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3일 차
댄비위스크/브롬턴~안클리프숲/YHA오스모덜리(≈20.1km)
밤 사이 기침 때문에 잠을 좀 설쳤다. 분명 감기 기운은 아닌데도 그랬다. 온 근육이 뻐근했다. 특히 허벅지와 등이 아팠다. 붙일 파스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안티푸라민만 덕지덕지 발랐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마그네슘도 한 알 먹었다. 찢어진 엄지에 후시딘을 바르고 반창고를 갈았다. 다행히 옷가지가 다 말랐다. 짐을 챙기고 부산스러운 준비를 마쳤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자 거짓말처럼 기침은 쏙 사라졌다.
펜션처럼 한 동씩 복도를 따라 나란히 세워진 이 숙소에서 나는 유일한 숙박객이었다. 혼자만의 조식을 위해 이른 출근을 한 직원분과는 단둘이 어쩐지 머쓱했다. 코스로 나오는 잉글리시 풀 블랙퍼스트였다. 가게를 통째로 빌린 양 나름의 황송한 대접을 받으니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식사를 꼼꼼히 마치고 개운하게 양치까지 했다.
이제 막 배낭을 메고 출발하려는데, 스피커에서 아델의 「easy on me」 노래가 흘러나왔다. 떼려던 엉덩이가 저절로 의자에 다시 붙었다. 후렴처럼 반복되는 'easy on me, baby'란 구절 때문이었다.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아델의 호소인 걸 잘 알지만, 꼭 직역처럼 '부디 날 쉽게 대해줘'로 들렸다. 마치 길에 대한 내 마음 같았다. 그러니 그 구절엔 주술 같은 힘이 있었다. 밥심(사실은 빵심)에 더한 노래의 마법에 힘입어 든든한 출발이 가능했다. 앞으로도 힘겨울 땐 「easy on me」를 길의 응원곡처럼 듣는 게 좋겠다 싶었다.
8시 40분, 출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지만 공기만은 쌀쌀했다. 바야흐로 월요일.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이 재잘재잘 아주 신났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걷는 엄마아빠들도 많았다. 가지각색의 표정이 있었다. 어제의 적막함은 사라지고 거리엔 활력이 넘쳐흘렀다.
철로를 건너며 마을을 빠져나왔다. 테이프를 돌리듯 어제의 길을 그대로 되감는다. 바닥에 적힌 Slow 글자가 무색하게, 차들은 쌩쌩 무섭게도 오다녔다. 이 지겨운 도로길을 40여 분간 걸었다. 9시 25분, 어제의 분기점 Oak Tree 정비소에 도착했다. 멈췄던 CTC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GPS가 안내하는 방향대로 곧장 나아갔다.
도로를 살짝 걸쳐 숲의 방향으로 들어섰다. 지나야 하는 철제문이 잠겨 있었다. 망설이다 결국 도둑처럼 월담을 했다. 밭과 밭 사잇길이 곧바로 이어졌다. 밀림 같은 숲길도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도로로 나왔다가 밭으로 들어서길 반복했다. 며칠간 만난 비슷비슷한 길이 오늘도 계속 이어졌다. 리스(Reeth)에서부터는 계속 이런 식이었다. 아무래도 요크셔 데일스(Yorkshire Dales)와 노스 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를 연결하기 위한 구간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영국 북부의 시골길을 걷는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걸었다. 다이내믹한 자연 광경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멋진 장관 같은 건 없는, 그야말로 ‘일상의 풍경’이었다.
