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2일 차
클리터~에너데일유스호스텔(≈17.3km)
꽤나 서늘했던 호텔방에서의 하룻밤이 무사히 흘렀다. 라디에이터는 온기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폭풍의 언덕」은 지루해 결국 얼마 읽다 말았다. 비틀스를 아주 지겹게 들었던 밤이었다. 잘 잤다. 그래도 몸이 뻐근했다. 일자로 곧게 기지개를 켰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배낭을 완전히 쌌다. 조식을 먹으러 가는 김에 아예 걸을 채비를 다하고 나간다. 아직까지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힘겨웠다. 웬만해선 다시 방으로 올라오고 싶진 않았다. 기대치 않았는데 조식은 의외로 푸짐했다. 창틈으로 아침의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CTC 둘째 날이 나름 상쾌하게 시작됐다.
든든히 아침 먹고서 8시에 출발했다. 여전히 가방은 묵직했다. 초입부터 길을 잘못 들었지만, 친절히 알려주시는 주민분이 계셔 다행이었다. 다리 건너 숲으로 들어간다. 쌀쌀한 공기는 흐렸지만 저만치 햇빛이 있었다. 버려진 건물 사이, 길을 막아선 흰털 고양이가 애교를 부린다. 도도한 생김새와 달리 겁은 없고 아양이 많았다. 다가와 다리 사이를 비볐다. 조심조심 쓰다듬으니, 발라당 누워 앙앙 교태까지 부린다. 털이 매우 보드라웠다. 그 촉감에 제주에 있을 반려묘 호야와 모무가 잔뜩 보고 싶어졌다. 분명 먹을거리를 요하는 눈빛인데 줄 게 마땅치 않아 속상했다. 미안해, 이만 갈게. 곁을 그냥 지나자, 세상 허무한 표정을 짓더니 토라진 듯 휙 뒤로 돌아앉는다.
8시 30분. 오르막이 시작된다. 자갈로 시작된 길이 서서히 높은 언덕으로 닿는다. 아마도 그 이름은 덴트힐(Dent Hill). 저기로 오르면 구름이 손에라도 잡힐까, 역광이라 길은 더욱 아련했다. 문득 뒤돌아 본 풍경이 장관이다. 저기 저 멀리 어제 헤어진 줄 알았던 바다도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덕에 장면은 다채로운 색으로 빛났다. 몇 걸음마다 뒤돌게 되는 풍경이었다. 9시 10분께야 다 오른 정상, 가방을 벗고 좀 쉬었다. 검은 돌담과 황톳빛 풀, 뾰족뾰족 삼나무, 꼭 오름처럼 둥그렇게 솟은 언덕들. 위클로웨이에서부터 자꾸만 제주가 떠오르는 풍경을 마주한다. 여행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길은 '그리워해라- 그리워해라-' 그리 말하고 있었다. 들판의 풀빛이 반짝여 말없이 눈부셨다. 잡힐 듯 가까웠던 구름은 멀리 도망가버린 지 오래, 이미 여기 없었다. 텅 빈 바람만 불어왔다. 오르며 흘렸던 땀은 어느새 다 식어있었다.
다시 출발, 완만한 구간을 내려간다. 구릉의 늪지대를 통과한다. 발이 푹푹 빠져 애를 먹었다. 제대로 디딜만한 바닥을 찾는 게 웬만큼 쉽지가 않았다. 경험이 없다 보니 아무래도 더 그랬다. 어차피 주변엔 아무도 없다. 눈앞의 상황을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나가야 했다. 가다 돌아오고 돌아가다 더 돌아가면서, 그렇게 겨우 지나갔다. 좁은 길, 넓은 길, 자갈길을 차례로 내렸다. 표지 없는 갈림길도 몇 차례씩 있었다. 어플의 GPS에 의지해 할 수밖에 없었다. 내내 켜 놓다 보니, 핸드폰 배터리가 뚝뚝 떨어졌다.
