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5일 차
그래스미어~패터데일/YHA헬벨른(≈20.9km)
새벽 네 시 반쯤 깨서는 더 이상 잠들지 못했다. 멀뚱멀뚱 어둠에 누워 망설이다 기어코 몸을 일으켰다. 괜스레 지하 건조장에 내려가 빨래 상태를 확인했다. 텅 빈 공용공간에 앉아 애먼 스트레칭도 했다. 건물은 온통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하릴없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몸을 뉘었다. 잠이 들지 않으니 쓸데없는 상념만 솟구쳤다. 걷기 전엔 늘 긴장이 됐다. 밤의 긴장이 결국 이렇게 새벽의 불면으로 이어졌다. 여섯 시까지 견디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예 짐을 다 싸들고 로비로 내려갔다. 준비를 마치기 전에 안티푸라민부터 발랐다. 엄지의 밴드도 새로 갈아줬다. 적막의 새벽을 와이파이와 함께 최대한 즐겼다. 어둠이 밝아오기까지 자리에 앉아 가만히 조식 시간을 기다렸다.
어제저녁 영국 아재들과 메일까지 주고받았다.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소개를 나눴었는데, 이렇게 자주 만날 줄 몰라 굳이 이름을 기억에 두고 있진 않았었다. 그들은 날 기억해 만날 때마다 계속 KIM이라 불러주고 있었다. 이대로 어물쩍 넘어가는 게 죄송스러워, 민망하지만 그들의 성함을 다시 여쭐 수밖에 없었다. 클라이브와 앨런. 검은 눈의 낯선 이방인을 흔쾌히 받아주는 그들이 감사했다. 유독 나에게만 친절해 그것도 참 의외였다.
본인들이 걸을 때 쓴다는 오프라인 앱(OsmAnd Map)도 알려주셨다. 김치, 제주올레, 산티아고순례길에 대한 이야기까지 드문드문 나눴다. 원 모어? 하시더니 맥주까지 한 병 흔쾌히 사주신다. 시크할 줄만 알았던 영국인의 애정에 하마터면 얼굴이 붉어질 뻔했다. 열화와 같은 삼성폰 자랑에, 아이폰을 쓰는 한국인(나)에 대한 핀잔까지. 농담과 진담이 뒤엉킨 유쾌한 저녁 자리였다. 시끌벅적함의 일원이 된 듯해 스스로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은 캠핑과 숙박을 섞어 CTC를 걷는다고 했다. 일정표까지 펼쳐놓고 서로 계획을 비교해 봤다. 일정이 서로 꽤나 비슷했지만, 숙소는 13일 차에 묵을 호스텔 YHA 오스모덜리(Osmotherley)만 딱 한 번 겹쳐있었다. 어쩐지 우리는 아쉬워했다. 중간중간 연락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자고 하셨다. 메일 주소 교환은 그렇게 이루어진 거였다. 시험 삼아 hello 메일을 한 번씩 주고받았다.
어느새 날이 다 밝았다. 조식시간이 되자 클라이브와 앨런도 식당으로 내려왔다. 굿모닝 인사를 반갑게 나눴다. 함께 식사를 하며 스몰 토킹도 또 시도했다. 식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아직 준비가 덜 된 그들과는 이제 작별인사할 차례였다. 8시 반에 숙소를 나섰다. 8일 후 오스모덜리에서 만날 때까지 서로의 길을 즐기자 응원했다. 이 인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소중한 친구라도 생긴 듯 마음이 아주 든든했다.
어제를 교훈 삼아 처음부터 길을 각오했다. '길고 힘든 여정'이라는 감각을 잠시라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예보와 달리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다. 군데군데 파란 하늘도 보여 그걸 믿고 일단 가본다. 호스텔에서 10분쯤 걸어 나와 CTC 길로 합류했다. 딱, 딱, 딱. 등산 스틱이 일정하게 바닥을 울렸다. 나른한 양들은 에헴하고 두서없이 환영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네주신다. 아침을 연주하는 새들까지, 상쾌함을 느끼기엔 충분한 시작이었다.
"나는 보고 또 보았지만,
미처 그때는 알지 못했네.
이 아름다운 광경이
나에게 얼마나 많은 걸 가져다주었는지"
-워즈워스의 시, 「수선화(Daffodils,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중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향, 그래스미어(Grasmere)를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가 가장 많은 시를 썼다는 도브 코티지(현재 워즈워스 박물관으로 사용)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도보여행자로서 찾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괜스레 시나 한 편 읊조리며 마을을 떠나갈 뿐이었다. 솔직히 잘 알지 못해, 부랴부랴 검색 정도만 해봤다. 에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되...