앙상한 밭들을 통과한다. 역시 분뇨 냄새가 진동을 했다. 퇴비가 숙성이라도 되고 있는 건지 땅에 톡톡톡 소리가 났다. 어느 농장 창고의 울타리를 넘을 땐 쥐 모양의 장식품에서 갑자기 마녀 소리 같은 게 나 기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서야 트래커들을 위해 쉼터로 마련된 곳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기겁한 소리도 장난 내지 익살이었던 거다. 어쩐지 야외에 소파나 냉장고 같은 것도 있더라. 버려진 잡동사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일종의 무인 상점이었던 셈이다. 낮은 수풀을 숙인 채 지나다 나뭇가지에 배낭이 걸려 그만 꽈당 뒤로 넘어지기도 했다. 팔에 자꾸 힘이 빠져 등산스틱을 몇 번이나 놓쳤던 건 부끄러워서 말도 못 하겠다. 확실히 지친 게 분명했다. 알고 보니 다이내믹한 건 풍경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10시 반. 들판의 한가운데서 덩그러니 철길을 만났다. 위험해 보이는데 아무런 시설 없이 표지판 하나만 덜렁 세워져 있었다. Stop-Look-Listen. 알아서 조심해라는 뜻이다. 그래, 일러준 대로 멈춰 서서(Stop) 양쪽을 번갈아 세 번쯤을 본 뒤(Look) 귀를 쫑긋 세운 채(Listen) 재빨리 건넜다. 덕분에(?) 무사히 잘 넘었다. 바로 이어지는 시골길들. 싱그러운 초록과 기다리는 흙빛, 우중충했던 어제의 날씨가 잊힐 만큼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길가의 옥수수밭 수염들이 하늘하늘 하늘을 간질인다. 거대한 트랙터가 흙먼지를 잔뜩 날리며 지나갔다. 콜록, 콜록. 까먹었던 기침이 다시 돋았다.
밭 가운데 선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다. 11시 40분. 모처럼의 그늘 아래서 한 차례 쉬어가기로 했다. 남은 과자부스러기로 점심을 대신했다. 한숨을 돌리며 다리와 어깨도 조금이나마 풀어줬다. 시원한 바람에 상쾌한 풀내음. 꿀 같은 15분간의 휴식이었다. 어영차, 배낭을 다시 멨다. 왜인지 한층 더 무거워져 있었다. 아... 이럴 때야말로 응원곡이 필요해,
부디 이지 온 미 베이베, 베이베.
12시 15분. A19 고속도로에 도달해서는 기겁을 했다. 생짜로 이 도로를 건너가야 한다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왕복 6차로의 이 도로 위로는 많은 차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오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도리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난감해서 한동안 서 있었지만, 결국 어떻게든 건너갈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차의 흐름이 끊기길 끈질기게 기다렸다. 상행선과 하행선, 딱 한 번씩은 기어코 절묘한 타이밍이 찾아왔다. 반반씩 나눠 건넜다. 어찌 됐건 달리기는 필수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도로 횡단이 CTC 루트 중 가장 위험한 구간이라고 했다. 조속한 시일 내 무조건 육교 건설이 필요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보행자는 물론이거니와 운전자에게도 재앙과 같은 일임이 분명하다.
도로를 건너 샛길로 들자, 곧 마을이 시작된다. 잉글비 안클리프(Ingleby Arncliffe)는 아기자기했다. 여기서 호주인 노부부를 또 만났다. 그들은 여기가 오늘의 종착지라 한다. 세인트비스와 로빈후즈베이까지의 거리가 적힌 건물 벽 앞에서 그 다정한 부부의 사진을 흔쾌히 찍어 드렸다. 다시 만나자고 하고 손 흔들며 헤어졌다. 아무래도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마주칠 운명일 듯했다.
근방의 두 마을인 잉글비 안클리프와 잉글비 크로스(Ingleby Cross)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구분이 되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GPS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두 마을을 지나 안클리프 숲(Arncliffe Wood)으로 이미 들어서 있었다. 초입부터 오르막이 시작됐다. 깊은 숲이라고 해서 우거지고 어두울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잘 닦인 임도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바닥은 자갈과 흙을 섞어 걷기 좋게 다져져 있었다. 난데없이 닭이나 다람쥐가 길 위를 가로지르듯 도망을 다녀 지루할 틈이라곤 전혀 없는 길이었다.
오르막은 꽤 지속적이었다. 어느 지점에선가 CTC에서 빠져 호스텔 방향으로 가야 하기에, 연신 길의 갈림길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숲 속의 분기점이라 더더욱 긴장이 됐다. 혹여나 놓쳐서 숲을 늦도록 헤매게 되는 건 아닌지 아무래도 걱정이 됐다. 미리 지도 위를 몇 번씩이고 찾아보고 알아봤더랬다. 그게 도움이 된 게 확실했다. 막상 그 갈림길을 만났을 땐 의외로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1시 15분, 여기서 CTC를 빠져나간다. 오늘의 호스텔 YHA Osmotherley(Cote Ghyll Mill)로 향하는 길이었다. 갈림길의 표지판엔 ‘Cleveland Way Public Footpath’ 방향이라 표기되어 있었다.
