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대략 난감

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4일 차

by 달여리
보로우데일~그래스미어(≈16.0km)


침대 매트리스가 썩 좋지 않아 허리가 뻐근했다.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여섯 시쯤 눈이 떠졌다. 익숙한 듯 세수를 하고 모든 짐을 챙겨 공용 식당으로 내려왔다. 별로 떠벌린 짐이 없어서 수습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오늘 아침도 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였다. 식사를 한 뒤 8시 반에 출발했다.


새소리가 상쾌하다. 풀숲의 이슬을 감상하며 촉촉이 길을 나섰다. 다리 건너 돌담과 문 너머의 들판. 버스가 다니고 호텔도 있는 작은 마을 로스웨이트(Rosthwaite)을 금방 지났다. 농장 위를 한참 걷다 잘못된 길임을 직감하고 담을 몰래 넘기도 했다. 이끼 낀 돌담 사이의 숲길, 잔잔한 물줄기가 자갈 사이를 흘러내렸다. 누가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아니랄까 봐, 졸졸졸 물과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산세에 따라 스톤스웨이트백(Stonethwaite Beck) 계곡이 오른쪽으로 내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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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들판, 마을을 지나 돌담길>

9시 40분 즈음부터 오르막이 시작된다. 먼 시선을 걸친 높은 산이 한 눈에도 우람해 보였다. 저길 넘어가려나보다, 지레 짐작할 수 있었다. 뻔했다. 길은 한치의 숨김도 없이 그 방향으로 곧게 뻗어있었다. 리닝 크래그(Linning Crag)라는 542m 높이의 산이다. 큰 숨을 들여 배에 긴장을 한 움큼 집어넣었다. 이때만 해도 이게 오늘의 유일한 고비인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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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고 올라 정상>

돌비탈길을 구불구불 오른다. 예상보다 경사가 가팔랐고, 날씨마저 무더웠다. 모자챙 끝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온몸이 금세 땀범벅이 됐다. 중간중간 한 번씩 쉬어갔다. 물이 흐르는 구간이 있어 세수도 하며 땀을 식혔다. 다시 부지런히 오른다. 마지막 구간은 거의 암벽등반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기어올랐다. 가방 무게에 휘청거리지 않으려면 바짝 엎드려야만 했다. 뒤돌면 절경, 앞돌면 절벽. 그래도 저기까지만 오르면 된다는 심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벌써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이 자꾸 미끄러졌다. 더운 땀과 식은땀이 한데 섞여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10시 50분.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너른 전경만큼이나 가슴을 열어 주었다. 아침에 챙겨 온 사과부터 꺼냈다. 정상의 꿀맛을 달콤히 만끽했다. 훤했다. 내려다 보이는 그 풍경을 보며, 여기까지 올라왔음에 약간은 감격했다. 저질몸이 만들어낸 얕은 영광을 그럼에도 마음껏 누렸다.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전부였다.

<땅이 지속된 시간과 그 힘이 느껴졌다>

11시 5분, 다시 길을 나섰다. 완만한 능선 따라 바닥에 깔린 판석을 밟아 나갔다. 슬슬 하산길이 보이기 시작해서 안심했다. 힘든 건 이제 다 끝났구나, 이땐 그랬다. 길을 내려 목적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오늘은 수월하네, 그러면서 약간 흥얼거리기까지 했던가. 좌우로 펼쳐지는 정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사이를 유유히 흘러가듯 걸어가기만 했다. 자연의 일부라도 된 듯, 느긋이 유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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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하산인줄 알았던 그 평화로운 풍경>

40분쯤을 내려와 계곡을 한 번 건넜다. 기대와 달리 거기 오르막이 있었다. 한숨 돌린 순간, 길은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완전히 내려가기 위한 작은 과정일 거라고 믿고 싶었다. 겉보기엔 오르막이 높아 보이지 않아 더 그랬다. 얼마간 올라섰다. 보던 대로 오르막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 끝에 서자, 시야가 갑자기 확 열렸다. 눈앞으로 난데없는 장관이 차르르 펼쳐졌다. 끝없이 이어진 능선이 겹겹이 파도처럼 발끝까지 밀려와 있었다. 동시에 절망했다. 막막함이 한껏 가슴에 차올랐다.


