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7일 차/끝
그로스몬트/에스크데일사이드~로빈후즈베이(≈27.8km)
CTC 마지막 날이다. 5시 반 알람에 일찌감치 일어났다. 히터를 세게 틀어놨더니 뜨끈뜨끈 더울 정도로 따뜻했다. 눅눅할까 걱정했는데 덕분에 빨래들이 다 말라서 다행이었다. 떠벌려 놓은 짐들부터 챙겼다. 아침으론 감자면을 뽀글이로 끓여 먹었다. 부슬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었다. 바깥은 습한 공기로 가득했다.
6시 50분, 숙소를 나섰다. 흩날리던 비가 서서히 그치는 듯했다. 바닥이 축축이 젖어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머금은 땅은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길을 향해 걸어갔다. 7시 25분, 어제 멈춘 이정표까지 되돌아왔다. 이제 CTC 길을 오른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25km가 시작된다.
여태 오르막을 왔는데, 다시 또 오르막이었다. 스읍, 훗훗. 단단한 마음을 불러줄 긴 들숨이 필요했다. 도로를 따라 올랐다. 가파른 데다 길었다. 초장부터 땀을 쏙 뺐다. 안개가 짙어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차 소리가 나면 가장자리로 길을 멈춰줘야 했다. 시야가 흐린 이런 날엔 도보여행자에게도 운전자에게도 위험한 길이었다. 양들은 괜찮을까. 안 그래도 어제 안개길에서 사고가 난 양을 보았다.
8시 5분, 도로를 벗어나 무어지대로 들어선다. 슬레이츠 무어(Sleights Moor)다. 얼굴 없이 양 울음소리만 들렸다. 보이진 않는데 차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전체를 볼 시야가 허락되지 않았다. 발끝의 부분만을 디디며 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길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갈래길 하나 없이 한 방향으로만 주욱 이어져 있었다.
꽤 많은 차들이 오가는 이 차선 도로로 나왔다. 시끄러운 10분 남짓, 다시 황야로 든다. 얼마 후엔 자갈길, 이내 다시 포장길이었다. 초반에 힘들여 올랐던 만큼 다시 다 내려갈 기세로 내리막이 계속 이어졌다. 그 내리막의 끝엔 리틀백(Little Beck)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9시. 숲으로 들어가기 전 벤치가 있어 딱 5분간만 쉬어간다.
리틀백 숲(Little Beck Wood)으로 들어선다. 오래된 흙냄새가 확 밀려왔다. 계단과 데크, 다리를 지나고, 폴링포스(Falling Foss) 폭포도 지난다. 이게 또 은근 오르막이라 힘들었다. 숲에서 나와선 도로를 따라 얼마간 걸었다. 시골과 황무지, 도로를 번갈아 걸어가는 아주 긴 길이었다. 안개는 사라질 듯 말 듯, 내내 길의 분위기를 지배했다. 정말 습했다. 질릴 정도로 찐득했다.
마지막 무어지대를 완전히 빠져나와 도로로 다시 나왔을 땐 이미 11시 반이었다. 쉴 때가 되었는데 쉴만한 곳이 마땅치 않았다. 터벅터벅 더 더 걸어갔다. 호스커(Hawsker) 마을까지 와서야 드디어 벤치를 만날 수 있었다. 12시. 말 그대로 널브러지듯 쉬었다. 왜 이리 지치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벌써 5시간 넘게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이 어느덧 20km를 왔다. CTC는 단 7km 남짓만을 앞두고 있었다.
20분이면 충분히 쉬었다. 어영차, 배낭을 메고 다시 걸어 나갔다. 굽이진 길을 따랐다. 오르막을 올라 Northcliffe&Seaview 캠핑장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안개가 더 심해지더니, 입김처럼 길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온몸을 휘감고 지난다. 알갱이 같은 그것이 눈앞으로 또렷이 흘렀다.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거라곤 안개 밖에 없었다. 줄줄이 선 컨테이너 캠핑장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사이를 통과해 흙길을 밟았다. 내리막으로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희미하게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 저 끝자락으로 살짝 보였다.
바다다. 영국의 동쪽 끝 바다.