길은 잘 빠졌다고 하지만 숙소 위치도 문제긴 했다. 어제 잠들기 전 숙소 위치를 한 번 더 제대로 확인해 보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주 골치 아플 뻔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진즉에 예약은 잘 마쳤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찾아본 구글 주소상에 폐업이라 표기되어 있는 게 아닌가. 막상 와보니 폐업이라고 뜬 그 위치는 정말 폐업한 게 맞았다. 확인해 보니 거기서 좀 더 깊숙이 들어간 위치의 새로운 건물에서 호스텔이 운영되고 있었다. 순간 아찔했다. YHA Osmotherley가 아니라 Cote Ghyll Mill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어서 혼동이 생긴 것이었다. 그걸 어젯밤 자기 전에야 알게 된 거다. 하루 전이라도 알아보길 천만다행이었다. 클라이브와 앨런이 이곳을 예약했다는 이야기만 믿고 그 사이 따로 찾아보지 않은 탓이다. 막상 주소 앞까지 와서 폐업한 건물을 마주했다면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 위치에선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다.
걱정했던 것에 비해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숲과 산속 마을을 지나 30분 남짓, 곧 호스텔에 도착했다. 이제는 보기만 해도 반가운 YHA 간판이다. 아, 그러고 보니 CTC에서의 YHA 호스텔은 여기가 마지막이었다. 5시부터 체크인이어서 건물로 들어가는 비번만 받은 뒤 샤워와 빨래부터 했다. 역시 드라이룸도 있군, 땡큐! 시간을 기다리며 로비에서 쉬었다. 외관도 내부도 근사한 곳이다. 와이파이도 그동안 머문 숙소 중에 제일 잘되는 편이었다. 건물 바로 옆으로 계곡도 흘러 시원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해, 소파에 앉아있자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5시.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체크인을 했다. 5년 전에 CTC를 완주했다는 로스 아저씨와 커비스티븐 호스텔에서 만났던 마크란 친구와 같은 방에 배정이 됐다. 원래 식당을 운영하지만 오늘은 사정이 있어 문을 열지 않는단다. 대신 내일 아침 도시락을 주문할 수 있다고 해 그건 미리 주문을 해뒀다. 저녁은 라면으로 해결했다. 식사 메뉴가 안되면 맥주도 팔지 말지, 희안하게 맥주는 또 판매를 하고 있었다. 그럼 안 마실 수가 없잖아. 역시 이 한 잔으로 오늘의 노곤함을 달랜다.
마크는 내일 블래키리지(Blakey Ridge)의 라이언인(Lion Inn)까지 간다고 한다. 산 넘고 물 건너 30km가 훌쩍 넘는 거리다. 와우, 쌍따봉을 치켜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가능한 체력과 라이언인을 예약한 계획성이 모두 부러웠다. 각자만의 방식이 있듯, 나는 내 여행과 그 시간을 되돌아봤다. 쉬고 싶다와 더 걷고 싶다가 공존하는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일정에 치이는 느낌이 들어 매일이 피로하지만, 밀려나듯 나아가는 재미도 꽤나 쏠쏠한 편이다. 다만, 습관처럼 '다음'을 생각해대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자꾸 되뇌지만 지금이 다음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길의 끝으로 다가갈수록 '다음병'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어쩌면 그건 지쳐가는 몸에 대한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플리즈, 이지 온 미.
머리만 대면 자는 요즘이다. 그것만큼은 단연 최고다. 전에 없던 수면 과정이다. 근심 걱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짓눌리지 않는 탓이다. 그만큼 피로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여행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혹은 긴 걸음이 가진 매력이라 볼 수도 있겠다. 체력이 좋지 않은 내게는 적어도 그렇다. 그러니까 말인데,
‘걷기’는 잠에 좋다.
2024.09.16.
걷기, CTC 13/17
30,578보(20.4km)
*추석 연휴가 끝난 금요일입니다. 다들 무탈하신지요. 바쁘신 와중에도 긴 걸음 이 여정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아주 큰 힘이 된답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