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6일 차
YHA헬벨른~번뱅크스/뱀턴(≈23.9 km)
중간중간 잠에서 자주 깼다. 얼핏얼핏, 집에 있다는 착각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그만큼 잠자리가 안락했나 보다. 아니, 모처럼 그리웠던 건지도 모른다. 설마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어쩌겠어. 하지만 오늘도 먼 길을 걸어가야 한다.
루틴 같은 아침 일과가 반복된다. 여섯 시 기상, 세수와 양치. 짐을 모조리 챙겨 로비로 내려온다. 빨랫감과 배낭을 정리하고, 어설프게나마 스트레칭을 한다. 안티푸라민 무릎 마사지까지 마친 뒤엔 아침 식사다. 오늘도 역시 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소시지, 베이컨, 해시브라운, 익힌 토마토, 에그 프라이와 베이크드 빈즈가 푸짐하게 나온다. 시리얼과 빵은 물론, 과일도 있다. 우유와 주스도 포함이다. 9.95 파운드면 결코 싸지가 않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식당이나 슈퍼를 만나기 어려운 CTC에서 이만하면 혜자라 할만하다.
위클로웨이에서는 호스텔 조식이 비싸게 느껴져 안 먹었었다. 그게 9유로였으니까, 이제 보니 훨씬 싼 거였다. 영국 호스텔은 처음 예약할 때부터 식사 옵션을 선택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그때 멋모르고 신청해 뒀던 게 이토록 호사롭고 유용하게 됐다. 참 잘한 일. 그만큼 먹는 게 길 위에선 중요했다. 덕분에 든든히 아침을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8시 15분, 호기롭게 길을 시작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의 마지막 고비를 오늘 넘는다. 567m 앵글탄 봉(Angletarn Pikes)을 통과해 가는 23.9km의 긴 여정이다. 어때, 또 한 번 잘 걸어보자. 첫 발걸음만은 씩씩했다.
아직 비가 온다. 그 비바람이 쌀쌀했다. 걷다 보니 비는 점점 그치고 바람만 거셌다. 양들도 추운지 들판 위로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YHA 헬벨른(Helvellyn)에서 패터데일(Patterdale)까지는 내리막길이라 길이 수월했다. 그렌리딩(Grenridding)의 슈퍼는 문을 열었지만, 막상 들어가기가 귀찮았다. 울스호수(Ullswater)를 지나 패터데일까지, 어쩐지 어제보다 금방 도착한 느낌이었다. 걸어온 게 4km 남짓, 딱 1시간이 걸렸다.
어제 멈췄던 CTC 길이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비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걷다 보니 쌀쌀함도 어느 정도 가셨다. 웜업도 제대로 됐겠다, 우비를 벗어 가방에 걸쳤다. 도로에서 빠져 마을로, 골드릴 다리(Goldrill Bridge)를 지나자 9시 반부터 본격적인 산행이었다. 가팔랐다 얕아졌다를 반복했다. 산허리를 따라 비탈길을 올랐다. 생각보다 걷기 괜찮았다. 처음의 호기가 오늘따라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한참을 몰입해 오르는데, 어디선가 “킴-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클라이브와 앨런이었다.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서 있었다. 환하게 웃는 그들을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났다. 항상 여유롭게 출발하시는 것 같았는데, 헬벨른에서 1시간을 더 걸어오는 통에 이렇게 시간이 대충 맞았나 보다. 얼른 따라 올라 악수와 함께 안부를 나눴다. 그렇게 얼마간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걸었다. 캠핑으로 잔 어젯밤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오를수록 바람이 매서워졌다. 가파른 비탈길이 끝나자 능선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클라이브와 앨런은 천천히 가겠다고 해서 그즈음 헤어졌다. 무리해 걷다가 종아리에 탈이 났다는 앨런이었다. 그사이 무릎이 괜찮아진 나는 그 고통을 잘 알기에 마음이 더 쓰였다. 하긴 누가 누구를 걱정하랴, 그들은 트레킹을 일상적으로 즐기는 반 전문가들이었다. 길을 재촉했다. 모처럼의 호기를 놓치면 안 됐다. 앞서며 몇 번씩 고개를 돌려 그 둘을 확인했다.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어 까만 점 같은 인사를 보내주었다.
