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2일 차
리치먼드~댄비위스크/브롬턴(≈28.5km)
알람에 재깍 일어났다. 우선 빨래부터 확인했다. 공기가 차가워서 그런지 약간 덜 마른 감이 있었다. 웬걸 찾아보니 방에 다리미와 받침대가 있었다. 치익치익- 난데없는 새벽의 다림질로 옷감에 남은 습기를 마저 빼주었다. 뜨근하니 덕분에 방이 조금 따뜻해진 것도 같았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온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쩔 수가 없다. 거의 30km 남짓, 얄짤없이 오늘은 아주 길고 긴 그 거리를 걸어가야만 했다. 혹시 몰라 묵을 숙소에 픽업 문의를 해뒀지만, 역시나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채비를 마쳤다. 모든 짐을 둘러메고 아예 호텔을 나섰다. 체크아웃이라고 해봤자, 텅 빈 Bar 카운터 위에 방 키를 올려놓는 게 다였다. 원래는 이른 조식이 가능하다고 해 잡은 호텔이었다. 그런데 하필 주말이라 9시부터 조식이 가능하다는 게 아닌가. 먼 길을 걸어가야 되니 더 빨리 해줄 수 없는지 사정을 했고, 그 말에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시더니 감사하게도 근처의 다른 숙소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해 주셨다. 그만하면 다행이었다. 안내받은 The Buck Inn으로 향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어서 낯설었다. 쭈뼛쭈뼛 이름과 호텔을 말하니, 친절하게 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평범한 조식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푸짐히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급했다. 거리가 긴 만큼 더 그랬다. 가야 할 길이 무려 28.5km였다. 갈 길이 멀다고 해서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 또 싫었다. 오늘만큼은 걷기에 오롯이 집중해 보기로 했다. 화장실에 들러 양치까지 마쳤다. 8시 반, 굳건한 표정으로 출발했다. The Buck Inn은 바로 CTC 길 위에 있었다. 문을 나서자마자 곧장 길이 시작됐다.
다시 봐도 리치먼드(Richmond)는 마을이 참 이뻤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 싶었다. 전 세계의 모든 '리치먼드'란 지명이 시작된 곳이다. 적어도 이틀은 머물며 찬찬히 구경을 둘러볼만했다. 쉬어갈 겸 여유로운 일정을 잡았어도 좋았을 뻔했다. 그러지 못한 건 그만큼 면밀하게 길을 계획하지 못한 탓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는데, 리치먼드 성 앞에서 호주인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기분 좋은 굿모닝 인사를 나눴다. 딱히 물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오늘 같은 길을 걸어갈 처지인 듯 보였다. 다만 동행보다는 부지런한 집중이 필요했다. 가벼운 목례와 함께 양해를 드리고 서둘러 길을 먼저 나아갔다.
나무 계단을 내려와 스웨일 강(River Swale)을 건넌다. 지나가는 차들의 타이어가 요란했다. 어디선가 주말의 조기 축구 같은 응원의 함성소리가 났고, 양들은 어딜 가나 시야 곳곳에 있었다. 강을 따라 산책길. 인도 없는 2차선 도로도 얼마간 걸어야 했다. 길은 곧 숲으로 빠진다. 흔한 동네 뒷산 느낌의 길이 이어졌다.
주말을 맞아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았다. 모두가 낯선 여행자에게 반갑게 인사를 해 주셨다. 날씨가 흐려도 오늘은 이상하게 춥지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걷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밭과 숲, 들판과 산책길이 뒤죽박죽 이어졌다. 스웨일 강과는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했다. 리치먼드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 추수가 끝난 밀밭과 메마른 검은 콩밭도 지났다.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영국의 시골길이 편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10시 20분. A1 고속도로를 만났다. 고가도로 아래로 고속도로를 통과했다. 어디선가 시큼한 냄새가 났다. 강을 따랐고, 오래된 철골 구조 다리로 그 강을 건넜다. 말 목장과 저수지도 지났다. 나무로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어디선가 차 소리가 많이 났다. 스코튼 호수(Scorton Lakes)를 사이에 둔 길을 이었다. 11시 20분, 볼턴온스웨일(Bolton on Swale) 마을에 도착했다. 벤치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휴식을 쉬어간다. 사과와 쿠키를 간식 겸 점심으로 먹었다.
대충 3시간 만에 12km 정도를 왔다. 시간당 4km. 정말 부지런히도 걸었다. 대체로 평지라 가능한 속도였다. 앞으로도 이 속도를 되도록 유지하고 싶었다. 아무리 늦어도 4시 전에 도착하는 게 목표였다. 정말 걷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정확히 10분만 쉰 후 다시 길을 걸었다. 몸이 아픈 건 그다음이었다.
볼턴온스웨일은 작지만 이쁜 마을이었다. “아유 홀 코스투코스팅?” 지긋하신 할아버지께서 인자한 응원도 해주셨다. 이 사랑스러운 마을과는 금방 헤어졌다. 오래된 건물을 지나고 들판도 건넜다. 목장과 개울 사이의 좁은 길을 걸었다. 밭 가장자리를 따라 길 아닌 길이 계속 이어졌다. 대체로 흙이었고, 대부분 인적은 없었다. 퇴비 시즌인 게 분명했다. 온통 분뇨 냄새가 진동을 했다. 괜히 내 몸에서 나는 것만 같아 찝찝했다. 그만큼 땀을 많이 흘렸다.
12시 즈음부터인가 길은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추수가 끝난 누런 밭과 이제 막 뭔가를 심은 초록 밭이 번갈아 드러났다. 지루하디 지루한 길이 길디 길게 이어졌다. 그렇게 1시간 쯤을 걸었나. 스트리틀람(Streetlam)이란 마을이 나왔다. 19.6km 지점이었다. 정말인지 빠르게 왔다.
