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아감에 대한 약속들
괜시리 얌전히 노는 아이를 놀리고자 장남감 한 부분을 숨기듯, 얌전히 흘러가던 일상을 휘저어 보고자 훌쩍 떠난 지방의 산 초입 어딘가에서 그 상쾌함과 정신을 때리는 찬 공기에 눈을 들어 보니, 겨울 산의 능선이 온화한 각도로 뻗어 내려오고 있었다. 등산은 모르겠지만 산을 보는 것은 좋아하고, 그만큼 히말라야의 설산이나, 황량한 흙산, 원시림의 웅장한 산 등등 다양한 유형을 산을 보아왔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의 겨울 산은 그 독특한 매력을 뽐낸다. 지난 계절에 풍성한 잎들 속에 숨겨져 있던 능선의 골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잎을 잃은 나무들은 그들이 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없게 된다. 눈이 내리면 이 구도는 더욱 명확해지고, 바야흐로 산의 본질을 보여주게 된다.
겨울 산의 이 황량함은 한편으로는 우울해 보이기도 하다. 여름의 풍성함과 가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이 모든 것을 잃은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유한할진대, 그 새로운 시작의 씨앗을 모두 품고 있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충만함 일수 있다. 겨울 산은 봄의 새순과 여름의 푸름, 가을의 풍요에 대한 약속을 품고 있다. 이 무구한 세월을 지켜온 약속 안에서 겨울 산은 그 어느 산보다 충만하다.
겨울 추위 속에서 씨앗은 한 해를 버텨나갈 힘을 단련한다. 겨울의 비움은 채워진 시간을 더 소중케 한다. 삶에서의 겨울은 필연적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순환하듯, 삶의 겨울도 주기적으로 올 수밖에 없다. 이 겨울 속에서 벌거벗겨진 순간 나의 본질적 충만함을 점검하게 된다. 힘든 시간 속에서 버틸 수 있는 나의 내력.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된 더 나아감에 대한 약속들. 겨울날 맞이한 삶의 겨울, 겨울 산을 바라보며 저 겨울 산만큼이나 든든하고 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