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육체는 미묘하다. 때로는 강인하지만, 때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약하다. 이번주는 감기에 시달린 한 주다. 말할 때마다 목은 아프고, 머리는 지끈거려 어떠한 일을 하려 해도 의욕과 에너지가 동원되지 않았다. 의지가 앞선 삶 앞에서, 육신이 방해를 하는 이 시점, 육체가 얼마나 삶에 방해가 되는지, 뜻밖의 영적 해탈을 맞이할 지경이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어떤 시기에는 내 신체를 믿지 못해, 이게 되나? 하는 의심을 품고 있을 즈음 놀라운 에너지를 뿜어내던 육체가 일상의 일을 방해하는 허접함을 뽐내다니… 덕분에 많은 계획들이 어그러진다. 오늘 이만큼의 책을 읽겠다던 계획은 어떠한 텍스트를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두통에 포기하고, 설거지를 하고 먼지들을 치우겠다던 의지는 칼칼한 목상태에 그냥 물이나 마시고 침대에 쓰러지는 것으로 타협한다.
육신은 제약이다. 늘 알던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확인하면 어쩌랴, 이 제약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왔다. 결국 내게 주어진 것은 이 제약을 잘 컨트롤하면서 세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불가의 오래된 이론은 고집멸도라는 사성제를 이야기한다. 고통은 집착에서 나오며, 그것을 없애는 길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집착의 근원은 육신이다. 육신이 있어, 생을 지속하기 위해, 일련의 욕망과 필요를 가지게 되고, 그로부터 고통이 나온다는 원리다. 그 이론은 나는 이해하고, 납득한다. 그리고 그것을 멸하기 위한 원리를 추구한다.
육신의 제약을 넘어서는 것. 그것은 세상의 많은 위대한 이들이 추구한 바이면서 또 인류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물리 법칙에 제약되는 육신은 그 자체로 종말의 예언이다. 감소할 줄 모르는 엔트로피는 필연적 멸종을 예고하고 있고, 인간이라는 종은 선대의 멸종에서 그 결말을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세상의 원리를 필사적으로 밝혀내어, 생존의 단초를 애써 찾으려 한다. 그 발버둥을 존중하면서도,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
오랜만에 도래한 감기는 나에게 육신의 제약을 되새기게 한다. 이 제약 속에서 나의 목적 혹은 의의를 고민하게 된다. 나는 왜 살아가는가? 애매하게 살아가는 이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