목장을 지나 옥수수밭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모터라도 달았는지, 슬슬 발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1시 40분, 댄비위스크(Dnaby Wiske)에 도착했다. 원래라면 종착지였어야 할 곳이다. 역시 숙소를 미리 구하지 못한 나는 브롬텀(Brompton)이란 마을까지 더 걸어가야 했다. CTC 길을 2.5km 더 나아간 지점에서 빠져, 그 마을을 향해 3.3km를 따로 걸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5.8km가 남았다는 뜻이다. 덤도 이렇게 미운 덤이 또 없다.
부러운 눈빛으로 댄비위스크 마을을 훑으며 통과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차 소리. 길은 철로 위를 건너간다. 도로에서 밭으로, 꽃들이 한들한들 인사하고 앙상한 흙들이 풀풀 먼지를 날린다. 올 듯 말듯한 비 대신 햇빛 느낌마저 살짝씩 나기 시작했다. 밭들을 가로지르며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길은 계속 이어졌다.
어랏, 저기 보인다. Oak Tree 자동차 정비소다. 브롬텀(Brompton) 마을로 빠져야 하는 길의 거점으로 미리 점찍어 둔 장소였다. 미리 찾아봤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알아챌 수 있을지 의문이었던 곳이다. 그러니 반가울 수밖에, 브롬텀 마을로는 제대로 빠져나갈 수 있게 됐다. 허허벌판 사이를 걸어오며 길을 놓친 건 아닌지 내내 노심초사했던 터였다. 2시 반, 오늘의 CTC 루트는 여기서 끝이 났다. 이제 길을 꺾어 도로를 따라 내리기만 하면 됐다. 물론 내일 고스란히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CTC를 벗어났다고 생각하자마자, 몸은 참았던 고통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다리부터 비명을 질러댔다. 무릎뿐 아니라 온몸의 근육도 그랬다. 발바닥은 델 것처럼 뜨거웠다. 얼굴이 오만상 찌푸려졌다. 더 이상 못 걷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갑자기 확 피로가 몰려왔다. 지겹디 지겨운 도로 길이었다. 더군다나 인도가 따로 없어 차가 올 때마다 최대한 길가로 피해 멈춰줘야만 했다. 정신을 딴 데로 돌려야 될 정도로 지쳐있었다. 음정도 박자도 없는 노래를 마구 불러댔다. 하루 종일 너무 빨리 걸어온 거다. 게다가 거리마저 유난히 멀었다.
드디어 브롬턴 마을 팻말이 보였다. 철로를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숙소까지는 좀 더 가야 했다. 언제 나오나 나오나 나오나, 휴- 3시 15분께 도착했다. 그래도 목표한 시간보다는 훨씬 일찍 도착했다. 녹초가 된 몸을 질질 끌며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얼른 씻어야 그나마 살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빨래도 하고 머리까지 밀었다. 팬티 차림으로 발라당 침대에 누웠다. 욱신욱신한 몸이 화락화락 녹아내렸다. 30km 가까운 거리를 걸어왔다. 그나마 산을 넘는 길이 아니어서 가능했다. 고난의 행군도 아니고, 다음부턴 절대로 이 정도의 거리를 한 번에 걷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런들 어쩌랴, CTC의 마지막 날도 오늘처럼 길다.(27.8km 예정이다) 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리부터 걱정이 됐다. 이제는 아는 맛이 되어 버렸다.
일요일이라 숙소 식당은 이미 3시에 마감했단다. 그렇다고 저녁을 거를 수도 없었다. 오다가 마을 초입에서 봤던 pub 하나가 떠올랐다. 더 이상 걷고 싶지가 않은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 10분 거리를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기대라곤 1도 없었다. 근데 와~ 정말 싼값에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햄버거 £3, 치킨너겟 £2.5, 칩스 £2 등) 오늘도 역시 맥주를 벌컥벌컥. 이러니 이토록 걸어도 뱃살은 안 빠지나 보다. 그럼 어떡해. 맥주라도 먹어야 겨우 견딜 것 같은데.
흐린 하루가 저물며, 창밖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햇살이 강렬히 비쳤다. 꼭 맥주색 같은 빛깔이었다. 아니 햄버거에 딸려온 감자튀김 색깔에 더 가까웠을까. 너겟이라도 하나 더 시킬까 하다가 그냥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프랜들리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이곳의 바텐더가 마음에 들었다. 마치 익숙한 동네에라도 온 듯한 느낌이었다. 모두가 눈인사를 건넸고, 그러면서도 특별히 귀찮은 말은 걸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편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이패드를 들고 온 김에 할 일들도 했다. 그렇게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이 펍에 머물렀다. 하루를 여기서 모두 마무리 지은 뒤, 숙소에서는 그냥 누워 쉬다 바로 잠들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 오랜만에 달을 봤다. 쌀쌀함에 종종걸음을 치는데, 다리가 마디마디 쑤셔왔다. CTC는 이제 5일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일까, 벌써일까. 힘들긴 해도 지나가는 이 시간이 아쉬웠다. 힘에 겹다지만 지난 길이 무척 그리웠다. 그렇다면 내겐 '아직'보다 '벌써'였다. 모처럼의 달 탓일까, 두 잔의 맥주 탓일까, 아니면 머나먼 피로 탓일까. 이런 감상에 젖는 걸 보니 일찍 잠들긴 아무래도 글렀나 보다. 마무리질 일도 다 했겠다 그래 노래나 실컷 들어야겠다.
2024.09.15.
걷기, CTC 12/17
43,301보(30.4km)
*이제 마지막 하루 남은 연휴, 풍성한 한가위 잘 보내시고 계신가요. 오늘도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된답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추석연휴와 상관없이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