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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우 Oct 31. 2024

비행기에서 사랑을 떠올리다.

 비행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하늘을 날아간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근본적인 제약,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다. 중력은 우리를 이 땅에 매이게 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보호한다. 그러나 인간은 부모님 품을 갑갑해하는 사춘기 어린아이 마냥 호시탐탐 중력을 이겨낼 고민을 해왔다. 비행기는 그 인간 욕망이 실적을 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 반항의 결과는 달콤하여, 바야흐로 인간은 이 행성의 어디든 적당한 시간 안에 갈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내었다. 어쩌면, 비행기에서의 이 설렘은 그 성취감의 샘플일지도 모른다.


 지상에 매인 비행기는 역설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다. 온갖 지상의 것들의 보조를 받아가며 간신히 직선의 활주로에 서서야 그것은 완전해질 준비를 마친다. 그리고, 점차 속도를 내어 질주하며, 그 추세를 주체하지 못해 한 임계를 넘는 순간 육중한 기체는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매끈한 표면의 날개에 쏟아져 비추어 들어오는 눈부신 태양 빛, 그것은 오늘도 무사히 성공한 하나의 이륙에 하사하는 태양의 기특함일것이다. 그 날개는 수개의 철판들이 촘촘히 연결되어 기이한 곡선의 형태를 이룬다. 인간이 이룩해 낸 과학과 공학의 결정체. 파르르 떨리는 날개의 얇고 날카로운 끝. 그 유약함이 만들어내는 중력에의 반항.


 어느새 지상의 모든 것은 거시의 관점으로 비추어진다. 좁디좁은 창문으로 비치는 광경은 비현실적이다. 거리에서 사람을 압도하던 모든 것은 하염없이 작이지고 하찮아진다. 그리고 수많은 차들, 사람들, 건물들, 그 인공의 모든 것들은 작아지고, 뭉뚱그려지며, 멀어진다. 그곳과 이곳은 다른 세상이다. 그래서 모든 권력자들은 높은 곳을 만들고자 했나보다. 모든 것들을 하찮게 볼 수 있는 높이. 그것이 신의 시선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깨나 쓰는 이들은 저마다의 바벨탑을 추구했을것이다. 그 높이를 이렇게 손쉽게 누리다니, 인간은 이렇게나 높이 나아갔다.


 모든 것이 반대로 이루어지는 착륙의 순간. 그떄의 마음은 이륙할때의 설렘에 비해 마냥 반대만은 아니다. 그것은 땅과 중력에 대한 인간의 귀소본능일 것이다.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느껴지는 안정감. 그렇게도 중력을 거스르려고 하나 결국 중력 속에서 편안한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그 모순은 온갖 인간다운 위대한 것들을 만들어 낸다.


 뉴턴은 만유인력을 말했다. 그의 중력은 물리계에서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인간들의 마음에도 모두 중력이 존재한다. 타인에게 이끌리고, 모이고자 하는 마음, 사랑. 그것은 인간의 중력이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이 이끌림에 의해 고통을 받기도 하고, 때론 홀로 존재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그 번민 속에서 사회도, 예술도, 문화도 태동한다. 인간은 양가적이다. 그래서 놀랍다.


 그렇게 이 중력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래도 결국 사랑 속에서 행복과 안정을 찾는다. 코로나 시기 사회활동이 제약되던 때, 애써 화상 모임으로라도 사람을 찾고 교류하고자 했던 욕망, 일본 영화의 끝을 장식하는 귀환의 대사 “타다이마”와 “오카에리”, 가족의 경계를 벗어나 독립한 이가 다시 가족을 만드는 결혼. 그렇게 결국 사람은 사람에게 이끌린다. 중력을 거스르는 것은 짜릿하지만, 결국 중력으로 돌아오기에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이 모든 여정은 개별성을 찾은 가운데 전체성으로 회귀하는 모순된 두 가치의 조화를 만들고자 하는 큰 긍정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든 종교적 잠언들은 사랑을 노래한다. 결국 사랑이다. 


“Alle Menschen werden Bruder 그리고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베토벤 교향곡 9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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