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3일 차
에너데일유스호스텔~보로우데일(≈16.0km)
아홉 시 취침, 여섯 시 반 기상. 중간에 몇 차례 깨긴 했지만 대체로 푹 잔 편이었다. 아홉 시간 반을 내리 잤으니 그래 자긴 꽤 잤다. 확인해 보니 여섯 개의 침대 중 다섯 개가 찼다. 모두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셨다. 곤히들 주무시고 계신다. 하물며 깨시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방에서 나갔다. 세수를 한 뒤 공용공간으로 내려갔다. 안티푸라민 마사지를 꼼꼼히 해뒀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긴 스트레칭을 했다. 다행히 무릎의 상태가 더 나빠지진 않았다.
어제 나름 고생을 했다. 위성 GPS는 문제없이 동작했지만, 트레킹 어플로 숙소 찾기란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핸드폰 신호만 잡히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은 구간이 상당히 많다는 게 문제였다. 별도의 오프라인 지도가 필요했다. 예전에 사용하던 Maps.me라는 어플이 문득 생각이 났다. 와이파이 환경일 때 해당 어플을 다운받아주는 게 좋겠다. 오늘 묵을 호스텔엔 부디 와이파이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
짐을 다 챙겨놓은 뒤 식사 후 바로 출발할 요량이었다. 16km로 오늘도 거리가 길지는 않았다. 대신 그레이 노츠(Grey Knotts)라는 꽤 높은 산 하나를 넘는 루트였다. 아직까지도 걷기 전엔 긴장이 꽤 됐다. 주방에서 슬슬 맛있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빵, 주스 등이 간단하게 나오는 컨티넨탈 조식은 7시 반부터 식사가 가능했지만, 8시부터 가능한 일반 조식(full English Breakfast)으로 주문을 해뒀다. 방으로 올라가 짐을 모두 챙겨 나왔다. 그 사이 깨신 몇 분께서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다.
굿모닝.
호스텔에 묵은 대부분이 길을 걷는 분들이시라 이른 아침이 함께 시작됐다. 어느새 룸메이트 분들도 하나 둘 전부 아래로 내려오셨다. 아내가 이렇게 길게 여행도 보내주냐고 부럽다는 영국 아재, 오늘은 날씨가 좋을 거라며 신나하는 이탈리아 아재, 비틀스 노래를 연신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는 프랑스 아재 그리고 안티푸라민 냄새 풀풀 풍기는 나 한국 아재. 또 다른 아재들과 언냐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분주한 아침이었다.
일곱 시 반이 채 되기도 전에 나설 채비는 다 마쳤다. 유심을 갈고 미리 커피도 내려 마셨다. 밥 먹고 이제 걷기만 하면 되었다. 8시에 재깍 메뉴를 서빙받았다. 베이컨, 소시지, 베이크드 빈즈, 에그 프라이, 구운 토마토, 빵과 시리얼. 풀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는 푸짐했다. 덕분에 아침을 정말 배부르게 잘 먹었다. 테이블 위 스몰토크는 이어졌다.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8시 20분 출발. CTC는 호스텔에서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산 사이 자갈길을 따라 한참을 걷는다. 웅장한 산이 양옆을 지키고, 오른쪽으로는 계곡이 흘렀다. 아침 이슬을 머금은 자갈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탈리아 아재 말대로 날씨가 참 좋았다. 내일까지는 날씨가 좋고 모레부터는 비가 올 거라고 했다. 좀 전 체크아웃할 때 호스텔 직원분께서 아주 은밀한 비밀이라는 듯 슬쩍 날씨예보를 귀띔해 주셨다.
9시 50분, YHA 블랙세일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5.2km 남짓을 걸어왔다는 이야기다. 더워서 벌써 땀이 잔뜩 났다. 먼저 출발한 토니(이탈리아 아재)와 디디에(프랑스 아재)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물도 마실 겸 잠시 쉬어간다. 슬쩍 보니 여기도 5시부터 체크인이라 적혀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YHA 호스텔 대부분의 체크인 시간이 오후 5시였다.) 비번 잠긴 와이파이 신호가 하나 떠서 신기했다. 호스텔의 것인지 따로 확인해보진 않았다. 현지인의 핫스팟 같은 걸지도 몰랐다. 행색이나 위치로 봤을 땐 와이파이가 될 턱이 없어 보이긴 했다.
