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7일 차
번뱅크스/뱀턴~오턴(≈22.6km)
신문물을 만났다. 숙소에 전기코드를 꽂는 건조대가 있길래 사용해 보니, 맙소사 열선이 들어오는 거였다. 늦게 널어 안 마를까 걱정했던 빨래들이 밤사이 바짝 말라있었다. 기대치 않은 행운. 그래서인지 창 밖에 비가 오는데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다섯 시에 깬 뒤 더 자지 못했다. 일찌감치 준비하고 방에서 기다렸다. 조식 준비가 늦어져 덩달아 출발도 늦어졌다. 그렇다고 서둘러 먹지는 않았다. 걸어보니 아침을 잘 먹는 것만큼 중요한 게 또 없었다. 잘 차려진 음식을 음미하듯 꼭꼭 씹어 삼켰다. 8시 50분, 우비를 걸쳐 입고 출발했다. 우선은 이곳 뱀턴(Bampton)에서 CTC로 연결되는 번뱅크스(Burnbanks)까지 가야 한다.
어제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는 거라 지도 확인은 따로 필요 없었다. 아스팔트길은 지루했다. 비좁은 시골길인데도 아침부터 오가는 차들이 꽤 있었다. 비가 내린다. 이젠 비가 덤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소와 양들은 비 오는 날씨를 좋아할까. 개의치 않은 듯 풀밭에 앉아 쉬는 그들을 바라보며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오래 했다. 역시 개인차가 있겠지. 아무리 익숙해진들, 난 비보다 햇빛이 좋았다. 서서히 하늘이 개길 바라며 추적추적 걸어갔다. 그렇게 번뱅크스에 도착하길 9시 20분. 곧장 CTC 방향으로 길을 이었다.
계곡이 흐르는 숲길을 지나, 두 번의 월담으로 고사리 밭으로 들어선다. 슬슬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바닥은 완전히 진창이었다. 오른쪽에 있던 계곡이 이제 왼쪽으로 흐른다. 파란 하늘이 듬성듬성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양 천지 목장이 확 드러났다. 순간 양들의 이목이 집중돼 마치 인기쟁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 표정들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때마침 햇빛도 났다.
클라이브와 앨런은 어제 샤프(Shap) 마을까지 무사히 잘 갔을까. 문득 걱정이 됐다. 샤프까지는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하지만, 혹여나 다른 사정이 있어 같은 길 위에 있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다. 연신 고개를 둘러 사방을 살펴봤지만, 사람이라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녁에 메일이나 한 번 보내봐야겠다. 자주보다 안 보니 그게 또 보고 싶고 궁금하고 그랬다.
순간 방향을 잃은 듯 어리둥절했다. GPS가 안내하는 길이 길 없는 길이라 무척 난감했다. 분명 늪지대 같은데 표지가 없으니 GPS를 따르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맞겠지, 가보자. 그랬다가 신발이 푹 빠져 그만 다 젖어버리고 말았다. 진흙 더미의 물웅덩이가 보기보다 훨씬 무르고 깊었다. 그래도 맞겠지, 맞겠지. 기어코 더 나아가보다 진창에 더 깊이 빠졌다. 결국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되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혹스러움에 고개가 절로 푹 숙여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GPS의 방향으로 에둘러가는 길이 보였다. 일단 그 길로 가봤다. 웬걸 'C to C' 표지가 여기에 딱 있다. 조금만 고민해봤으면 됐는데 GPS만 믿다 헛짓거리를 했다. 헛웃음이 났다. 이미 신발도 양말도 잔뜩 축축했다. 젖은 만큼 걸음이 더 무거웠다. 이제와 돌이킬 수도 없었다. GPS를 100% 신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그제야 하게 됐다.
다 갠 줄 알았는데 다시 장대비가 내렸다. 머리 위는 먹구름이지만 뒤돌아보니 푸른 하늘이 그대로 있었다. 벗었던 우비를 주섬주섬 입다, 아뿔싸 이번엔 질철한 똥을 제대로 밟았다. 순식간에 허벅지까지 검푸른 그것이 튀어버렸다. 마땅히 닦을 만한 것도 없고 해서, 비에 씻기길 바라며 그냥 걸었다. 여러모로 찝찝했다. 오만상 얼굴이 찌푸려졌다.
20분간 세차게 내리던 비가 불현듯 그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햇빛이 내렸다. 우비를 바로 벗어버렸다. 다리의 더러운 흔적도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초원을 따라 길은 계속 이어졌다. 수도원 터를 지나 오르막길, 하나하나 양들과 눈을 맞대며 목장을 지나간다. 굽이 뻗은 아스팔트길이 나왔다. 도로라기보다 밭담 사잇길에 가까웠다. 하얀 돌담과 초록 들판, 파란 하늘이 조화로워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점처럼 펼쳐진 양 떼 풍경은 빛을 맞아 별처럼 반짝였다. 오만상된 표정도 완전히 누그러져 있었다.