완만한 능선을 두 개쯤 넘었을까, 들판의 언덕을 가로질러 만난 하산길은 깎아질 듯 아주 가팔랐다. 그리 험하진 않았지만 좁은 경사에 조심은 해야 했다. 실수로 까딱 발을 잘못 디디면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풀길이라 미끄러웠다. 무릎에 무리가 돼 걸음 자체도 버벅거릴 수밖에 없었다. 중간중간 진흙탕도 많았다. 집중과 균형을 아주 잘 잡아야 했다. 다 내려오니 10시 15분이었다. 좀 전 언덕의 정상은 여기서 보이지도 않는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를 따랐다. 냇물 소리가 이끄는 방향대로 길을 계속 잇는다. 첩첩산중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찌 될까. 이런 곳을 걷다 보니 그런 무서운 상상이 자꾸 됐다. 그런데 어딘가 수풀에서 갑자기 바스락 소리가 난다. 몸이 쭈뼛, 그대로 발걸음이 굳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민망할 정도로 순진한 양의 표정이 거기 있었다. 알고 보니 사방이 양들로 잔뜩이었다. 쓸데없는 잡념에 잠겨 주변을 전혀 보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차라리 쟤들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이게 뭐라고 안심이 됐다. 고맙다고 소리 내어 인사까지 했다. 음메, 굳이 화답을 보내준다.
방금 지나온 길이 사실 첩첩산중은 아니라는 듯, 11시쯤 되자 잘 포장된 길이 나왔다. 곧 도로 옆 샛길로 들었다. 도로로 걷지 않도록 걷는 자들을 위해 임시로 만든 길이었다. 온통 진흙이라 걷기가 힘들었다. 미끌거려 몇 번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렇게 25분쯤을 걸었나, 드디어 에너데일(Ennerdale) 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길 위에 벤치가 있어 20분 정도를 쉬어갔다. 원래라면 CTC 1일 차에 여기까지 오는 거였다. 만약 어제 한 번에 왔더라면 무릎의 속도상 적어도 늦저녁은 돼야 도착했을 게 뻔했다. 급할 것도 없는데 차라리 나누길 잘했다. 이렇게 걸어도 충분히 힘들다.
아직 9km 정도밖에 오지 않았는데 12시가 다됐다. 적절한 속도의 걸음이 잘 가늠되지 않았다. 뻐근한 무릎 때문인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인지, 걷는 게 다소 답답하게 느껴졌다. 더디게 생각될수록 배낭이 왠지 더 무거워졌다. 손으로 배낭의 무게를 덜어보려 애썼다. 어깨가 끊어질 듯 아팠다. 한 발 떼어 다음 발, 그 단순함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미리 도착을 상상하기보다는, 지금의 걸음을 자각하는 게 더 나았다.
에너데일 마을에는 숙소도 식당도 있었다. 예약이 다 찼다고 해 결국 숙소를 구하지 못한 위치였다. 곁눈길도 주지 않고 냉정하게 마을을 지나쳤다. 동네가 아늑해 보여 괜히 더 속상했다. 포장된 길을 따라 30~40분 남짓 걸어가자, 곧 에너데일 호수(Ennerdale Water)가 나왔다. 기대보다 거대한 크기에 놀랐다. 흐르는 호수라 그런지, 파도 소리 같은 게 나서 신기했다.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난 좁은 길을 걷는다. 멋진 풍경에 처음엔 신이 났다. 물결, 헤더, 주변의 근엄한 산세. 자꾸만 멈춰지는 걸음, 즐겁게 피어오르는 미소까지도. 하지만 꽤나 길고 험한 길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거친 돌길이어서 발목이 꺾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때론 절벽처럼 보이는 바위 위로 기듯이 올라 넘어야 했다. 냇물을 건너거나 길 위로 물이 흐르는 경우도 잦았다. 큰 배낭을 메고 걷기엔 다리에 상당히 무리가 되는 길이었다.
초반의 감탄은 어느새 사라지고 발끝의 집중만 남았다. 완전히 피로했다. 약간 짜증이 날 정도였다. 꾸역꾸역 걸었다. 호수 가장자리의 길이는 4km라는데 그게 정말일까. 정말 끝날 듯 끝나지 않는다. 눅눅한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른다. 거의 한 시간 반 이상을 쉬지 않고 걸었다. 호수를 겨우 벗어난 게 두 시 십 분인가 그랬다. 비가 흩날리다, 다시 햇빛. 어느새 호수가 한참 멀어져 있었다. 돌이켜보니 역시 아름다웠다. 힘들다고 투덜거리만 하다니, 그제야 후회가 좀 됐다.