10시 5분 다시 출발했다. 토니와 디디에 아저씨가 저기 저 높은 산으로 오르시는 게 보였다. GPS가 안내하는 방향은 완전히 다른 방향이라 이제 헤어지나 보나 했는데, 빙 돌아 어차피 그쪽으로 향했다. 늪과 계곡을 건너뛰어 깊은 산을 오른다. 저 멀리 이정표처럼 손톱만한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게 은근 든든했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중간쯤 뒤돌아 보니 올라온 길이 아찔했다. 높아서 무섭기도 했고, 훤해서 아름답기도 했다. 첩첩 산세 아래 오름 같은 둥근 언덕들이 솟아 있었다. 오르는 돌길 위로 군데군데 물이 솟아 흐르기도 했다. 한 번쯤 야호라 외쳐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민폐일 듯 해 꾹 참았다. 귀가 찢어질듯한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는 전투기에 기겁하길 반복했다. 미끄러운 돌들이 있어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무릎도 힘을 냈다. 이 높이를 오르고도 아프지 않다면, 무릎의 완전 회복을 선언해도 될 판이었다.
휴~ 가파른 돌길은 다 올랐다. 11시. 숨이 그만 탁 트였다. 능선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이 조금 더 이어졌다. 이제 힘든 구간은 다 끝난듯했다. 10분쯤을 더 올랐다. 적당한 곳에 쉴만한 곳이 있었다. 바닥에 앉으려 뒤돌았다 완전히 감탄하고 말았다. 펼치진 풍경은 가히 상상을 뛰어넘었다. 바위 산 머리와 저 멀리 호수들, 듬성듬성 흰 뭉치 같은 양들, 얕고 좁은 길과 낮고 가는 풀. 강의 줄기가 뱀처럼 흘렀다.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햇빛을 받아 모든 게 선명했다. 끝내준다, 육성으로 탄식했다. 가방을 던져두고 아무렇게나 앉았다. 숨이 훤했다. 아침에 챙겨 온 사과가 달디달았다.
약 697m의 그레이노츠산(Grey Knotts)을 이렇게 지난다. 이제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길을 따른다. 왼쪽으로 멋진 풍경이 흘러 걸음이 자꾸만 더뎌졌다. 평생 다시 못 볼 풍경이라는 생각이 더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다. 빨리 가고픈 조급함과 멈춰서 바라보고픈 느긋함이 자꾸만 충돌했다. 힘겨움과 즐거움이 거의 늘 동시에 있었다. 어떻게 한들 그 복잡한 속내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풍경 덕에 마음마저 붕 뜬 상태였다. 역시 몸은 벌써 꽤나 지쳐있었다. 생각은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걷는 행위란 무엇일까. 목적지를 향해가는 것만이 중요한 건지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이 길의 목적은 완주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완주만큼 내게 중요한 건 풍경에 머물 시선이었다. 이 기록들과 함께 나아갈 현재라는 시간이었다. 걸음을 멈출 때마다, 여기 있음이 자각됐다. 오히려 걷다 보면 잊게 되는 감각이었다. 그렇단들 완주라는 결과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아감과 멈춤, 그 사이 어디쯤에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문제는 체력이었다. 결국 이게 다 저질 체력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힘들다는 거다. 힘에 부치니 마음의 여유가 생길 턱이 없다.
12시쯤 능선에서 빠져나가며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짧아 보였는데, 바닥이 다 돌이고 또 가팔라 생각보다 길이 더뎠다. 20분쯤 걸려 다 내려왔다. 의외로 주차장에 차들이 많고 복잡했다. ‘Honister Slate Mine’이라는 채석장이었다. 관광지인 건지, 작은 휴게점도 있고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풍경이 좋아 머무는 사람, 트레킹 삼아 이 길을 오르는 사람, 여기서 운영하는 액티비티를 경험하려는 사람 등등 다양해 보였다. 내내 핸드폰이 안 터졌는데, 여기 휴게소에선 와이파이가 됐다. 겸사겸사 스프라이트 하나 사 마시며 30분을 쉬었다. 덕분에 어제부터 못한 연락을 이리저리 나눌 수 있었다.
1시에 다시 출발했다. 그늘에 쉬었더니 그래도 힘이 좀 생겼다. 산을 완전히 내려가는 모양이다. 굽이굽이 완만한 길의 풍경에 눈이 즐거웠다. 굴곡진 산 아래 아름다운 그 배경 사이를 미끄러지듯 걸어간다. 산길-돌길-언덕길을 지나 시톨러(Seatoller) 마을까지 내려오니 1시 55분이었다. 잊고 있었던 토니와 디디에 아저씨를 여기서 또 만났다. 그들은 이제 다 걸었단다. 런던으로 돌아가 하루를 쉬고 각자의 나라로 헤어진다고 한다. 앞으로의 걸음에 대해 진심으로 행운을 빌어주셨다. 만나서 반가웠다며 환한 미소를 서로 주고받았다.