계곡을 따라 시골을 걷는다. 도로를 하나 건너 좁은 길로 들었다. 잠깐씩 햇빛이 나긴 했지만, 조금씩 구름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9시 5분, 문 넘고 계곡 건너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됐다. 산과 산 사이 골짜기가 굽이굽이 비탈길을 만들었다. 길 자체는 크게 가파르진 않아 괜찮았다. 다만 앞서 저 멀리 벽처럼 보이는 산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쪽을 향해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리 절망하지 말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해야 했다. 같은 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그래도 몇 있었다. 스치며 인사를 나눌 때마다, 웃으며 조금 더 힘을 냈다.
9시 50분, 바로 그 먼 산의 벽 앞에 도착했다. 어제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를 어렵게 올라가야 할 줄 알았는데, 돌계단을 나름 잘 깔아 두었다. 가파르긴 했다. 그렇다고 영 못 오를 수준은 아니었다. 쒸익쒸익 신음 소리 같은 숨소리가 절로 났다. 땀인지 침인지 턱 아래로 물방울이 자꾸 떨어져 스스로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안개가 촉감을 가지고 몸을 스쳤다. 절벽을 다 오르고도 오르막이 더 있어 남은 안간힘을 써야 했다. 힘들어도 걸음을 결코 멈추진 않았다. 꾸역꾸역 마저 다 오른 후에야 다리를 쉬고 싶었다. 허벅지가 원망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10시 25분에야 그 끝에 도착했다. 토닥토닥 그제야 가방을 벗고 한 타임을 쉬어간다. 고작 30분도 채 안 되는 그 시간 동안 녹초가 되고 말았다. 물론 쉬고 나면 어느 정도 회복될 수준이었다.
지도를 보니 736m 높이의 싯샌달(Seat Sandal)을 이미 지난 자리였다. 능선표를 따라 약 600m 즈음의 높이까지 오른 듯했다. 돌덩이에 앉아 사과를 먹었다. 한숨 돌리며 뿌연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우르르 트래킹 단체가 나타나더니 굳이 바로 옆에서 휴식을 취한다. 덕분에 편안했던 적막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저것 질문을 해와 정신이 아주 산만했다. 쫓겨나듯 부랴부랴 일어섰다. 도망치듯 걸어가는데, 곧장 또 뒤를 따라와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길을 비켜주었다. 그들이 한참 멀어질 때까지 가만히 서 기다리는 게 차라리 나았다. 서양인들도 똑같다. 누가 됐건 단체가 되면 매우 시끄러워진다.
그즈음, 안개에 가려졌던 그리스데일 호수(Grisedale Tarn)가 눈앞에 갑자기 드러났다. 없던 시야에 너른 풍경이 와락 스몄다. 습하고 신비했다. 미리 꼼꼼히 정보를 알아보지 못해, 호수가 있을 거라 상상치도 못했다. 저기 아래 호숫가에는 비박을 한 친구들도 보였다. 커피라도 끓이려는지 뭔가 옥신각신하는 그 모습이 귀여웠다. 어쩐지 부럽다. 햇살이 쨍했다면 또 달랐을 풍경이었다. 내게는 이렇게 아련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마치 꿈결 같았다.
호수를 지나고 돌산을 넘으며, 안개를 헤치듯 나아갔다. 산과 산 사이의 깊은 골짜기를 빠져나가는 모양새였다. 이 길이 꽤나 길었다. 힘들어서 그런지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반대편에서 올라오시는 분들도 많이 보였다. 어쩌다 만난 산책자 부부에게는 자진해서 사진까지 찍어드렸다. 내일을 날씨가 좋을 거라는 덕담을 사진값을 대신해 받았다. 농담처럼 오가는 그 미소에 힘듦이 살짝은 덜어졌다.
