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5일 차
클레이뱅크탑~블래키리지(≈17.2km)
역시 「폭풍의 언덕」은 좀 읽다 접고(결국 포기다.), 「이니셰린의 벤시」를 다시 봤다. 뒤이은 일정을 다 접어버리고 다시 아일랜드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쓸쓸함이었다. 밤이 깊자 큰 보름달이 떴다. 그래, 여기도 추석은 추석이구나. 여명처럼 남은 일몰의 잔상이 오래도록 아련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일찍 잠에 들었다. 그리고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미리 주문한 아침 식사와 점심 도시락은 7시에 재깍 배달됐다. 라탄바구니에 정성스레 먹을거리가 담겨왔다. 어떻게 먹으라는 건지, 생 파인애플까지 있어 당황스러웠다. 나머지는 팬케이크와 바나나, 오렌지주스와 빵, 잼 등이었다. 딱히 맛이랄 건 없었다. 물을 끓여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몰랐는데, 하틀리산의 늪지대를 함께 건넜던 로라도 바로 옆 pod에 묵고 있었다. 반가운 인사와 각자의 준비. 아침은 짧게 지나갔다.
8시 반, 길을 출발했다. 곧 갤 것 같은 얇은 구름이 오로라처럼 하늘 위로 넓게 퍼져 있었다. 한 땀 한 땀 오르막을 올라 CTC 지점으로 향해 걸어갔다. 어제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걸을만했다. 9시 5분, 클레이 뱅크 톱에 도착했다. CTC 길이 곧장 시작됐다.
이미 한참을 올라왔는데, 여전히 오르막은 그치지 않는다. 우라 무어(Urra Moor)로 가는 길이었다. 초장부터 맞는 이 고비가 454m의 라운드 힐(Round Hill), 바로 노스 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의 최고봉이다. 강아지들을 이끄는 양치기가 보였다. 뒤따라오는 트래커들도 몇 있었다. 파란색 슈트의 흰 수염 할아버지께서는 지나가시며 힘찬 응원을 해주셨다. 여기만 오르면 길이 쉬워질 거라 하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다. 찌푸렸던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완연한 빛이 온몸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바이, 바이. 할아버지께서는 아예 다른 길로 가신다. 나는 CTC 방향대로 길을 걸어 나갔다. 20분쯤 가파르게 오르자 넓고 긴 무어지대가 시작된다. 오르막이 남았지만 더 이상 가파른 길은 아니었다. 헤더는 언제 봐도 좋았다. 가까이 보면 참 예쁜데, 멀리서 보면 한없이 우중충하다. 들여다볼수록 만날 수 있는 진면목이었다. 우울함을 굳이 감추지 않는 그 당당함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아뵤 아뵤, 꿩들이 수풀 사이를 연신 뛰어올랐다. 화들짝 놀라다가도 그 경박한 울음소리에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 풀 뜯는 양들의 입매무새를 따라 하며 수차례 눈을 맞췄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쉴 새 없이 흐르는 콧물이 무진장 귀찮았다.
모래과 자갈이 번갈았다. 길은 황야의 가운데로 길게 길게 이어졌다. 10시 반, 블로워스 크로싱(Bloworth Crossing)을 지났다. 평원 위를 가로지른 옛 철길과 만난다는 곳이었다. 명패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을 뿐, 겨우 흙길 사거리 정도 느낌이었다. 19세기에 활발했던 철광석 운반 철도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라고 적혀 있었다. 지금은 겨우 철도 침목 자리(rail bed) 정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영광은 황량한 풍경 아래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곳은 클레이 뱅크 톱 이후로 본격적인 황야 구간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트래커들에게만큼은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됐다.
우라 무어를 넘어 판데일 무어(Farndale Moor)로 나아간다. 사실 딱히 경계나 변화가 없어 무어 간의 구분이 모호하긴 했다. 헤더와 들판을 정말 실컷 본다. 황무지라 해서 쓸쓸함을 기대했는데, 외려 다정함을 느낀다. 각각의 분홍 보라 꽃이 멀리서 보면 죄다 갈색 얼룩 같다. 들여다보면 개중에도 다양한 뉘앙스들이 있다. 감춰지나 그 안에 보석 같은 반짝임이 있다. 가려지나 완전히 숨겨지지는 않는다. 잘 보이지 않지 않을 뿐,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11시 35분, 길 한가운데서 무턱대고 쉬어간다. 발바닥이 심하게 아팠다. 땅바닥에 그대로 내팽개치듯 널브러져 누웠다. 누운 채로 사과와 초콜릿을 먹었다. 반복된 풍경에 갇힌 듯, 마음도 설풋 지친 것도 같았다. 길다 길어 무어(moor). 하지만 언제 또 만나겠어 이런 무어. 뭐? 무어. 아, 정신마저 혼미해져 버렸다.
15분간의 휴식 후 다시 걸어 나갔다. 바닥만 보며 걷다 문득 고개를 들면, 여전히 ‘여기’였다. 힘든 구간은 아니었지만 몸이 힘들었다. 햇살에 비해선 의외로 덥지는 않은 날씨였다. 긴 코너를 돌자 저기 멀리 라이언인(Lion Inn)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구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아직 거리가 꽤 남았다. 도무지 풍경이 줄지 않았다. 먼 황야는 아주 느리게 느리게 움직였다.