굿바이 앤 굿럭.
이제 2.4km만 더 가면 된다. 마을을 빠져나와 고사리 숲길을 걸었다. 아무래도 동네 산책길인 듯 오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좀 있다. 걷다 보니 계곡이 나왔다. 바위를 넘어 아슬아슬 계곡 곁을 지난다. 산책을 즐기던 강아지가 물로 확 뛰어들더니 왕왕 웃으며 짖어댔다. 깊은 숲인 줄 알았다. 숲이 끝나자마자 호스텔이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걷다 보니 문득 YHA 보로우데일(Borrowdale) 유스호스텔 앞이었다. 어리둥절했다. 2시 20분, 이로서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덩그러니 끝.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체크인은 3시 반부터 가능하지만 샤워는 먼저 해도 된다고 했다. 후다닥 샤워를 하고 빨래도 다 했다. 심지어 건조기가 돌아가는 빨래건조장까지 있었다. 체크인 시간을 기다리며 추천받은 맥주를 한잔 사 먹었다. (생맥주인 데다 종류도 많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상쾌했다.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핸드폰은 안 터지는데, 와이파이가 잘 됐다. 문명과의 재접속! 세상과 연결되는 이 안락함이 새삼스레 좋았다.
체크인을 마친 후 대부분의 시간을 1층 공용공간에서 보냈다. 저녁 메뉴가 있어 사 먹을까 말까 고민을 하다 결국 셀프 라면을 택했다. 식탁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제의 호스텔에서 만난 분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됐다. 영국 아재 두 분이셨다. 반갑게 인사했다. 스스럼없이 같은 테이블에 앉으시더니,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여행 길게 보내주는 아내가 부럽다는 바로 그 영국 아재셨다. 친구 두 분이서 CTC를 함께 걸고 계신다고 했다.
그래도 될래나.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직업을 물어보면, 그냥 Social Worker라고 하고 있다. 3년간 일했고 1급 자격증까지 있으면 그리 말해도 되는 거겠지. 그만뒀다는 말까진 굳이 하지 않을 뿐이었다. 사는 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제주에 대해서도 짧게 설명해 드렸다. 제주올레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섬의 가장자리를 걷는 437km의 트레일이라 소개를 하자 작은 관심들을 보이셨다. 평생 꼭 한 번쯤은 가봐야 하는 멋진 트레일이라고 뻥을 좀 가미해 가며 사진까지 보여드렸다. 내 영어가 유창하다면 할 이야기는 많지만 아쉽게도 말은 자꾸 짧아졌다. 그런데도 이 대화가 재밌는지 연신 옆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신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머쓱하면서도 포용받는 듯해, 어쩐지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저녁 무렵이 되자 이 넓은 호스텔이 가득 찰 정도로 북적거렸다. 사람들과 쉽게 섞이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이런 분위기가 어떨 땐 꽤 마음에 들기도 한다. 길을 걷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는 공간 개념이 참 좋았다. 이 같은 공간이 우리 한국에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생각해 보면 트레킹이란 게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향유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지형이나 생활방식, 문화습관 등이 다른 탓일 것이다. 좋고 나쁨은 없겠지만, 여기서 느낀 분위기는 분명 한국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벌써부터 그리운 감정이 일었다.
잊지 않고 오프라인 지도도 다운받아 뒀다. 내일부터는 숙소가 모두 길에서 정도껏씩 벗어나 있어 마침 필요하기도 했다. 일찍이 준비를 하지 못한 탓에 길이 더 길어졌지만, 그건 가까운 곳에 숙소가 많지 않은 CTC의 특성 탓이기도 했다. 걱정은 됐지만, 그게 걱정하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든 늘 해결이 된다는 걸 잘 알았다. 근심은 적당히. 무릎이 욱신하긴 해도 이만하면 괜찮은 편이었다. 안티푸라민 마사지는 놓치지 않고 했다.
시끄러운 Bar를 뒤로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그 웅성거림이 방으로도 따라왔다. 늘 그랬듯 오늘도 피곤했다. 소음에도 잠 들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가방은 많은데 침대는 아직 모두 비었다. 제일 먼저 잠들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했다. 양치를 한 뒤 완전히 침대에 누웠다. 침대 맡의 전구를 아직 켜둔 채 하루치의 글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굿나잇.
탁, 불을 껐다. 동시에 하루가 완전히 끝이 났다.
2024.09.06.
걷기, CTC 3/17
25,848보(16.9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