길은 샤프 마을로 다다랐다. 11시 50분. 마을의 첫 벤치에 앉아 쉬어간다. 고마워요, 아놀드심슨. 그를 기리며 벤치에 적어둔 걸 보니 1998년에 돌아가신 걸로 되어있었다. 우리 아부지보다 4년 늦게 태어나셨는데 20여 년을 먼저 돌아가신 거다. 불현듯 아부지 생각이 많이 났다. 함께 이 길을 걸었더라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셨을까. 소주 파는 곳이 없다고 투덜거리셨을 게 분명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아부지와 히말라야엔 꼭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말았다.
사과 하나 베어 물고 12시에 다시 출발. 벤치 옆에 등산 스틱을 놓고 가는 바람에 한참 가다 다시 되돌아와야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마을이었다. 동네에 꽤 큰 슈퍼가 하나 있었다. 음식점도 여럿 보였다. 때마침 공원에 무료 공중 화장실까지 있었다. 길은 마을의 뒷골목으로 이어지다 기찻길을 넘어 황량한 초원으로 향했다.
갑자기 불어온 비바람에 배낭 커버가 휙 하고 날아가 버렸다. 쫓아가는데 자꾸 멀리멀리 도망가버려 애를 좀 먹었다. 어쩔 수 없이 뛰기까지 했다. 우비도 난리였다. 이리저리 날려 좀처럼 입기가 어려웠다. 요상한 춤처럼 들판 한가운데서 아주 생쑈를 했다. 누가 봤다면 상당히 우스꽝스러웠을 게 분명했다.
들판의 끝은 난데없는 고속도로였다. 12시 40분, 다행히 육교가 있어 건너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만치 지나온 철로 위로 기차가 지나가는 게 보인다. 도로 위의 차들은 쌩쌩 굉음을 내며 다가오고 사라졌다. 이 지점으로부터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벗어난다. 이제부턴 산 대신 목초지가 펼쳐진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들판의 황금빛 물결이 황홀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햇빛과 비가 동시에 내린다. 양들은 도망가고 소들은 다가왔다. 햇살의 흐름이 한눈에 다 보였다. 가려지는 것이 없어 저 멀리까지 시야가 훤했다. 중간중간의 돌무더기들은 꼭 유적 같았다. 바닥에 낮게 붙은 적갈색의 나무들(아마도 헤더)이 풍경을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의 질척한 진흙도 길의 느낌을 완성하는데 한몫 거든다. 거친 바람이 한없이 불어와, 코를 자꾸 훌쩍이게 만들었다.
한참을 걷는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꿈길을 걸었다. 자꾸만 뒤돌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연신 고개질에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모두 같고 또 모두 달랐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영원히 걷고 싶었다. 그런 마음과 달리 체력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렇게 거의 세 시간 가까이를 쉬지 않고 걸어왔기 때문이다. 넋 놓던 마음이 조금씩 지쳐갈 그즈음, 덩그러니 도로가 나왔다. 어엇 여기가 바로 오늘 CTC의 종점이었다. 3시 30분, 문득 영원이 끝났다.
CTC에서 빠져나와 도로길을 내렸다. 오늘 묵을 오턴(Orton) 마을의 조지호텔까지는 2km 정도를 더 걸어가야 했다. 햇빛인데도 비가 내린다. 또? 또? 하다못해 웃음이 거푸 터져 나왔다.
오후 4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었다. 샤워를 하고 빨래도 했다. 다리에선 구정물이 흘러나왔다. 발의 쉰내가 작렬했다. 과연 빨래가 마를까. 오늘은 열선 건조기가 없다. 배낭에 계속 쓸렸는지 왼쪽 겨드랑이에 생긴 붉은 상처가 아팠다. 언제 생긴 건지 모를 손등의 생채기는 차라리 양호했다. 신발은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 며칠 전 클라이브가 산티아고 갈 때는 신발을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하던데, 정말 그래야 할지도 몰랐다. 이거 나름 새 신발인데 속상했다.
조지호텔의 조지버거를 저녁으로 먹으며 오턴 지역 맥주(Orton Scar Ale)를 음료로 곁들였다. 항상 신기한 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이런 동네에도 저녁쯤이면 식당들이 가득 찬다는 사실이었다. 한 잔 더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시끄러운 바가 힘겨워 방으로 그만 올라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두드려 맞은 것처럼 삭신이 쑤셨다.
내일 도착할 커비스티븐(Kirkby Stephen)은 나름 큰 도시라고 했다. 점심용 간식거리가 거의 다 떨어져 마침 잘됐다 싶었다. 어느새 일주일이나 걸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15kg의 배낭을 메고도 이만큼이나 걸어왔다니,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하다! 내 머리어깨무릎발무릎발,
모두 따봉!
오늘도 역시 기절각이다.
까먹지 말고 클라이브에게 메일은 보내고 자야지.
2024.09.10.
걷기, CTC 7/17
35,805보(2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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