호수가 끝나면 오늘의 종착지 YHA 에너데일 유스호스텔이 바로 나올 줄 알았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으니 정확한 숙소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건물이라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 당혹스러웠다. GPS상에도 호스텔이 나와있지 않았다. 길 위에 있으리라 그리 믿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불안했지만 길의 방향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호수로 흘러들어 가는 계곡을 건너 조금 걸어가자, 다행히 곧 호스텔 이정표가 나왔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YHA 에너데일 유스호스텔이 있었다. 있긴 정말 있구나. 2시 35분, CTC 2일째 길이 그렇게 끝이 났다. 걸어온 거리에 비해 몸이 훨씬 지쳤다.
호스텔이 생각보다 작아 놀랐고, 건물 안에 직원이고 뭐고 아무도 없어서 더 놀랐다. 문이 잠겨있지도 않았다. 와이파이는 물론, 여전히 핸드폰 신호마저 잡히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하는 수 없이 가방만 내려놓고 공용공간에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등산화를 벗고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핸드폰 충전을 꽂고 주방에서 커피를 끓여 먹었다.
한참 그러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불쑥 들어왔다 나가는 게 보였다. 부랴부랴 쫓아가 물어보니 5시부터 체크인이라며 쿨하게 사라지신다. 아직 한 시간 반은 더 남았다. 할 일도 없겠다, 혼자서 숙소를 둘러봤다. 2층에 샤워실이 있었다. 하는 수 없지, 그냥 샤워마저 해버렸다. 샤워실이 너무 좁아 아주 빨래까진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옷은 하루 더 입기로 하고 양말과 팔토시 정도만 세탁했다. 내려와도 어차피 건물에 아무도 없긴 매한가지였다. 몸이 개운하니 그나마 피로가 조금 풀리는 듯도 했다.
짐을 완전히 풀고 편하게 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답답하긴 했다. 그래도 짜증은 내지 않기로 했다. 그냥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쉬었다. 여행한 지 벌써 30일째, 내일 교체해야 하는 유심을 가방 깊숙한 곳에서부터 꺼내 뒀다. 인쇄해 둔 티켓들 중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찢어버렸다. 저녁으로 먹을 라면도 미리 꺼내놓았다. 매일의 로고를 그리고 오늘치의 글도 대충 정리했다. 이제 바로 잠들어도 상관없을 만큼 할 일은 다했다. 그러게, 이게 다 체크인이 늦어진 덕분이다. 딱히 더할 말도 없으니 그냥 땡큐라 하자. 어이쿠 혼잣말이 많이 늘었다.
신기하게도 5시쯤이 되자 하나둘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창구가 열리고 직원이 나타났다. 제일 먼저 체크인을 했다. 침대도 일등으로 잡았다. 반갑게 말을 건네온 (토니와 디디에라고 소개하신) 어르신들과 짧은 담소도 나눴다. 다들 말하기 좋아하시는 분들이신지, 저녁이 되자 이 작은 로비가 아주 씨끌북적거렸다. 어느새 숙소가 꽉 찰 만큼이 됐다. 놀랍게도 창구에선 병맥주에 저녁 식사까지 팔고 있었다. 조식 신청도 미리 해두었다. 저녁으로는 너구리를 끓여 먹은 뒤 홍차 티백을 한 잔 마셨다. 에너데일 지역 맥주가 있다는 소식에, 망설이다 기어코 맥주도 한 병을 시켜 먹었다.
소파에 앉아 창밖이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로비에서 바라보이는 산의 풍경이 참으로 멋졌다. 분홍빛 구름이 산머리에 살포시 걸치다 이내 사라진다. 안개 낀 사이에도 빛은 요란하게 쏟아지곤 했다. 소란한 말소리에 정신이 한껏 산만했다. 에너데일 맥주는 쏘쏘. 역시나 「폭풍의 언덕」은 잘 안 읽혔다. 사위가 어둠에 잠기자 풍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창밖엔 검은 얼굴들만 동동 떠올랐다.
그 소란을 벗어난다. 밤이 짧도록 일찍이 침대로 향했다. 왕왕 소음소리가 아래층으로부터 나직이 울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뒤척임도 없이 바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2024.09.05.
걷기, CTC 2/17
31,625보(21.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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