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크) 14일 차
안클리프숲/YHA오스모덜리~클레이뱅크탑(≈19.7km)
YHA 오스모덜리(Osmotherley/Cote Ghyll Mill)는 그간 묵었던 호스텔 중에 단연 최고였다. 호텔 못지않게 쾌적하고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조용하니 여유롭게 보내기에 더없이 좋았다. 규모가 큰 편인데도 외진 위치라 그런지 숙박객이 적었다. 어젯밤이 딱 그랬다. 여기서 묵은 사람이라곤 나와 같은 방을 쓴 루스 아저씨와 마크, 그리고 어느 노부부 한 커플이 다였다. 이 너른 공간을 고작 그 5명이서만 쓴거다.
원래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던 클라이브와 앨런이 보이지 않아 메일을 보내봤지만, 메일함이 꽉 찼다는 이유로 계속 반송되어 왔다. 그간 앞당긴 일정을 봤을 때는 어제가 아니라 그제 여길 묵고 가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들이 커비스티븐까지 한 번에 30km를 걸어간 이후로 딱 하루씩 차이가 나고 있었다.
아침 도시락은 정말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조리도 직접 해야 되는 거라 번거로웠다. 삶은 건 줄 알고 터뜨렸다가 엉망이 된 날계란, 퍽퍽한 빵과 딱딱한 해시브라운, 날 것의 베이컨과 소시지. 반쯤을 남겼다. 큰일이다. 부실하게 먹었으니 걷자마자 금방 배가 고플게 분명했다. 돈은 돈대로 아까웠다. 맛없는 사과주스 팩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마셨다.
노부부는 새벽같이 진작에 떠났다. 먼 길을 나설 마크가 먼저 출발하고, 뒤이어 루스 아저씨가 가셨다. 8시 30분, 호스텔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드라이룸 덕분에 뽀송뽀송 마른 옷들, 시작의 촉감만은 좋았다. 날씨도 파랗고 공기도 상쾌했다. 다만 입에선 입김이 나왔다. 공기가 꽤나 서늘했다.
어제 멈췄던 이정표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늘 그렇지만 같은 거리라도 어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에너지의 차이가 기분의 차이도 만드는 게 분명했다. 길이 끝나갈 무렵과 막 시작될 즈음의 마음가짐은 천지 차이였다. 아직은 가벼운 마음. 식사는 충분치 못했지만 힘이 팔팔 남아돌았다.
8시 55분, CTC 루트에 몸을 올렸다. 안클리프숲(Arncliffe Wood)으로 들어 약간의 오르막을 올랐다. 어제 이미 오를 만큼 다 올랐는지, 남은 높이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돌담을 따라 난 그 길이 끝나자 스카스 우드 무어(Scarth Wood Moor)로 들어서는 문이 나왔다. 바로 여기서부터 노스 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 국립공원이 시작된다.
무어(moor)란 말 그대로 황무지를 뜻한다. 문을 통과했다. 이제 그 황무지로 들어선다. 보라 헤더와 황금빛 들풀이 뒤섞여 멋진 능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잔뜩 엎드린 풍경은 낮았다. 앞으로 가야 할 곳이 훤히 잘도 보였다. 뒤를 돌면 지나온 자리가 선명히 남았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먼발치 앞과 뒤로 모두 있었다. 아직 동쪽을 벗어나지 못한 태양이 가는 방향을 눈부시도록 방해했다. 아쉽게도 스카스 우드 무어를 통과하는 그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사리밭이 나오더니 이내 내리막이 시작됐다. 9시 40분. 좁은 도로를 건너 길은 숲으로 들어섰다. 숲의 기운이 생기롭다. 발에 밟히는 자갈 소리가 신선했다. 다양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산책하듯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배낭의 무게를 의식하지 않았다. 힘겨운 마음을 숲이 도왔다. 아, 이게 바로 피톤치드. 큰 숨을 들이고 내쉬길 반복했다. 휘파람까지 한 번씩 불어 재꼈다. 숲에서 들판으로, 다시 숲으로. 농장 건물을 지나며 아스팔트 길도 잠깐 나왔지만, 대체로 숲길이 이어졌다.
