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1일 차
그린턴~리치먼드(≈ 17.1km)
이제 막 9월 중순인데도 아침의 공기가 마치 초겨울을 닮았다. 알면서도 아직 반팔과 반바지를 고집하고 있었다. 편하다는 이유, 걷다 보면 곧 더워질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빨랫감을 더 늘리고 싶지 않은 마음도 거기에 한몫을 거들었다. 이만하면 그래도 괜찮았다. 더운 것보다는 추운 게 낫고, 엄지도 다 찢어진 마당에 손빨래는 되도록 적게 하고 싶었다.
일어나자마자 으슬으슬하긴 했다. 날씨도 체크할 겸, 잔뜩 몸을 움츠린 채 바깥으로 나가봤다. 서늘한 공기에 몸이 움찔했다. 순간 잠이 확 다 달아났다. 팔을 비비며 몸의 온도를 높였다. 몸을 좌로우로위로아래로 움직여 부지런히 몸의 근육을 깨워줬다. 흐리고 추웠다. 걷기엔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침 식사 후 출발 준비까지 마쳤다. 어제 못한 후시딘도 듬뿍 발라 반창고로 꽁꽁 싸멨다. 배낭을 메려는 찰나, 갑자기 화재 경보가 울려 모두가 대피했다. 큰 불이라도 났을까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오작동이라 별 탈 없는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다들 트래커들이라 그런지 대피가 일사불란했다. 그 신속한 모습들에 엄지 척, 솔직히 남몰래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늘 길은 짧다. 8시 40분,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했다. 올랐던 언덕을 그대로 다시 내렸다. 어제는 그토록 힘겨웠던 이 길이 내리기엔 더없이 수월했다. 마을과 교회를 지나 그린턴(Grinton)을 빠져나간다. 다리로 강을 건넜다. 9시 10분. 그 다리 아래, 멈췄던 CTC 길 위로 합류했다.
스웨일 강(River Swale)을 따라 산책길을 걷는다. 먼 산에 비친 햇살이 아직 여기까지 닿진 않았다. 몸이 충분히 데워지지 않았다. 아직 추웠다. 목에 칼칼한 느낌도 약간 있었다. 이젠 미련을 버리고 긴 팔과 긴 바지를 입어야 될까. 걷다 보면 분명 땀이 나리라 믿었다. 다만 그게 언제쯤 일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 추운 만큼 오르막을 바라게 되는 난센스였다. 힘든 건 오히려 그다음이다. 바람이 꽤 날카롭다. 햇빛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꽤 크다.
도로를 건너 목장으로 든다. 물끄럼한 소들이 무심히 바라본다. 목장 출구 찾기 미션이 몇 차례 이어졌다. 양떼몰이 군단을 만나 가는 길을 잠시 기다렸다. 농장을 지나 언덕을 올랐다. 6일 차 키드스티 봉(Kidsty Pike) 하산길에서 만났던 호주인 노부부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몸이 불편하신 아내를 참 다정하게 이끌어주시던 남편분이셨다. 뒤 따라가며 한참을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가 두 분의 사진을 부러 찍어드리기도 했었다. 며칠 만에 보는 건데도 서로가 서로를 단박에 기억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웃음꽃이 활짝. 길 위에서의 소소한 만남이 이렇게 또 지속되는 게 참 신기하긴 했다. 아무래도 일정한 루트와 공동의 목적지가 있기 때문일 거다. 단편적이나 단지 일회용은 아니다. 덕분에 길의 온도가 아주 조금은 따뜻해졌다.
어딘가 산속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한 번씩 났다. 사냥일까. 커다란 모터 소리도 자주 들렸다. 오프로드 오토바이가 유난히 이 근방을 많이 지나다녔다. 고요한 풍경에 갖가지 소음이 자꾸만 끼어들었다. 고요한 사이 소란이 잦았다.
전원의 연속이었다. 작은 마을을 지나 다시 목장 초원으로 든다. 낮게 깔린 구름들에 풍경은 실제보다 더 차갑게 보였다. 햇빛이 비쳤다면 한없이 반짝였을 들판이 흐린 만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이것도 뭐 나쁘지는 않았다. 그늘 하나 없이 땡볕이었다면 걷기가 더 힘들었을 게 분명했다. 당장 추워서 문제지, 햇빛은 어제 쬘 만큼 쬐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양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받는다. 어째 콧물이 자꾸만 났다.
더군다나 습했다. 그래서인지 추운데도 뭔가 찝찝한 더위 같은 게 있었다. 낮이라기엔 너무 어둡기도 했다. 비라도 올까 싶었는데 다행인지 내리진 않았다. 목장에서 빠져나와 아스팔트 도로를 걸었다. 길을 따라 내리다 보니 어느새 어느 마을에 도착했다. 표지에 적힌 이 마을의 이름은 마르스케(Marske). 11시 35분, 마침 벤치가 하나 있어 점심도 먹을 겸 쉬어가기로 했다. 벤치에는 “Best Kept Village 1971.”라고 적혀있었다. 쿠키와 초콜릿 그리고 사과로 배를 채웠다. 잠깐 쉬었다고 그새 오들오들 추웠다. 그러니 더 앉아 있으래야 있을 수가 없었다. 고작 10분 만에 다시 길을 걸었다.
