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 좋네 황무지

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8일 차

by 달여리


오턴~커비스티븐(≈21.7km)


클라이브에게 밤늦게 답장이 왔다. 그저께 샤프(Shap)에는 7시 넘어 늦게 도착했고, 어제는 커비스티븐(Kirkby Stephen)까지 30km 넘는 거리를 한 번에 걸어갔다는 소식이었다. 다리에 무리가 갔단다. 앨런은 걷기 힘들어해서 결국 중간에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보내준 사진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앞으로 더 힘을 내자는 응원도 곁든 장문의 메일이었다.


어제 길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만났던 노부부가 알고 보니 같은 숙소에 계셨다. 저녁을 먹다가 어찌 말도 섞게 되었다. 존과 사라. 그들은 5년 전에 CTC를 이미 완주했고, 이번엔 커비스티븐까지 반만 걷는다고 하셨다. 내일이면 본인들의 길은 끝난다며 여남은 나의 길에 행운을 빌어주셨다. 매일의 로고를 그리고 있는 내게 오셔서 혹시 책을 쓰냐고도 물어보셨다. 길 위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던 나를 아무래도 유심히 보셨던 게 분명했다. 그냥 일기를 쓸 뿐이라고 대답했지만, 그 순간 CTC에 대한 이 기록을 책으로 엮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디 사냐는 질문에 제주를 소개드렸다. 한국에 대해서는 서울 정도만 겨우 알고 계셨다. 올레길을 꼭 걸어보라고 의례 말씀드렸다. 멋진 제주 풍경을 보여드리며 나름의 유혹도 좀 했다.


조식을 먹으며 반갑게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굿나잇과 굿모닝을 모두 나눈 사이가 됐다. 먼저 출발하는 내게 오늘도 길에서 만나자고 웃으며 악수를 권하셨다. 그의 미소가 참 근사했다. 그녀의 웃음도 우아했다. 저렇게 나이 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처럼, 나도 아내와 이 길을 함께 걷고 싶어졌다. 훗날의 내가 말한다.


"5년 전엔 혼자였고, 지금은 둘이 함께 왔다네..."

240911_A1_001(edit2)(resize).jpg <아침>

아침부터 햇빛이 보인다. 느낌이 좋다. 8시 아침 식사 후 8시 반 출발. 바깥공기는 의외로 차가웠다. 온도를 확인해 보니 7도. 반팔, 반바지에 쿨 토시와 무릎 보호대를 찬 차림이었다. 하늘은 분명 푸른데 길 위로는 그늘이 졌다. 추웠지만 계속 걸었다. 걷다 보면 몸에 열기가 오를 거라 믿었다.


멈췄던 CTC 지점까지 가려면 어제처럼 도로 곁을 걸어야 했다. 차들이 많이 오가던 그 도로를 웬만하면 걷기가 싫었다. 인도가 없어 불편하고 또 위험했다. 지도를 잘 찾아봤다. 다행히 농장을 지나는 다른 샛길이 있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길로 가보기로 했다. 마을 뒷골목으로 빠지자 농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난 좁은 길이 정말로 있었다. 덕분에 멈췄던 위치까지 편하게 올랐다. 다 오르자 9시였다. 여기서부터 CTC가 곧장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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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호텔을 나와 CTC 지점으로 가는 샛길>

손이 시렸다. 거추장스러워 웬만하면 장갑은 끼기가 싫었다. 그래도 걸을만했다. 걸을수록 추위가 조금씩 사그라들긴 했다.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양 옆으로는 목장의 초원이 무심하게 펼쳐져 있었다. 소가 울고 개가 짖었다. 별것 없는 풍경에도 보석처럼 아름다운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낡은 트랙터에 낀 오래된 흙, 더러운 통에 남겨진 기하학적 흔적들, 진흙과 건초 더미, 울타리에 널린 두더지(농사나 목축에 방해가 되는 두더지를 잡아 울타리에 걸어두는 건, 이 지역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는 영국 농업 지역의 오래된 풍습이라고 한다. 동물보호 관점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나 멋쟁이 조랑말의 부드러운 머릿결까지. 빛나는 얼룩무늬 젖소들이 아무렇게나 다가왔다. 양들은 랩을 읊조리듯 연신 입을 멈추지 않았다. 안녕? 햇빛을 잠시 쐬자 조금 따뜻해진다. 하지만 그늘이 내리면 금세 또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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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 사잇길>

목장을 넘나들며 초원을 걸었다. 어딘가 이니셰린의 벤시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잠시 시골길도 거쳤다. 영업을 하지 않는 듯한 농장 카페가 하나 있었고, 꾸웨꾸웨 우는 특이한 새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2시간 동안 6.7km 정도를 걸어왔다. 이만하면 나름 양호하다 생각했다. 시간이 약인지, 무릎은 이제 꽤 쓸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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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과 목장 사이>

초원을 거닐다 어느덧 황무지로 들어선다. 엇비슷한 풍경이 걸을수록 또 미묘하게 달라진다. 풍경에 잠겨 상념에도 절로 잠긴다. 그러다 보니 길을 놓치기 일쑤였다. 힘들긴 힘들었다. 길게 걷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CTC에 온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길 위의 풍경 앞에 선 솔직한 감정이 특히 그랬다. 고되다 투덜거리다가도 피어나는 미소 같은 게 있었다. 모든 고난을 씻고도 남을 장면들이 거기 자주 있었다.