10시 반, 오늘의 최고봉 567m 앵글탄 봉(Angletarn Pikes) 바로 옆을 지났다. 약 530m 정도 높이의 능선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봉을 지나자 이제 호수가 나온다. 봉의 이름과 같은 앵글 호수(Angle tarn)다. 가장자리를 따라 크게 도는 길, 보는 방향에 따라 호수의 빛깔이 변해서 아름다웠다. 역광의 짙은 그림자와 하늘을 품은 푸른 수면이 함께 빛났다. 호숫가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어느 연인이 참 부러워 보였다. 이곳에 함께 있는 일상을 괜히 상상해 본다. 반짝반짝, 정신 차리라는 듯 먹구름이 걷히며 갑자기 햇빛이 왈칵 쏟아졌다.
길은 돌담을 따라 나란히 나아간다. 이 돌담으로 산의 구획을 나눈 것처럼 보였다. 풍광에 빠져 넋 놓고 걸어가는데, 타닥타닥 경쾌히 달려온 백발의 트레일 러닝 언니가 대뜸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유 코스투코스팅?" 그렇다고 하니, 여기서부터 길이 헷갈릴 수 있다며 자신을 따라오라 한다. 팔로우 미. 이 한마디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그녀. 근데 그게 타이밍 상 기가 막혔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돌담을 따라 계속 직진했을 게 뻔했다. 덕분에 돌담과 바위 둔턱을 넘어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뒤에서 보고 초보자임을 바로 알아챘던 게 분명했다. 결코 다시 볼 수 없는 그녀에게 속으로 인사했다. 땡큐 쏘머치.
또 다른 호수가 저 멀리 보인다. 동시에 웬 봉우리 하나가 덩그러니 눈앞에 서 있었다. GPS는 저 봉우리를 향해 나아가라고 한다. 맙소사, 오늘 넘어야 하는 게 앵글탄 봉만이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심지어 그보다 더 높았다. 긍정적인 마음을 억지로 장착해 가며, 나름 부지런히 올랐다. 아침의 호기가 그새 반쯤은 사라졌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마 막 툴툴대려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중턱에서 뜬금없이 “아 유 미스터 킴?”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앞선 길에 누가 있는 줄도 몰랐던 거다.
처음 보는 어느 부부였다. 폴과 디나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다. 클라이브랑 앨런에게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단다. 보자마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고 하셨다. 꼭 만나고 싶었다는 둥, 너무나도 반가워하셔 몸 둘 바 없이 부끄러웠다. 지나가다 아는 체를 받다니 어쩐지 머쓱했다. 마치 CTC계의 셰릴 스트레이드라도 된듯한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디서고 종종 만나자며 헤어졌다. 결국 오늘 하루 종일 엎치락뒤치락 계속 만나게 됐다.
이 길은 천국으로 가는 길인가요? 높다랗게도 올랐다. 12시 5분경 정상에 도착했다. 눈앞을 가로막았던 봉우리, 739m의 더 노트(The Knott) 바로 곁을 지나가는 길이었다. 잠시 쉬며 사과와 초콜릿을 먹었다. 찬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앉아 있자니 꽤 추웠다. 이제껏 9.6km 정도 왔다. 갈 길이 아직도 멀었다.
산 능선을 따라가는 길의 풍경이 황홀했다. 자연도 길도 날씨도, 모든 게 완벽했다. 주변의 산세와 저 아래의 호수, 바람 따라 넘실거리는 들판의 풀, 길게 이어지는 길의 흔적. 오늘의 부디 마지막일 780m 키드스티 봉(Kidsty Pike)으로 나아가며 발걸음을 몇 번이나 멈췄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잘못 찾은 정보였나 보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마지막 최고봉이라던 앵글탄 봉이 무색하게, 하나도 아니고 봉우리를 두 개나 더 걸쳐가는 길이었다. 더군다나 모두 앵글탄 봉보다 훨씬 높은 봉우리들이었다. 아무렴 어때,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당장 눈앞의 장면이 장관이다. 기분만은 좋았다. 덩달아 몸의 힘듦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12시 50분, 하산이 시작됐다. 슬슬 무릎이 아파왔다. 빨리 걸을 수 없었지만, 그럴만한 길도 아니었다.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가파른 바윗길도 있었다. 어딘선가 갑자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뒤쫓아와 쫓기듯 넘어질 뻔도 했다. 곤혹스러운 길이었다. 하긴 내리는 길은 항상 고통을 동반한다.