봉우리마다 오르내림이 이어진다. 지평선 위로 솟구치듯 그렇게 굽이치고 있었다. 더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GPS는 분명히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안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길의 위압감만이 남았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기에, 기어코 발은 또 앞으로 나아간다. 능선 위로 올라서며 다시 한번 길 위에 서 있는 스스로를 확인했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걷고 있다, 확신했다. 이 아득한 난감함마저 온전한 감각으로 매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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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산, 끝없이 이어졌던 봉우리들>

마실 물도 얼마 남지 않았다. 목마른데 배까지 고팠다. 참을 수 있을 만큼 참았다. 물을 최대한 아꼈다. 페퍼민트 사탕을 하나씩 녹여 먹었다. 게다가 너무나 더웠다. 몸에 힘이 실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자주 쉬었다. 봉우리를 몇 개나 넘어가고 있는 걸까, 미처 세어보지도 못했다. 풍경에 감탄하던 발걸음이 점차 너털 걸음이 된다. 손에 쥔 등산 스틱과 다리가 모두 흐느적거렸다. 저 봉우리가 마지막이야, 하고 넘으면 저만치 봉우리들이 또 있었다. 뭐 그런 식이었다. 좋은데, 풍경이고 뭐고 참 좋은데, 날씨마저 이토록 좋은데, 문제는 내 체력이었다. 콧물은 왜 또 이렇게 나오는지, 참 처량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길 러닝으로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 낙담에 아주 쐐기를 박는 저 씩씩함이었다. 못 이기는 척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눈곱만큼만 과장해 말하건대, 와락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240907_A1_201(edit2)(resize).jpg <와... 여기가 진짜 마지막 봉우리>

2시. 드디어 마지막 봉우리를 만났다. 진짜 여기가 능선의 끝이었다. 뿌듯함에 GPS지도 위 그 이름까지 캡처해 뒀다. 헤름크레그(Helm Crag)다. 겨우 해발 405m였다. 적어도 대여섯 개의 봉우리는 지난 것 같은데 왜 지도에는 4개밖에 표시가 안될까, 괜히 억울했다. 몸은 수십 개의 봉우리라도 넘은 듯 만신창이였다. 가방을 던져놓고 풍경에 몸을 내맡겼다. 큰 호흡. 몸의 열기. 귀찮게 구는 벌레들. 산 아래로 그래스미어(Grasmere) 마을이 보였다. 저기가 바로 오늘의 종착지였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15분의 휴식. 이제 하산이다. 여전한 돌길이라 발바닥과 발목, 무릎이 애를 먹고 있었다. 마음은 쏜살인데,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내려가면 물도 왕창 마시고 뭐든 다 사 먹어버려야지, 속으로 그랬다. 먹고 싶은 것을 잔뜩 머릿속에 나열해 갔다. 이제 좀 잘 닦인 평지를 걷고 싶었다. 꾸역꾸역 내려오다 보니 결국 산길이 끝나긴 끝이 난다. 2시 50분. 수미상관인가 이끼 낀 돌담길을 마지막 세리머니처럼 지났다. 샛길과 초원, 돌다리와 나무다리를 지나 이윽고 그래스미어 마을로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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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사실 사진기를 들 힘도 없었다.>

3시 5분, 길은 도중에 끝이 났다. 오늘의 숙소 YHA 그래스미어 유스호스텔은 CTC에서 벗어나 10분쯤을 따로 걸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부터 벌컥벌컥 마셨다. 1.5리터 정도를 그냥 한 번에 마셔버릴 정도의 갈증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했다. 아뿔싸, 이곳도 5시 체크인이었다. 다행히 출입을 막아두진 않았다. 로비에서 휴식도 취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샤워실 안내 문구가 있길래, 그냥 냉큼 샤워랑 빨래부터 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빨래건조실이 있어 좋았다. 편한 마음으로 로비에서 쉬고 있자니, 4시 반쯤 직원분께서 오셔 이른 체크인을 해주신다고 하신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위치의 침대를 잡았다. 잠시 누워 쉬었다. 적당한 시간에 식당으로 내려가 메뉴를 구경했다. 오늘은 무조건 다 사 먹을 거야 했던 말을 지켜야 했다. 고심 끝에 피자 한 판과 맥주를 시켰다. 양이 많았다. 배가 부른들, 한 판 모두 입안에 구겨서라도 다 넣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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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의 방 그리고 저녁의 호사 맥주&피자>

영국 아재 두 분을 여기서 또 만났다. 그들도 각자 피자 한판씩. 한 테이블에 앉아 소소한 시간을 함께 즐겼다. 이번엔 구글번역기까지 동원됐다. 아주 짧은 대화를 듬성듬성 나눴다. 그러다 또 각자 할 일들을 했다.


알게 모르게 '걷는다'는 행위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늘처럼 첩첩산중이 계속된다면 앞으로의 길을 감당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안 됐다. 내일은 비예보도 있다. 오늘보다 높은 산도 하나를 넘어야 했다. 미리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각오마저 귀찮을 만큼 몸이 노곤했다. 오늘은 이미 끝났고 내일은 어차피 내일의 내가 또 감당하겠지. 에잇 그래, 다 됐고


맥주라도 마음 놓고 먹자.



2024.09.07.

걷기, CTC-4/17

28,868보(18.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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