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와 혐오.
어느 시점부터 무례와 혐오의 시대란 것을 느낀다. 어느순간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오그라들고 힙하지 못한 어떤 것이 되었다. 용서와 성장, 감동을 다루던 콘텐츠들은 어느새 무자비하게 상대를 찍어누르는 참교육 혹은 사이다물로 대체되었다. 한때 세상, 삶, 관계의 모순과 복잡함 속에서 지리하게 의미를 찾던 이야기들은 최근에는 간편히 정의하고 간편히 나누어 간단히 결론을 내곤 한다. 어느새 사려깊은 긴 말들은 배척받고 편협한 짧은 말이 선호받는다. 이 극치는 계엄으로 대표되는 최근 한국 정치로 발현 된다. 서로를 멸절하기 않기 위해 겹겹히 쌓아온 암묵적 예의와 금도를 하나 둘 파괴한 끝에, 명시적 제도마저 넘어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선다. 그리고 그 명분은 상대에게 자의적으로 붙인 지극히 편협한 라벨이다. 누가 먼저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 거대한 사조 속에서 누가 먼저든 각기 다른 양상으로 라벨을 붙이며 뒤틀려갔을 것이다.
경쟁.
무례와 혐오는 경쟁의 산물이다. 경쟁은 기본적으로 효율을 따른다. 효율 속에서는 몽글몽글함을 일으키는 모든 감정적 요소를 억제하고, 차가운 개념으로 치환해 최적화하는 것이 미덕이다. 이 치환의 과정이 라벨링이다. 라벨을 붙이는 순간 인간성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될 좋은 명분을 얻는다. 높은 사람들은 리포트를 통해 의사결정을 한다. 그 리포트가 이야기하는 현실은 통계에 의해 숫자로 라벨링되고, 수많은 이야기들은 숨겨진다. 덕분에 지극히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해지고, 경쟁에서 유리해진다. 사라진 이야기들에 대한 책임감도, 무게감도 느낄 필요가 없다.
분열과 비교.
경쟁은 분열을 전제한다. 분열은 비교를 만든다. 상대방이 없는 경쟁은 없다. 자신의 고독한 수양을 위한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말은 레토릭일 뿐, 진정한 경쟁은 누군과와 비교하여 우위에 서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맑시즘이 말하는 자본주의 비판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쟁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해온 자본주의 이전의 유산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이다. 자본주의는 그 특성을 가장 잘 소화하면서 폭력을 자본으로 치환하는데 성공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렇기에, 경쟁으로 소외된 인간성과 그것을 가속하는 분열, 그리고 비교는 단 한번도 인류를 떠난 적 없다. 현대에 이르러 이 것들은 적극적으로 개개인이 그들의 자아를, 그리고 서로를 미워하게끔 끊임없이 독촉한다. 자신에게 씌워진 수겹의 라벨들은 하나의 진영이 되어, 다른 진영을 미워하고 정복하게끔 독려한다. 그 와중에 더 나은 기여를 해야한다는 강박은 개개인에게 ‘쓸모’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나태와 허무.
미움과 쓸모에 대한 강박은 단기에는 효과적이지만, 삶의 긴 궤적에서는 기생충마냥 그 숙주를 피폐하게 한다. 기본적으로 부정에 가까운 이 느낌들은 사람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마르고 소진되게 한다. 순간의 승리에 대한 도파민의 축복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계속해서 더 큰 성과를 요구하고, 어느순간 반복되는 유료 결제에도 진척이 되지 않는 모바일게임과 같은 내성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그 결말은 허무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가나?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혹은 무엇이 있기는 한가? 이 통찰을 감각적으로 일찍 얻은 이들 중 대다수는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무기력해진다. 그리곤 놓아버린다. 나태함에 물든다.
사랑.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않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게 되길 바랍니다.”
한 수학자의 따스한 조언에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그러한 삶의 사유에 대해 동조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좋지 않은 것은 그리도 달콤한가? 자정을 넘어 끓인 라면, 취한 채 바라본 누군가의 눈동자, 인스타그램 광고에 뜬 화려한 어떤 물건, 멍청한 소릴 하는 동료를 보며 입안에 맴도는 무례한 언어, 그리고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기에 저 언어에 공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학이란 인간 삶의 고뇌와 동떨어진 건조한 학문이라 생각했건만 수학자의 통찰에 감동받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보니 수학은 진정 삶과 닮아있다. 수학책에 나오는 그 어떤 개념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위상수학도, 미분도, 자연로그도, 연립방정식도, 피타고라스 정리도, 무리수도, 실수도, 0도, 1도 모두 소중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그리고 이 하루하루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이들도 모든 것들도 소중하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이어지는 문장과 같이 소중하다. 수없는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멀티버스 속에서 타인은 나였을 것이고, 나는 타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타자에 대한 다정함은 자아에 대한 다정함일 수 밖에 없다. 멀티버스를 다룬 한 영화는 모든 가능성을 수렴한 끝에 궁극적 허무에 다다른 이를 안아줄 수 있는 다정함을 이야기한다. 그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 우주가 태동한다. 그 다정함. 그 친절함. 그 사랑. 결국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가보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에 뒤틀릴대로 뒤틀린 오늘, 이 모든 사유 속에서 다시한번 다정함과, 친절과, 사랑을 되새겨본다. 이 사랑을 행하기에 아직도 미숙하여 흔들리고 번민하지만, 더 나아질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꽃이 필 때까지 작게 흔들리는 떡잎’처럼.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친절하시길, 그리고 그 친절을 먼 미래의 우리에게 잘 전달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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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준 콘텐츠들
- 허준이, 서울대학교 2022학년도 졸업식 축사
- (스포주의!)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Be Kind Scene
- 아이묭(aimyon, あいみょん) - 떡잎(Futaba, 双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