도로와 목장을 거쳐 얕은 계곡을 건넜다. 그 계곡을 건넌 나무 다리는 작고 낡았지만, 특별했다. "Paddy’s Bridge"라 이름 붙여진 이 다리는 요크셔 데일스 국립공원 자원봉사자이자 존경받는 리치먼드 주민인 패디 플래밍(Paddy Fleming)을 기리기 위해 2009년에 만들어진 다리라고 한다. 길이가 겨우 4미터 남짓 될까, 다소 엉성한 폼이지만 난간에 붙은 갖가지 사연들이 다리를 더 의미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CTC를 기념하는 개개인의 명패가 다양한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철판에 새겨진 그 이름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곧 길게 오른 풀들이 하늘거리는 들판을 오른다. 언덕을 따르는 자갈길은 구불구불 평탄하게 이어져 있었다. 어쩐 일인지 사위가 조금씩 밝아져갔다. 이쯤부터는 동네 산책자들도 심상치 않게 보이기 시작했다. 할로 헬로, 하와유두잉. 갑자기 인사를 참 많이도 했다. 가볍게 멋 부린 그들과 달리 나만 완전 무장 같은 차림이라, 어쩐지 머쓱하기도 했다.
12시 55분. 나무가 우거진 숲을 통과한다. 오랜만의 깊은 숲 느낌이 좋았다. 어쩜 드디어 햇빛이 내리나 보다. 아롱거리는 볕뉘가 검은 바닥을 아주 화려하게 수놓았다. 오르내리막을 10분 남짓, 숲의 터널을 빠져나오자 길 위는 이미 완연한 햇빛이었다. 날이 갠 건지 아님 날이 좋은 곳으로 온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바람은 여전히 셌다. 다만 빛 덕분에 싱그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쏴아 쏴아 나무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 자꾸만 뒤돌아 보게 됐다. 뭔가가 다가오고 또 떠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국립공원 요크셔데일스(Yorkshire Dales)는 이제 슬슬 끝나가고 있었다. 리치몬드(Richmond) 성곽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스팔드 길을 내린다. 멀리서도 마을이 꽤 커 보였다. 내려가는 도중에는 이 길을 개척한 알프레드 웨인라이트(Alfred Wainwright)의 벤치도 만날 수 있었다. 평범한 길에, 평범한 풍경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식해 찾아보지 않는다면 딱 봐도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특별해 보이진 않지만, 여기엔 그가 리치먼드를 묘사한 문구가 자그마한 명패로 담겨있었다. 그의 CTC 안내서 「A Coast to Coast Walk」에서 발췌된 그 문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이미 작고한 그의 세계로 들어와, 마치 지금의 풍경을 먼 과거처럼 바라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스릴 넘치는 리치먼드의 풍경. 리치먼드는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독특하고 풍부한 과거의 유물이 있는 도시입니다. 오랜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이 도시는 성곽의 흔적과 좁은 골목길, 그리고 웅장한 노르만 양식의 성채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에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스웨일 강 위 높은 절벽 위에 극적으로 우뚝 솟은 성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오랜 세월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입니다.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곳입니다."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실감이 또 한 번 났다. 이정표라는 건 여기가 어딘지 잊지 않도록 자꾸만 되새겨주는 역할을 해준다.
언덕 위에서부터 마을이 이어졌다. 주말을 맞은 한가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나 테니스를 즐기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할머니와는 다정한 눈인사를 교환했다. 언덕을 다 내려오자 마을은 도시의 형태를 띠었다. 알고 보니 리치먼드(Richmond)는 그동안 CTC에서 만났던 것 중 가장 거대한 지역이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답게 거리가 상당히 묵직해 보였다.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이 정신없을 정도로 갑자기 많아졌다. 곧장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1시 40분, 이른 체크인을 하고선 우선 샤워와 빨래,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한참을 쉬다 오후 4시 즈음에서야 동네 산책을 나섰다. 바람막이를 입었는데도 살짝 추울 정도였다. 마침 큰 리들(Lidl) 마트가 있어 먹거리를 좀 살 수 있었다. 근방을 둘러보니 1,071년에 세워졌다는 리치몬드 성(Richmond Castle)을 중심으로 다양한 가게가 원형의 거리를 이루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세세하게 구경은 못했다. 추워서 얼른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걷다 보니 몸이 바들바들 떨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옷을 더 껴입어야 했다. 먼저 이불에 들어 몸부터 녹였다.
긴 바지에 점퍼까지 입었다. 슬리퍼 대신 양말에 등산화를 신었다. 호텔 1층 bar에서 저녁을 먹으려 했는데, 주말이라 이미 주방을 마감했단다. 급하게 마땅한 음식점을 물색해야 했다. 마침 지척에 타이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귀찮았지만 오히려 좋았다랄까. 2층의 아늑한 가게였고, 연인들이 데이트하러 올 법한 은은한 분위기의 장소였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달큰한 분위기로 테이블들이 모두 가득 찼다. 후줄근하게 꼽사리 낀 느낌이라 괜스레 죄송했지만, 그래도 맥주와 함께 기분 좋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직원분들도 모두 친절했다.
오늘은 다소 평이한 길들이었다. 거리가 짧은 데다 오르내리막이 그리 심한 수준도 아니었다. 그런들 똑같이 힘들긴 했다. 누적된 피로와 몸의 통증은 여전했다. 특히 어깨와 등, 허리가 너무 아팠다. 짓눌린 어깨의 상처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허리에도 멍 같은 게 진하게 생겨 있었다. CTC의 두 번째 국립공원인 요크셔데일스(Yorkshire Dales)가 어쩐지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제 마지막 국립공원 노스 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만을 앞두고 있다. CTC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오늘과 달리 내일은 정말 긴 길을 걷게 될 예정이다. 멀리 떨어진 숙소를 잡은 탓이다. 걱정이 된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아닌들 어쩔 거야. 꼭 괜찮아야지. 사실 길게 고민을 할 여력도 없었다. 든든한 배로 눕자마자 잠이 폭력적으로 쏟아졌다.
2024.09.14.
걷기, CTC 11/17
28,837보(19.2km)
*풍성한 한가위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오늘도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추석연휴와 상관없이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