숲의 끝에 돌로 된 계단이 나왔다. 진창 땀을 흘리며 거진 다 올라갔을 즈음, 헉! 가방에 매달아 둔 모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답답해서 잠시 벗어뒀던 게 어디선가 떨어진 게 분명했다. ‘싸구려 모자 하나쯤 잃어버리면 어때’와 ‘없으면 남은 CTC 동안 불편해서 어떡해’ 그 둘 사이를 아주 잠시 고민. 배낭과 등산 스틱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다시 내리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연신 두리번두리번. 뒤이어 오시는 분들이 계셔 한 분씩 여쭤봤다. 그러다 모자를 주워 울타리에 걸어뒀다는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뤼얼리? 오, 땡큐베리머치!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한참이나 뒤에 있었다. 반가움과 허무함이 교차했다. 그러느라 심지어 뛰기까지 했다. 별 것 아닌 모자가 갑자기 아주 소중이가 됐다. 그냥 동네 마트에서 산 거였다. 이제 찍찍이가 다 해져서 버려도 모자랄 모자인데도, 유일한 존재로서 그럴만한 가치가 있게 됐다.
그 와중에 배낭이 없으니 걷기 참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오른 돌계단은 그러니 수월했다. 버려뒀던 배낭과 스틱은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었다. 한 번 벗었더니 메기가 참 싫었다. 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팔짱을 끼고 한동안을 노려봤다. 하지만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망설일수록 나만 시간 손해였다.
고사리 밭을 지난다. 이윽고 황야가 활짝 또 펼쳐졌다. 스카스 우드 무어와 마찬가지로, 황금빛 물결 사이사이 헤더의 보랏빛이 묻어있었다. 라이브 무어(Live Moor)는 눈부셨다. 구불구불 깊게 파인 상처처럼, 풍경 위로 난 길은 느리도록 앞으로 뻗어갔다. 그 위를 기워가듯 사람들이 점점이 걸어가고 있었다. 왼쪽으론 드넓은 전원 풍경이 펼쳐졌다. 능선을 따라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졌다. 넋 놓고 걷다 보니 어느덧 정상이었다. 11시 40분에 도달한 해발고도 408m의 칼턴 뱅크(Carlton Bank)였다.
정상에서도 걸음을 딱히 멈추지 않았다. 곧장 내리막을 이었다. 뒤죽박죽 돌계단에 무릎이 비명을 내질렀다. 쉬엄쉬엄 노력해 봤자 별 수가 없었다. 그 구간이 길지 않았는데 시간은 꽤 오래 걸렸다. 다 내려오기까지 20분이 걸렸다. 내려와서는 오히려 걸음을 멈춰야 했다. 무릎을 잠시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여유롭게 걷는 사람들이 보였다. 공원인지 뭔지 넓은 터에 벤치까지 있었다. 아예 제대로 쉬어가기로 했다. 배낭을 내던지듯 바닥에 벗었다. 날씨가 좋다 해도 너무 뜨거운 게 문제였다. 아침의 입김은 잊은 지 오래, 이미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발바닥이 뜨거워 신발도 벗었다. 부실한 아침 탓에 일찍이 배가 고팠다. 허겁지겁 쿠키와 스낵바로 배를 채웠다. 벌써 녹초인 데다 어깨가 부서질 듯 아팠다. 모자 찾느라 허비한 에너지가 이제와 아까웠다. 그래도 모자가 있어 이 땡볕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었다.
15분간의 휴식 후 다시 출발. 눈앞에 보이는 산을 넘나 했는데 다행히 길은 그 옆의 숲길로 빠진다. 어두운 숲을 통과해 약간의 오르막을 오른 후, 산허리를 잇는 고사리길을 걷는다. 햇빛으로 달아올라 모든 게 뜨거웠다. 땀으로 축축했다. 먼 풍경은 마치 고정된 듯했다. 길을 나아감이 무색하게 눈앞의 장면은 마치 매 한 가지였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지루한 구간이었다. 지친 마음가짐도 그 뉘앙스에 한몫을 거들었다. 그 사이 두 개의 봉우리를 아래로 지났다. 이제 마지막 구간만 남겨둔 듯 했다.