12시 35분, 불현듯 절벽을 만났다. 안개는 감춰진 장면을 극적으로 드러내어 주었다. 해안 따라 절벽 따라, 길을 따랐다. 왼쪽엔 바다가, 오른쪽엔 들판이 있었다. 파도 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음소거에 가까울만치 소리는 안개에 흡수되고 있었다.
바다를 만나자마자 힘이 쏙 빠져버리고 말았는지, 점점 더 걷기가 힘겨워졌다. 터덜터덜 겨우 걸어 나갔다. 오르고 내리고, 바다를 보고 들판을 봤다. 살짝씩 비까지 섞여 내렸다. 산책 삼아 절벽길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뭔가가 북적이고 있었다. 끝으로 향해가는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다.
1시 45분, 절벽의 산책길에서 빠져나오자 로빈후즈베이(Robin Hood’s Bay) 마을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건물들을 지나 해변을 향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비밀스러운 골목골목을 굽이굽이 통과하자, 갑자기 짠하는 느낌으로 CTC 종점이 나왔다. 벽에 붙은 작은 안내판이 다여서, 그 별것 없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The end of the Coast to Coast Walk”
오후 2시 5분. 315km CTC가 여기서 모두 끝이 났다.
바닷가로 내려가 썰물로 한참 밀려난 바다를 바라봤다. 특별한 감정 없이 의외로 덤덤했다. 어안이 벙벙했고, 조금 믿기지 않기도 했다. 이 땅의 서쪽 끝에서부터 여기 동쪽 끝까지 온전히 걸어서 왔다. 사실 바다란 다 거기서 거기라, 이 바다 자체에 부러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돌아온 시간들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건 길을 걸었던 기억뿐만이 아니라, 길을 걷기 전 기억들도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이전과 이후 사이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도 약간의 뿌듯함이 있었다.
끝났다.
라는 담백한 그 마음이 좋았다.
하물며 '끝'인데, 종점 바로 옆 베이호텔(The bay Hotel)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지 않을 재간은 없었다. 바다와 명패를 바라보며 근사하게 한 잔을 들이켰다. 곳곳에서 축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슬슬 스카버러(Scarborough)로 떠날 차례였다. 이틀을 머물며 이 길을 마무리 지을 작정이다. 내렸던 길을 올라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마을의 상점마다 관광객들이 북적였다. 갑자기 추워져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들바들 떨었다. 참았던 피로에 스카버러로 가는 동안 연신 고개를 열어젖혔다. 결국 한 정거장을 놓쳐서 내렸다. 쓸데없는 10분을 더 걸어 숙소에 도착하니, 세상만사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내려놓은 배낭의 무게만큼 마음이 홀가분했다. 일단은 몸에 가득한 구정물부터 깨끗하게 씻어냈다.
입었던 옷에 더해, 모자, 등산스틱, 스패츠까지 다 빨았다. 방은 다소 음침했지만, 넓은 개인 화장실에 근사한 욕조까지 있어 개인 정비하기엔 나쁘지 않았다. 침대에 발라당 누워 두 팔 벌려 흥얼댔다. 이제 뭘 할까 고민해 봤지만, 말해 뭐 해 고민조차 지금은 사치였다. 저녁은 근처 식당에서 스테이크와 맥주로 느긋하게 해결했다. 어느덧 거리엔 어둠이 내려 있었다. 작은 슈퍼에 들러 간식거리랑 음료를 사 왔다.
오늘 밤은 무조건 빈둥거릴 테다. 가능하다면 내일 늦잠도 맘껏 잘 거다. 소회는 나중에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는 걸로. 오늘 CTC를 완주했다. 고생했다, 그래
그만하면 잘했다.
2024.09.20.
걷기, CTC 17/17
&이동 to 스카버러
44,505보(29.4km)
*이 여정을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이 마음에 닿았다면, 구독과 라이킷으로 따뜻한 발자국을 남겨 주세요. 큰 힘이 됩니다. 작가나 브런치북을 구독하시면 새 글 소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비수기 2편-영국 CTC」는 평일 오전 8시마다 업로드됩니다. 앞으로 '부록'까지 포함해 3회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