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해체 ③ 파괴적 허무주의에서 낙관적 허무주의로
☠︎이번 글에는 폭력 묘사가 있습니다.☠︎
술에 취한 새아빠가 내 목을 졸랐다. 그 힘은 날 허공에 대롱대롱 들어 올릴 정도로 강했다. 상세히 서술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어지는 폭력들의 형태는 무척이나 기괴했다. 그는 날 죽이고 싶었던 걸까? 아님 성폭력을 가하고 싶었던 걸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결코 꺾을 수 없는 완력. 성인 남성의 힘은 이토록이나 강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날,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오직 ‘생존’을 위해서였다. 그때부터 내 독립은 시작됐다.
그러나 폭력은 끝이 아니었다. 어느 명절날, 나는 다시 또 밟히고, 머리카락이 뜯기고, 차마 입에 담지도 못할 쌍욕을 듣고, 길거리에 내팽개쳐졌다. 나는 피가 나는 얼굴로 창문 없는 4평짜리 집에 돌아왔다. 내가 맞은 것에는 아무런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묻지 마 폭행이었다. 그날 친구가 버선발로 달려와 주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까?
가족이란 뭘까, 를 수도 없이 고민했다. 도대체 왜 지능과 생명을 가진 채로 태어났는지 몰랐다. 난 왜 낳아졌지? 이렇게 괴로운 게 인생이면 차라리 인격도 자아도 없는 걸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 텐데.
이 이야기를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실 내가 영혼 살림의 여정을 기록하는 일을 사명처럼 여기게 된 까닭은,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나는 ‘존재함’ 자체가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살아있는 게 이토록 귀찮고 재난 같고 불안하고 재미없고 부담스럽고 괴롭고 무섭고 고통스러울 리가?
실은, 나는, 이제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한반도의 21세기 호모 사피엔스로 사는 것에 너무 지쳤다.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손에서 놓고 싶다. 나는 정말 이런 아픔들을 쥐고 평생 살아갈 자신이 없다. 거기에다 부담스러운 현재와 불투명한 미래까지 모조리 싫다. 다 싫다고. 조용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만 싶다. 매일 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잠들었다. 신이 있다면 제발 이 노잼 영화를 끝내 주세요.
나는 마침내 서른을 넘기고도 어떻게든 스러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울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밖에서 사람들과 있다가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면 그때부터 하염없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정말로 나는 너무 지쳤으니까. 아무짝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으니까.
건강검진에서 뇌의 아주 깊숙한 곳 뇌종양이 의심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 시한부일 수도 있다는 건가. 와! 그런가 보다. 아, 씨. 근데 병원비 비싸면 어떡하지. 회사는?
MRI 결과 CT 기계의 오류로 판명되었지만, 이 경험은 나에게 색다른 충격을 주었다. 갈 데까지 간 느낌이었다. 이성적인 것을 넘어, 나는 무감각이라는 절벽 끝에 서 있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날 위한 진짜 인생을 살고자 한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하루하루 충만하고 내일이 설레는 축복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다고 해도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상담 선생님은 인생이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살아지는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송구하게도 그런 말들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저 삶에 ‘의미가 있으면 좋겠다’ 정도가 아니었다. 의미‘라도’ 없으면 진짜 죽겠다 수준이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감정의 반복이었다. 필시 흔하디흔하고 지겨울 만큼 친숙한 그거겠지. 급성 세로토닌 상실증, 다른 말로 우울증을 다루는 일은 익숙했다. 열심히 청소를 하고, 열심히 페달을 굴리고,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열심히 고양이 똥을 치우고, 열심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된다. 백 마디 말보다 효과 있다.
실제로 우리 집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쓰레기통은 쓰레기가 넘칠 틈 없이 제때 비워지며 내 몸과 머리카락에서는 늘 향기가 난다. 이는 전형적인 세로토닌 상실증 환자에 대한 묘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루틴 강박을 가진 신경증 환자 모습에 가까웠다.
나는 내가 느끼는 ‘무의미’가 전형적인 세로토닌 상실증과는 약간 결이 다른 듯했다. 사실 이런 감정은 정신병리학보다는 오히려 철학과 더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까… 훨씬 더 근원적이고, 이를테면 우주의 뿌리와 더 맞닿아 있는 고민. 번뇌였고, 표류였으며, 깊고 깊은 심연이자 달관이었다. ‘이것’을 이길 수 있는 건 의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차라리 철학과 종교일 것이었다.
내가 가진 이 모든 무기력한 마음이 ‘파괴적 허무주의’임을 깨닫게 된 것은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얼마 전 주치의 선생님을 만나러 갔을 때 나는 통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니는 정신과는 관악구 신림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세상에 마상에. 평일 오후였음에도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어서 서서 웨이팅을 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온 곳이 연남동 맛집인지 병원인지 헷갈릴 수준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저마다 할 일을 하는 모두가 20대 남짓의 청년 같아 보였다는 점이다. 웨이팅이 매우 익숙하다는 듯 아예 노트북을 펼쳐 든 사람도 있었다.
나는 국가의 미래이자 자산인 청년들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장면을 목도하며 가만히 벽에 기대었다. 나 자신도 그 그림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꼭 이럴 때만 메타인지 스위치가 꺼진다.