하산의 마지막은 진창이 장식했다. 곳곳이 늪이었다. 발이 푹푹 빠져 신발이 반쯤은 젖었다. 아무리 고어텍스라 해도 이쯤 되니 발이 눅눅했다. 어느새 확 지쳐있었고, 지친 만큼 걸음은 더 대충이 되어버렸다. 다 내려오고 나니, 2시 10분이었다. 번뱅크스(Burnbanks) 마을까지는 6.6km, 숙소까지는 아직 9km가 남은 지점이었다.
하웨스 호수(Haweswarer) 가장자리를 따라 길을 걷는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여섯 번째로 크다는 호수다. 이 호수 끝까지 걸어가야 겨우 번뱅크스가 나온다. 가로로 아주아주 긴 호수였다. 가로로 아주아주 길게 걸어가야 했다. 에너데일 호수에서도 그렇고, 희한하게도 호수길만 걸으면 늘 이렇게 기진맥진이 되고 만다. 오르막길도 꽤 있어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걸어야 했다. 무념무상이라 해야 할까, 걷는데만 집중하려 노력했다.
계곡과 진흙을 밟고, 물웅덩이를 넘었다. 무성한 고사리 풀밭을 헤쳐 나아간다. 심상치 않은 바람에 비가 걱정됐지만, 다행히 내리진 않았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길고 긴 이 호수를 빠져나간건 4시 10분 경. 드디어 오른쪽에 호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나무 문을 열고 나서니 어느덧 집이 하나 둘 보였다. 여기가 바로 번뱅크스다. 4시 20분, 번뱅크스 주차장에서 오늘의 CTC 길은 끝이 났다.
뒤로 따라오는 폴과 디나, 그보다 한참 더 뒤에 오고 있을 클라이브와 앨런이 걱정됐다. 이미 늦오후였고, 어둠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샤프(Shap) 마을까지 여기서 8.2km를 더 가야 했다. 괜히 아무도 없을 뒤를 흘끗 돌아보며 잠깐을 기다렸다. 속으로 응원만 보냈다. 나도 더 늦기 전에 남은 길을 마저 나아가야했다.
2.4km의 시골길을 더 걸어 뱀턴(Bampton) 마을에 있는 숙소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 걸었다. 비가 올 듯 말 듯, 뜬금없는 햇빛이 비치다 사라졌다. 엄청나게 큰 젖소들도 있었다. 마을의 강아지들이 일제히 짖어대기도 했다. 전원 풍경 곁의 도로길이라니, 어쩐지 위클로웨이가 생각났다. 먼 과거처럼 벌써 아득히 느껴졌다.
어느덧 숙소에 도착했다. 간판이 보였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후 5시. 거진 9시간을 걸어왔다. 온몸이 너덜거렸다. 얼른 체크인부터 했다. 아마 행색이 추레했을 거였다. 직원분께서 CTC를 걷고 있냐고 질문을 하셨다. 나도 모르게 그만 왜 이리 힘드냐고 투덜거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분께서 웃으시며 오늘 걸은 길이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해 주신다. 아, 근데 그 말이 진짜 위로가 됐다.
CTC 중 제일 비싼 숙소였다. 겉보기엔 건물이 작아도 방과 화장실은 깨끗하고 아늑했다. 뜨거운 샤워물에 그만 주저앉아 넋 놓고 물을 쐤다. 다리에선 구정물이 흘렀다. 마르지 않을까 걱정이 됐지만, 일단 빨래도 했다. 체크인하며 미리 예약해 둔 근사한 저녁도 먹었다. 길 걷고 마시는 생맥주는 못 참지, 맛있는 Birra Moretti가 시원하게도 막 넘어갔다.
두둑한 배로 침대에 누우니 아, 몸이 살살 녹는다. 온몸에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비싼 방이 아까우니 되도록 늦은 밤에 자야지. 어제의 느린 와이파이에 보상이라도 받듯, 오늘만큼은 실컷 써야지. 근데 어쩌지 잠이 쏟아졌다. 안 그러고 싶어도 눈이 막 감겼다.
내일도 만만찮은 22.6km다. 샤프(Shap) 마을을 지나면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벗어나는 거라고 했다. 기대해 마지않던 헤더꽃 황무지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거다. 그리고 CTC 100km 지점도 곧 넘게 되는 거였다. 총 17일의 일정 중에 1/3을 이미 걸었다. 잘하고 있었다. 스스로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다. 아니, 진짜로
조용히 박수를 쳐주었다. 그리곤
결국 일찍 잠들었다.
2024.09.09.
걷기, CTC 6/17
40,363보(24.7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