도대체 여길 왜 오고 싶었을까. 물론 그냥 걷고 싶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이런 황량함을 기대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난감함과 두려움을 마주하고도 싶었을 거였다. 하지만 도전의 성격과는 다른 무엇이 분명 있었다. 그게 뭐였더라. 흩뿌려진 바람을 맞고 선 자리, 그러다 번쩍 세 번째 이유가 갑자기 떠올랐다. 바로 '새로운 풍경'에 대한 호기심이다. 이 단순한 걸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위클로웨이와 CTC, 산티아고까지 한 번에 싸잡아 계획해 놓고도 그랬다. '그냥'을 넘어선 '호기심'이 있기에 이런 구체적 계획이 가능했다. 이토록 멋진 풍경을 앞에 두고서야 겨우 기억에서 건져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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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길>

그냥과 자발적 고통, 그리고 새로운 풍경.


불현듯, 삶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어쩌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었다. 살아오며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그랬다. 길 위에 선 스스로가 순간 빛나는 선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다. 약간 울컥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완연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40살 이후의 삶은 단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었다. 미래에 없던 시간이 한꺼번에 쏟아져 한동안 참 버겁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미묘하게 변주하는 뉘앙스가 몸에 녹아들 듯 스며오고 있었다. 감정도 태도도 조금씩 변한다. 걷는 걸음만큼 느껴지는 촉감 같은 게 있었다. 이 시간이 삶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일이 줄었다. 손바닥을 보지 않아도 살아있음을 온전히 자각할 수 있었다.


자꾸 '다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렇다. 하물며 오늘 아침엔 5년 후 아내와 걸을 CTC까지 상상하지 않았던가. 분명 한층 밝아졌다. 몸의 온기도 조금은 따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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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길을 지나며 돌담을 따라>

11시. 고적한 도로를 거쳐 황무지를 건넌다. 어젠 존과 사라가 종종 시야에 보였던 길, 오늘은 철저히 혼자였다. 신비로울 정도로 빛에 따라 풍경이 달라졌다. 햇빛이 따사롭다가도, 구름에 가려지면 순식간에 추위가 몰려왔다. 감각과 시선은 같은 온도로 움직였다. 손은 여전히 시렵지만, 등에선 땀이 났다.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지겹지 않을 것 같은 장소였다. 길을 멈춰 넉넉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근처에 머물며 며칠씩이고 이곳을 찾아오고 싶었다. 황무지, 그만큼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이 있었다. 송충이와 달팽이. 짙은 진흙 더미와 넓적한 똥들. 쉬지 않고 나타나는 양들. 갖가지 풀과 헤더, 그리고 빛과 구름. 눈 쉴 틈이 없었다. 하늘도 시시각각 변했다. 막힌 것 없는 바람은 매서웠다.


표지 없는 갈래길이 자주 나왔다. 일일이 GPS로 방향을 확인하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길이 살짝 빠지더니 웬 농장 간판이 나왔다. 12시. 어디에도 농장은 보이지 않는 그 Larks Meadow Farm 간판 아래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챙겨 온 쿠키를 간식 겸 점심으로 먹었다. 좀 더 쉬고 싶었는데 갑자기 우르르 비가 내렸다. 어쩔 수가 없었다. 우비까지 껴입고 서둘러 출발했다. 여기까지 11km 정도를 걸어왔다. 비가 내리니 더 추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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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우박, 다시 갬>

비는 그리 오래 오지 않았다. 추워서 우비는 한동안 더 입고 걸었다. 질퍽한 목장들을 통과했다. 웅덩이와 진창을 적당히 돌아가며, 길을 천천히 나아갔다. 갑자기 우박까지 내려 깜짝 놀랐다.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는 그 풍경이 너무 묘해, 멍하니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우박은 곧 장대비로 변했다. 장대비는 또다시 햇빛에 밀렸다. 내리막을 내려 계곡의 다리를 건넜다. 건너편 스마데일(Smardale) 언덕을 올랐다. 햇빛을 받은 언덕이 설산처럼 빛났다. 구름이 흐르며 먼 풍경에 그림자를 그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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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데일(Smadale) 언덕>

것 참 변화무쌍한 날씨다. 제주는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다. 분명 햇빛이 쨍쨍 나는데도 여전히 비가 오다 말다 했다. 머리 위엔 분명 구름이 없는데도 그랬다. 비의 연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고민해 봤자 하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쉬지 않고 걷는 수밖에 없었다.