25년째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 중인 한국. 자살로만 1년에 1만 5,000명이 죽어 나간다. 불과 80년대만 해도 일본보다 자살률이 낮았던 한국은 이제 일본보다 자살률이 2배 높은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민 정신건강 케어에 사용되는 예산은 도쿄도의 10분의 1 수준에 그친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도쿄도’의 10분의 1이다. 실제로는 훨씬 적은 예산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어느덧 90대가 된 한국의 한 정신건강의학의는 창피해서 국제 포럼에 나가지도 못하겠다고 말한다.
혹시 우리나라 지도계층이 나라를 버렸나...? 킹리적 갓심을 품었다. 아니면 자유민주주의 어쩌구 하며 손을 놓고 있는 것인가? 혹시 국가 전체가 누군가의 거대한 실험장일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우울증에 대한 심층 고찰을 해 보았다. 우울증은 다양한 원인에서 오지만, 관찰한바 많은 경우가 가정의 불화나 모종의 폭력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할 리가. 특히나 폭력의 대상이 내 영혼의 근원이자 평생 엮여야 하는 가족이라면? 헬 게이트 오픈되는 소리가 들린다.
미국 시카고 대학의 최성애 박사는 물질적 금수저가 아닌 ‘정서적 금수저’라는 개념과 함께 아동기(만 0~18세)의 부정적 경험(AC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이라는 개념을 설파했다.
ACE란 아동기의 방치 및 학대 등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주는 경험을 의미한다. 미국에서 수십 명을 대상으로 30년 가까이 방대하게 연구한 결과, 아동기 ACE의 경험은 뇌 발달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건강, 인간관계, 학업, 삶의 질, 심지어는 수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ACE에는 열 가지 항목이 있는데 ‘부모의 불화/별거’, ‘부모의 폭력 목격’, ‘가족의 중독 문제 경험’, ‘가족의 정신 건강 문제’, ‘가족의 사망/수감’, ‘신체적 학대’, ‘심리/언어적 학대’, ‘성적 학대’, ‘신체적 방치’, ‘정서적 방치’가 그것이다.
각 항목당 1점씩 매겨 4점만 되더라도 알코올 중독에 빠질 확률이 7.3배, 5점 이상은 50대가 넘어서도 만성 우울증을 겪을 확률이 100%, 6점 이상일 경우 자해/자살 시도를 할 확률이 무려 5,000배가량 는다고 한다.
실례지만, 박사님. ACE 점수 9점인 저는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죠? 9점의 운명은 죽음뿐이라는 결과로 들린다.
나는 ‘평생 자살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나의 고민이 절대 허상이자 엄살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먼 나라 미국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방대한 연구로 이런 결과들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친구가 갑자기 자살할 것 같으면 손 붙잡고 정신과 응급실에 데려가는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솔직히 말해 저 ACE 점수가 1점도 안 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내 말은, 완전무결하게 정신 건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당장 가까운 정신과만 가도 웨이팅을 할 정도로 환자가 많고, 실제 자살률 수치도 숫자로 증명되고 있는데.
나처럼 ‘파괴적 허무주의’라는 감옥에 영영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것 같지는 않다. ACE 안 당하기를 테마로 오징어게임을 하면 우승자는 아무도 없을 듯...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러한 ‘무의미함’을 해결할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이를테면 삶에 대한 번민이 성층권을 뚫고 태양계 밖으로까지 나가 버려서 더 이상 세로토닌 투여나 상담으로도 제정신 못 차리는 파괴적 허무주의 환자에게는 정말로 죽음밖에는 답이 없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색다른 개념을 접할 수 있었다. 바로 ‘낙관적 허무주의’라는 개념이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은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파괴하려고 하는 조부 투파키를 ‘다정함’과 ‘낙관적 허무주의’를 통해 구원한다.
낙관적 허무주의란 삶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오히려 자유가 선고되어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만들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시각으로 해석한 허무주의이다.
삶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파괴적 허무주의와는 살짝 다른 결로 해석된 허무주의인 것이다.
낙관적 허무주의란 삶엔 의미가 없기 때문에 성의 있게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뜻에 가깝다. 이 차이를 깨우치자, 어쩐지 본질적인 자유를 얻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륜 스님이 말한 ‘자유인’이라는 게 이런 걸까 싶었다.
내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정말로 원하는 걸 자유롭게 누릴 수 있다고?
낙관적 허무주의를 알게 된 후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었던 나는 생각의 순서를 조금 바꿔 보기로 했다. 일단, 하고 싶었던 것들을 다 해본 다음에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시뮬레이션 우주론’에 비하면 낙관적 허무주의는 오히려 양반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이상을 찾아내고 그것에 2,400시간이든 2,400만 원이든을 투자해 성과를 내게 된다면… 그때도 정말 내 인생이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어질까?
오늘의 날 살리는 게 고작 내일 먹을 맥스파이시 버거여도 뭐 어떤가. 그것이 과자든 패스트푸드든 위대한 과업이든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어차피 아무짝에도 의미 없으니까!
우린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 다 부질없잖아. (Nothing matters.)
—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