고사리를 헤치며 수풀을 나아간다. 긴긴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시들어 갈색인 잎들이 마치 꽃잎처럼 흔들렸다. 어딜 봐도 양들은 점처럼 있었고, 어디선가 끊임없이 소울음이 들려왔다. 슬슬 배가 고파 간식을 찾았다. 다 녹은 초콜릿과 스낵바로 허기를 달랬다. 물은 되도록 아껴먹어 아직까지 넉넉했다. 습하고 끈적거리지만, 덥지는 않은 날씨였다. 돌밭이라 발바닥이 아프긴 해도 대체로 평지이거나 내리막이었다. 쉬운 길에 땀마저 다 식었다. 다만 안개인지 뭔지 코끝에는 아직 송골송골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12시 45분, 드디어 이 골짜기에서 빠져나간다. 이쯤부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철제 벤치가 있어 조금 쉬었다 간다. 소 농장을 통과한 다음, 다시 오르막이 나와 잠시 또 긴장이 됐다. 산을 넘나 했는데 다행히 중간에서 길이 빠진다. 비탈길을 따라 언덕을 비끼듯 건너간다. 초록 들판을 걷다 보니 어느새 패터데일(Patterdale) 마을이었다. 오후 1시 35분, 오늘 치 CTC 길은 여기서 급작스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갈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숙소인 YHA 헬벨른(Helvellyn) 호스텔까지는 4km 정도를 더 걸어가야 했다. 바로 이곳에 있는 YHA 패터데일 호스텔을 미리 예약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상대적으로 너무 비싸 포기한 패터데일 호텔도 곁을 지나려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빗줄기는 점차 더 거세지고 있었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세리모니도 이런 세리모니가 없었다.
영국 아재 클라이브가 알려주신 지도 어플이 유용하게 쓰이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데도 숙소를 찾아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울스 호수(Ullswater) 가장자리를 따라 그렌리딩(Glenridding) 마을을 지나가는 길이다. 관광지인지 이 마을은 꽤나 번화했다. 5일 만에 처음 만나는 슈퍼도 반가웠다. 일찍 문을 연다면 내일 나오는 길에 들러보기로 하고, 따로 길을 멈추진 않았다. 마을을 지나자 오르막길이었다. 지도상의 고도표로 보자면 300m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야 하는 길이었다. 힘들었지만 부지런히 나아갔다. 얼른 끝내고 쉬고픈 마음이 몸에 힘을 북돋아주고 있었다.
힘이 거의 다 빠져갈 즈음, 저만치 건물이 한 동 보인다. 산세에 둘러싸여 아늑해 보이는 YHA 헬벨른에 드디어 도착을 했다. 2시 30분. 생각보다 빨리 왔다. 역시나 온몸이 너덜너덜했지만, 어제의 그 힘든 산행 덕분인지 상대적으로 이쯤이면 수월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20.9km를 걸었다. 잘했다 잘했어. 고생한 양어깨를 토닥였다. 무릎은 흔들흔들, 어깨는 욱신욱신. 그래도 쉴 생각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체크인은 5시부터. 샤워는 먼저 가능해, 얼른 씻고 빨래부터 했다. 좀 작긴 해도 건조실이 여기에도 있었다. 병맥주를 하나 시킨 후 쾌적한 대기 시간을 보냈다. 핸드폰 신호는 안 잡히는 곳, 느리긴 해도 와이파이가 되긴 된다. 오늘도 저녁은 시켜 먹었다. YHA 호스텔의 공통 메뉴 중 하나인 치즈 버거로 골랐다. 기대치 않았는데 의외로 맛있었다. 바깥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클라이브와 앨런은 좀 전의 그 패터데일 호스텔에서 캠핑을 한댔는데 날씨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작고 외져 보였는데, 쉬다 보니 이 호스텔만의 아늑한 맛이 있었다. 산속에 있는 이런 곳엔 며칠씩 멍하니 묵어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또 '다음에 오면'이란 생각을 하고 만다. 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렇게 된다. 다음을 습관처럼 기대하면 현재에 대한 성심을 놓치고 마는 법. 잊지 말자 '지금'을. 고개를 도리도리 떨쳐냈다. 그러면서도 이곳만의 매력은 머릿속에 저장,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딱히 할 일도 없겠다, 내일의 길을 미리 탐색해 본다. 원래의 코스는 패터데일(Patterdale) 마을에서 샤프(Shap) 마을까지 가는 25.7km의 긴 코스다. 나는 숙소 문제로 인해 중간에 길을 빠져야 했다. 17.5km 즈음의 번뱅크스(Burnbanks)에서 빠져 숙소를 향해 2.4km 정도를 따로 더 걸어가야 된다. 여기 헬벨른에서도 4km를 추가로 걸어 나가야 하니, 길의 길이는 총 23.9km 정도로 결국 만만치 않게 됐다.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의 마지막 산인 567m 앵글탄 봉(Angletarn Pikes)을 넘게 되는 길이다. 하물며 내일을 '기대'까지 해보련다.
벡스로 시작해 코로나로 마무리했다.
역시 걸음에 맥주는 보약이다.
긴장으로 시작해 이완으로 오늘 하루를 마감한다.
2024.09.08.
걷기, CTC 5/17
31.714보(21.3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