황금빛 초원과 둥근 헤더의 스마데일 언덕을 넘었다. 길은 목장에서 목장으로 이어졌다. 목장을 가로 짓는 기찻길을 통과했다. 푸른 들판을 거쳐 조금씩 마을로 다가간다. 마땅히 쉴 곳이 없어 힘겨워하던 차에 마침 계단처럼 넘어가는 담장이 나왔다. 넘는 김에 계단을 의자 삼았다. 그나마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허리가 너무 아팠다. 오후 3시. 이제 겨우 1.8km 정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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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과 목장, 초원을 가로질러>

농장 건물들을 지나고 몇 개의 들판도 건넜다. 잠긴 문은 넘고 열린 문은 통과했다. 들판 위에 별안간 교복 입은 학생들이 나타났다. 앳된 얼굴들의 인사가 곧 도시에 도착함을 알렸다. 아니나 다를까, Kirkby Stephen Grammar School이 나왔다. 학교 옆 샛길을 지나자 골목, 그 골목을 지나자 바로 커비스티븐이었다. 3시 40분, 오늘의 정착지에 도착했다.


터벅터벅 호스텔을 찾아가는 길, 하루 종일 보지 못한 존과 사라를 여기서 만났다. 그토록 반가워하실 수가 없었다. 덩달아 내 얼굴에도 웃음꽃이 폈다. 남북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너스레까지 떠신다. 하하호호, 쓸데없는 농담들이 즐겁게 오고 갔다. 그들은 여기서 길이 끝났고 나는 아직 한참 남았다. 나이와 국적을 뛰어넘어 우린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두 차례의 대화뿐이었는데 부쩍 친근해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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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을 통과해 서서히 마을로>

5분쯤 걸어 호스텔에 도착했다. 오래된 교회 건물인 듯 근사한 외관이라 놀랐고, 문이 아예 잠겨 있어 당황했다. 우연히 배낭 딜리버리 서비스 직원을 만나 호스텔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다.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익숙한 듯 샤워실과 건조실 위치를 확인한 뒤, 대뜸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짐은 풀지도 못하고 하는 수 없이 공용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뒤이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일이 문을 열어드리며, 아직 직원은 오지 않았다고 설명도 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관 밖에 걸린 봉투에 예약자별 방 번호와 비번이 적힌 쪽지가 있었다. 어쩐지 다들 알아서 방을 잘 찾아가는 것 같더라니. 문도 다 열어주고 친절히 와이파이 비번까지 알려주고 그랬는데, 아무도 그 가장 중요한 사실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뻔히 배낭 채로 공용공간에 있는 걸 봤으면서도 말이다. 결국 여섯 시에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됐다. 하긴 나라도 먼저 물어볼 걸 그랬지. 스스로 못 찾은 게 잘못이지 뭐. 어쩐지 속상했다. 어쭙잖게 기다리느라 그만 팍 지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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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커비스티븐과 호스텔>

저녁으로 라면을 끓어먹었다. 동네 산책 겸 마트에 들러 간식류도 사 왔다. 망설이는 척하다 근처에 보이는 바에도 갔다. 맥주를 추천해 달라니 흔쾌히 시음까지 시켜주셔 그중 제일 괜찮은 걸로 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모이는 곳인지 작은 공간이 금세 가득 찼다. 결국 테이블 합석까지 하게 됐다. 어쩌다 또 말을 섞는다. 희한하게도 그게 대화가 됐다. 난생처음 너 영어 잘한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빵 터져서 혼자 막 웃어댔다. 몇몇 단어만으로도 대화가 된다니, 눈썹을 치키며 서로 신기해했다. 기다리다 지쳤던 마음이 그만 다 풀렸다. "굿바이" 대신 "씨유"로 자리를 마무리했다. 낯선이들와 나눈 그 웃음이 호쾌한 기분으로 남았다. 다시 만난들 기억할 수 있을까. 하긴 순간이기에 소중한 것들도 있다.


저녁이 되자 너무너무 추웠다. 호들갑 떨며 헐레벌떡 숙소로 돌아왔다. 양치하고 얼른 침대로 쏙 들어가야지. 숙소 내부도 다소 추운 편이었다. 이불을 덮으니 그래도 좀 나았다. 한국은 아직도 푹푹 찐다던데, 나만 먼저 추워 왠지 미안했다. 그래, 더운 것보다야 추운 게 낫지.


멍하니 누워 새벽일 한국을 생각했다. 열대야 아래 곤히 자고 있을 아내와 반려묘 호야, 모무를 떠올렸다. 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당장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런 건 또 아니었다. 길은 아직 한참 남았고, 힘듦을 넘어선 즐거움이 분명 있었다. 무려 가장 찬란한 날의 지금 아닌가. 그저 꿈에서라도 만나길 바랐다. 그러니 잠에 빨리 들길 원했다. 코가 시렸다.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당겼다.



2024.09.11.

걷기, CTC 8/17

36,660보(24.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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