12시 40분, 드디어 라이언인에 도착했다. 오늘의 길은 예상보다 일찍 끝이 났다. 호주인 노부부를 여기서 또 만났다. 아예 테이블에 합석해 이야기까지 나눴다. 통성명도 했다. 그 이름하야 마누스(manus)와 마허(maher) 부부였다. 그들은 이미 로라에게서 들어 내가 '킴'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긴 여행을 보내준 아내에 대해 먼저 칭찬하신다. 이런저런 대화로 과할 만큼 화기애애해졌다. 기억해 보니 먼발치에서 찍은 그들의 사진이 있었다. 에어드랍으로 썸네일을 보내드렸다. 해맑도록 즐거워하셔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랐다. 식사까지 사주시려고 해 극구 사양했다. 나 보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또 한 번 빵 터졌다. 오히려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라 미안하다시는 그들이 왠지 멋져 보였다. 따뜻한 햇살을 쬐며 마시는 맥주가 충분했다. 그 기분에 결국 한 잔을 더 마셨다.
뒤늦게 도착한 로라가 인사를 건네왔다. 약 올리듯 한다는 말이, 그녀는 여기서 묵는단다. 알고 보니 마누스(manus)와 마허(maher)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예약하지 못한 나만 아주 쓸쓸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먼 곳에 위치한 농장 민박을 예약했고, 비용을 지불하기로 하고 미리 픽업을 요청해 두었었다. 그 3시 픽업을 기다리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양한 객들이 오고 가는 걸 그저 물끄러미 구경했다. 마치 트래커들의 성지 같았다. CTC 길 위에 언제 이렇게 사람이 많았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이 황야에 건물이라곤 여기 딱 하나였다. 그 오래된 역사가 짐작이 간다. 정말 '다음'이란 게 있다면 여기엔 꼭 묵어야겠다. 그러려면 적어도 1년 전에는 예약을 해야 한다.
농장 민박의 주인장은 딱 3시 정각 약속한 시간에 오셨다. 본인을 크리스라고 소개하셨다. 덜컹거리며 숙소로 나아가는 그 길이 아름다웠다. 로드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한껏 그 멋을 부렸다. 크리스 아저씨께서 말씀하시길 최근 겨울에는 눈이 상당히 많이 왔다고 한다. 그럴 때면 트래커들의 발이 묶여 라이언인에서 며칠씩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괜한 상상이 됐다. 낭만도 그런 낭만이 없었다. 경험하지도 못했으면서 그리운 감정을 느꼈다. 아, 또또또 '다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말았다.
중간중간 총포를 든 사냥꾼들이 보였다. 메아리처럼 총성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농장은 차로 넉넉히 30분은 타고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처음 이곳을 예약할 땐 걸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했었는데, 막상 와보니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돈이 꽤 들긴 해도 픽업/드랍 요청을 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계획을 미리미리 잘 세우지 못하면 이렇게 돈이 들거나 또는 몸이 고생한다. 어쨌거나 라이언인은 두고두고 아쉬웠다.
커다란 농장 집 이층에 마련된 도미토리 방은 나름 쾌적했다. 이불 사용은 유료라고 해서, 순례길용으로 준비해 둔 침낭을 처음으로 개시했다. 개운하게 씻고선 게스트용 거실 소파에 누웠다. 나른한 늦오후의 시간을 그렇게 느긋이 보냈다. 아주 조용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잠깐씩 졸다 깨다 하며 약간의 행복감마저 느꼈다. 숙박객이라곤 오로지 나 혼자뿐이었다. 이 너른 공간이 오직 혼자만의 차지였다.
함께 먹는 저녁 식사도 근사했다. 주인장 부부와 그 손주들이었다. 하물며 메뉴가 카레다. 흰쌀밥에 난까지 곁들인 만찬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어제 클라이브와 앨런이 여기서 묵었고, 심지어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지리나 K-pop 등 궁금한 게 많으셨다. 반려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대화는 넷플리스로 넘어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대한 내용까지로 이어졌다. 못난 내 영어실력이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테이블이 담백했다. 친밀감과 거리감이 적당히 균형을 잡았다.
식사 후엔 조용히 뒷마당으로 나가 홍차를 한 잔 마셨다. 시골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미 주홍빛 일몰이 내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의 삶은 어떨까. 각자의 애환이 모두 다를진대, 불현듯 부러운 마음이 일었다. 쓸데없었다. 그건 일상의 아름다움을 곧잘 망각하고 마는 순간적 습성이었다. 지금은 지금대로 좋다. 잠시 여행을 떠나왔다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의 현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현재를 만끽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접고 그냥 하늘을 바라봤다.
아, 이제 CTC도 2일밖에 남지 않았다. 어쩐지 긴가민가하는 기분이 든다. 몸은 이제 그만 걷자고 하는데 마음은 천년만년 더 걷고 싶단다. 아닌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무래도 아쉬움이 크다. 말끔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결국 아내에게 입 밖으로 말하고 말았다. 우리 5년 후에 여기에 같이 오자고. 오턴의 조지호텔에서 피어났던 상념이 어느덧 꿈처럼 커져 있었다. 약속 아닌 약속이었다. 5년 후의 일정이 벌써부터 머릿속에 대충 그려져 있었다.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다. 당장은 50km 남짓 떨어진 영국의 동쪽 끝 바다를 먼저 꿈꿨다. 미래야 어찌 됐건, 지금이 더 중요했다. 더는 후회가 남지 않을 내일과 모레를 기대하는 게 나았다. 잘 자자. 그리고 내일 또 보자.
2024.09.18.
걷기, CTC 15/17
27,014보(18.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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