복잡한 관여 요소를 덜어낼 필요가 있다. 탈제도, 탈관습을 통해 사랑을 사랑으로만 대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절실하다.


모든 사랑 이룸의 형태에 대하여 우리는 온전히 주체적일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영향받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사랑을 고르는 기준과 잣대를 미디어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이상적 사랑에 대하여 온전히 스스로 고찰하고 성찰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앞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개성과 자아를 견고히 만들어야 한다. 그런 뒤 사랑을 주고받는 경험을 더 많이, 더 자주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 문화의 흐름을 후대에 전달해야 한다.



가족이란 사랑으로 맺어진 신성한 생활의 단위이다. 이 이외의 의미를 부가하는 것은 그 내용을 혼란케 만드는 것이다.

법정의 수속과 결혼 의식으로 인해 가족은 진정한 의미로 성립이 된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말하면 사랑하는 남녀에게 있어선 그런 것은 전혀 필요한 조건이 아니다.

또한 이혼, 즉 가족의 분산이 법의 허가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도 필요한 조건이 아니다. 이런 모든 조건은 사회가 그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 그것을 모든 남녀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들이다.

대부분의 남녀 또한 사회의 이 무언의 강압에 순종적이다. 그들 대부분이 사랑이 없는 곳에 그 흔적만을 지속시킨다.

… 나는 연애에 대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연애 앞에는 개성에 대한 깊은 요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정확하게 말하면 개성의 전적 요구에 의해서만 사람들은 애인을 찾는데 오류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개성의 전적 요구는 쉽게 사랑을 이성에 대하여 움직이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 한 번 찾아낸 애인에 대해서는 사랑은 그 근저부터 동요돼 움직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강하다. 그리고 소중하다. 사랑에 대한 본능의 각성 없이는, 가령, 남녀 교제에 어떠한 제한을 부가하던지, 어떠한 수정을 덧붙이던지 그 노력은 헛수고로 끝날 뿐일 것이다.

- 아리시마 다케오, 『아낌없이 사랑은 빼앗는다』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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