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어느 한 빌딩의 화장실 칸에 들어갔는데, 마시다 남은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소주라고 함은 기본적으로 섭취를 위한 것이고,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배출을 위한 공간이다. 이 소주병이 내 눈길을 잡은 것은 이 두 상충하는 요소의 기묘한 공존이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화장실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안타까움의 상징이었듯, 이렇게 서로 다른 성격의 소재가 중첩되는 것에는 스토리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일 것이다.
소주는 사교의 좋은 도구다. 이를 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들여다보면, 소주를 함께 마시면서 이성의 장벽을 얇게 하여, 그 자리에 있는 구성원들과의 민낯을 서로 공유하면서 유대감을 만드는 식으로 작용한다. 아마 대부분의 음주는 이와 같은 사회적 행위로서 이루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술 마신다’는 것은 대부분 상대방을 전제하는 말이면서 ‘혼술’은 특이한 상황을 의미한다. 혼술의 의도 중에는 아마 이 사회적인 유대를 떠올려 그 감성을 간접적으로 그리워하게 하는 매개의 영역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앞서 술의 화학적 효능인 이성을 잠시 퇴장시켜 이성에 의해 끊임없이 상기되는 현실의 고민들을 잊고, 현재의 나의 민낯에 충실하고자 하는 취지들도 클 것이다.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나에게 근접하면서도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그곳에는 지켜보는 이도, 침범할 이도 없다. 그 완벽한 단절의 공간은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기피하는 더러움이라는 특성과 함께 하기에, 빠르게 볼일을 마치고 탈출해야 하는 공간으로 그 회전률을 확보한다. 그래서 화장실에 걸맞는 용무가 아닌 행위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마음을 아프게 한다. 군대의 훈련소에서는 화장실에 대한 경계가 가장 치열했다. 온갖 단체 생활로 사적인 여유와 공간을 배제한 군대에서, 화장실의 칸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이에게 필요한 최후의 사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밥을 먹는 아싸 대학생은 캠퍼스의 수많은 공간들은 인싸들의 것이라 여겨 혼자 밥을 먹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누구도 침범하는 공간을 택했다. 어떤 청소 노동자들은 공간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 필수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숨겨져야 할 존재가 되면서 동시에 정당한 공간마저 배정받지 못해 화장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했다. 현대의 직장인들이 남몰래 졸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화장실. 화장실 칸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
화장실에 있던 소주병은 왜인지 모르게 이러한 부조화와 마음 아픈 스토리를 떠올리게 했다. 냉담하게 얼어붙은 경제 불황 속에서, 무언가 마음 아픈 소식들을 안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고자 빌딩의 구석 화장실 칸에서 깡소주를 들이 켰을 수도 있다. 그리고선 이내 한병을 채 비우지도 못하고 역한 호흡과 어질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차가운 거리로 나섰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리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마주한다. 숫자로 보는 냉엄한 경제 지표들은 피상적으로 인식되나 그 하나하나의 숫자가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의 삶이라고 생각할 때 그 무게감은 다르게 인식된다. 그래서인지, 저 소주병의 주인이 안았던 고뇌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그냥 즐거운 술자리를 가졌던 이들 중 하나가 취중에 들고 온 소주병을 어? 이게 뭐야 하면서 놓고 온 것이기도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