저 멀리 사람들은 산으로 높이 올랐다. 능선을 따라 돌무더기를 넘어가는 작은 사람들이 보였다. 찾아보니 저기 위가 바로 크링글 무어(Cringle Moor)와 웨인스톤즈(The Wainstones)였다. 아, 궁금하긴 한데 힘들었어도 저길 올랐어야 하나 싶었다. GPS가 안내하는 길로만 가다 보니 오르는 길을 아예 찾지도 못했다. GPS를 100% 신뢰하지 말자고 해놓고도, 다른 방도가 없다 보니 결국 또 이렇게 완전히 의지하고야 만다. 직접 가보지 못해 아쉬웠다. 하긴, 오르는 길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솔직히 저리로 갔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덜 힘드니 차라리 이게 낫다고 합리화. 대신 멀리서 보는 풍경도 괜찮았다. 검게 솟은 웨인스톤즈의 단단한 표면이 또렷이 보였다. 들어서면 오히려 숲을 못 보는 법, 저길 올랐으면 몰랐을 경치다.
그늘이 반갑다. 숲을 통과한다. 햇빛이 가려졌다 드러났다. 진창이 자주 있어 잘 피해 걸어야 했다. 숲에서 나오자 내리막이 시작된다. 웨인스톤즈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여기서 합류한다. 마저 내려오니 도로였다. 어랏, 여기가 오늘의 종착지 클레이 뱅크 톱(Clay Bank Top)이었다. 벌써 도착할 리가 없는데 싶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맞는지 물어봤다. 맞았다. 이름이 거창해서 기대했는데 특별할 게 없는 그냥 도로여서 당황했다. 이를테면 '한티재'처럼 그저 넘어가는 고개를 뜻하는 명칭인 듯 보였다. 도로가에 차들이 몇몇 주차되어 있었다. 1시 40분, 덩그러니 오늘치 CTC가 마무리됐다. 이제부턴 숙소를 잘 찾아가야 했다.
숙소인 클레이 뱅크 헛츠(Clay Bank Huts)은 여기서 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길이 어렵진 않았다. 내내 내리막길이라 내일 다시 올라올 길이 벌써부터 걱정은 됐다. 한갓진 도로를 삼십 분가량 걸어가니 넓은 부지의 숙소가 나왔다. 잔디를 깎던 주인장이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어 주었다. pod이라는 나무둥지 형태의 속소로, 화장실과 샤워실은 야외에 따로 있었다. 이런 곳을 어찌 찾았는지 스스로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방을 안내받고 짐을 풀었다. 샤워와 빨래를 하고 나니 어느덧 3시가 넘어간다. (유료인 샤워는 6분 사용에 1파운드 동전 2개를 넣어야 했다. 수건과 바디샴푸는 제공됐다.) 이제 긴 휴식의 시간이 남았다. 여유롭게 커피를 타 마셨다. 기록하며 기억을 되짚었다. 와이파이가 없으니, 남는 시간엔 읽다만 「폭풍의 언덕」이나 좀 읽으면 되겠다. (그것 참 잘 안 읽힌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요크셔 무어(Yorkshire Moor)는 이미 지났지만 그럼 뭐 어때. 아니면 미리 받아 둔 영화 「이니셰린의 벤시」를 다시 봐도 좋을 것도 같고. 어쨌든.
밤에는 별이 많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깊은 밤까지 안 자고 버틸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지만. CTC가 끝나가고 있음이 길 위에서도 느껴진다. 그걸 아는지 오늘따라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도 높았다. 하루의 마무리를 새찬 새소리와 함께 한다. 산속의 밤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상당히 쌀쌀했다. 일찍이 둥지 안으로 들어왔다. 커튼을 친 어둠 너머로 풀벌레 소리가 가득히 들려왔다. 일단은 침대에 누웠다. 고요하니,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2024.09.17.
걷기, CTC 14/17
34,616보(22.7km)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