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영국 CTC(코스트 투 코스트) 16일 차
블래키리지~그로스몬트/에스크데일사이드(≈24.7km)
역시 일찍이 잠에서 깼다. 나설 채비를 다 마친 뒤, 7시 반으로 약속한 아침 식사 시간을 조신히 기다렸다. 굿모닝, 반갑고도 어색한 인사. 푸짐하게 차려진 영국식 가정식 백반(?)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멀찌감치 앉은 손주들이 재잘재잘 쑥스럼의 대화를 잘도 걸어왔다. 아침이라 그런지 주인장의 딸과 그 사위까지 만나게 된, 아주 북적이는 테이블이었다.
출발하며 현관에서 정산을 마쳤다. 서로의 행운을 비는 악수를 떠나, 크리스 아저씨의 차를 타고 오늘의 출발점으로 향했다. 정확히 30분이 걸려 도착한 라이언인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다. 적막 속에 따스한 빛이 그 내부로부터 나직이 새어 나왔다. 저기에 마누스·마허 부부 그리고 로라가 있겠군. 아침 식사를 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이미 떠났을까. 돌아가는 크리스 아저씨께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라이언인에 대한 미련은 접어둔 채 8시 35분 CTC 길을 곧장 나아가기 시작했다.
온통 짙은 안개였다. 희미한 빛까지 스며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다. 햇살이었던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었다. 많은 것들이 가려져 있었다. 그 은밀한 속내를 파고들듯, 길을 헤쳐 나아갔다. 구불진 도로를 따라 한동안 걸었다. 이따금 차들이 지나다녔지만 통행량 자체가 그리 많진 않았다. 풍경을 눈에 담느라 몇 번씩 뒤를 돌아봤다. 안개가 흐르며 만들어내는 빛의 굴곡이 돌아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뒤돌리는 순간, 뭔가가 꽈당하며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으악! 카메라였다. 선뜻 인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러웠지만, 저기 바닥에 떨어진 건 카메라가 분명했다. 어깨 고정 장치에 제대로 결속되지 않았던 건지 그대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바로 줍지 못할 정도로 당황했다. 그때 차라도 지나갔더라면 어땠을지, 돌이켜 생각하니 아찔하기만 하다. 후드가 완전히 박살 났지만 다행인지 카메라와 렌즈는 괜찮았다. 조금 찍히고 긁힌 게 다인 듯했다. 몇 가지 작동 테스트를 해봐도 당장 사용하는 데 있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심란했다. 더 크게 사고가 나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했지만, 마음이란 게 또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며 겨우 걸어 나갔다. 박살 난 후드를 만지작만지작, 그래봤자 원래대로 돌아올 턱이 없었다. 기분 탓인지 초점도 시원찮은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은 계속 앞으로 이어졌다.
9시 10분, 도로에서 빠져 무어로 들었다. 굽이치는 도로 사이를 무어지대로 질러가는 길이었다. 안개가 깊어 시야가 얕았다. 미지의 장소를 은밀히 탐험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들판과 도로를 반복해 거치면서 동쪽으로 더 동쪽으로 나아갔다. 칼바람이 불어왔다. 습기 때문에 공기가 끈적했다.
10시, 모래자갈길로 들어선다. 여기부터 글래스데일 무어(Graisdale Moor)가 시작된다. 길 양쪽으론 헤더와 풀떼기가 널따랗게 흐르고 있었다. 아뵤아뵤 꿩들이 솟아 날았다. 양들은 내 맘도 모르고 자꾸만 멀리멀리 도망을 갔다. 능선을 따라 넘어가는 이 길이 한눈에도 상당히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저 아래의 마을과 곁으로 흐르는 언덕, 들판 곳곳에 내린 햇빛의 얼룩이 모두 아름다웠다.
이제 파란 하늘도 은근슬쩍 보이기 시작했다. 기나긴 이 무어 지대가 서서히 밝아지며, 점차 환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게도 조금씩 햇빛의 얼룩이 묻어났다. 끈적임이 줄어들자 대신해 따스함이 스며들어왔다. 걷는 감각에 집중을 하자, 카메라 사고에 대한 미련도 조금씩 떨쳐낼 수 있었다.
자갈길과 도로, 다시 자갈길. 아련함과는 또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무어에는 마지막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길이 아쉬워 자꾸만 발길이 멈춰졌다. 사실 뒤꿈치가 아파, 걷다 말다 자주 한 거긴 했다. 꿈결 같은 길의 언덕을 지나 쭉 뻗은 내리막길이었다. 한참을 걸었다. 그 길의 끝, 저기 앞 농장 문이 보였다. 저 문을 나서면 이제 무어와는 완전히 헤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지기처럼 선 양들이 빼꼼 날 쳐다본다. 굳이 손바닥을 활짝 펼쳐 녀석들에게 마지막 같은 인사를 건넸다. 쾅. 문을 닫자 하나의 광경이 막을 내린다. 화면이 전환되듯 농장 건물과 마을의 집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론 내일도 무어 지대를 지나간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블래키리지(Blakey Ridge) 이 일대엔 특별한 무엇이 있었다. 가히 CTC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했다. 마지막 국립공원 노스 요크 무어스(North York Moors)의 백미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황야와 그 사이로 무심히 난 길, 산의 어깨를 타고 흐르는 능선과 오므린 듯 주름 난 골짜기들. 아스라한 뭉그러짐이 눈부셨다가 흐릿해진다. 멈춰있으나 끊임없이 한들댄다. CTC를 상상했을 때 떠올렸던 이미지가 바로 여기에 다 있었다. 문이 닫히며 '쾅', 그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스데일(Graisdale) 마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보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12시 5분. 쉴 때가 되기도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신발도 벗고 무릎 보호대도 다 벗었다. 쿠키와 초콜릿을 먹었다. 아침에 챙겨 주신 사과도 베어 물었다. 바로 코앞에 슈퍼가 있었다. 시원한 음료수라도 사 먹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마저도 귀찮았다. 딱 20분만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낭이 천근만근, 등이 아프다.
마을 길을 따르다 안클리프 암스 카페(Arncliffe Arms Cafe) 옆 샛길로 빠져 숲으로 들었다. ‘Esk Valley Walk’라고 표기된 길을 따라 걸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는 구간이라 힘이 들었다. 땀이 많이 났다. 1시 조금 지나 그 숲에서 나왔다. 차가 거의 지나가지 않는 도로를 얼마간 걸었다. 어느새 햇빛은 사라지고 날씨는 완전히 흐려졌다. 상당히 습해 기분이 나쁠 정도였다. 외진 어느 호텔을 지나 애그턴 다리(Egton Bridge)를 건넜다. 오늘의 종착지 그로스몬트(Grosmont)까지는 3.7km 정도 남았다.
아무 풍경도 없는 자갈길을 한참이나 걸었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자꾸만 다운이 됐다. 날씨 때문일까, 피로 때문일까, 이 무료한 길 때문일까. 아니면 끝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철로 밑을 지나고, 도로로 올라 다리 위도 지난다. 그러고 나니 그로스몬트 마을 간판이 보였다. 1시 55분, 그로스몬트에 도착했다. 역에는 증기열차가 허연 연기를 한창 뿜어대고 있었다. 무슨 사진촬영이라도 있는 건지, 열차 앞에 앉은 모델이 한껏 멋을 부리고 있었다.
마을은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오르막이었다. 심지어 갈수록 더 가팔라졌다. 숙소로 가기 위해선 CTC 길을 조금 더 이어나가야 했다. 헉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었다. 2시 10분께 갈림길이 나왔다. CTC는 여기서 잠시 멈춰둔다. 숙소는 길에서 빠져 3km 정도를 더 가야하는 위치에 있었다.
에스크데일사이드(Eskdaleside)의 숙소까지 가는 길은 길고 지루했다. 굴곡진 도로길을 끊임없이 오르내리다 보니, 탈진할 정도로 힘이 많이 들었다. 저만치 아래로는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군데군데 농장들이 있었고, 젖소와 양들을 드문드문 만났다. 마을이 있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가는 차조차 한 대를 보지 못했다.
3시가 거의 다 돼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이틀 전과 비슷한 Pod 형태의 방이었다. 그때보다 훨씬 싼 값인데도 화장실이 방 안에 있어 더 좋았다. 대신 도시락 서비스 같은 건 없었다. 조리할만한 도구나 식기는 물론 침구까지 없어 불편한 구석들은 있었다. 그나마 커피포트는 있었다. 구색에 비해 나름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는 듯했다. 공용 샤워실에 따뜻한 물도 아주 잘 나왔다.
가지고 다니던 인스턴트 오트밀 통을 비우고, 그 통을 컵 삼아 커피를 타먹었다. 짜파게티를 뽀글이로 끓여 저녁으로 먹었다. 이제 내일이면 길이 끝난다. 당분간 먹거리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위클로웨이에서부터 들고 다니던 (맛없는) 쿠키는 이제 버릴 때가 됐다. 더블린에서부터 챙겨 온 라면도 이제 거진 다 먹어간다.
추울까 걱정했는데 작은 히터가 있어 덕분에 썩 따뜻했다. 침낭을 꺼내 깔았다. 베개는 옷가지로 대신했다. 나뭇가지에 널어둔 빨랫감을 모두 방 안으로 옮겼다. 아팠던 뒤꿈치를 보니 작은 물집이 생겨 있었다. 막바지에서야 생긴 물집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뭐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터뜨릴까 말까 하다가 일단 그냥 두기로 했다.
CTC 길 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의외로 특별한 감상에 젖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내일은 꽤 긴 거리를 걷는 데다, 다 걷고 나서는 스카버러(Scarborough)까지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를 이동해야 했다. 알람을 일찍 맞춰뒀다. 조식이 따로 없으니 아침을 서두르기에도 딱 좋다. 그러니 오늘은 이른 잠을 잘까 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성싶었다. 해도 채 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잠이 쏟아졌다. 하품을 쩍, 불을 탁 껐다. 아무도 없는 이 너른 숙소 터에 오로지 내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2024.09.19.
걷기, CTC 16/17
37,068보(25.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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