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2일 차
노크리유스호스텔~ Lus Mór(≈ 16.8km)
맞춰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현재 온도 10도. 바깥의 날씨는 상당히 추웠다. 온몸의 근육이 놀랐을 텐데 스트레칭을 해보니 아직 괜찮은 듯했다. 더블린에서 챙겨 온 또 다른 빵과 사과로 아침을 해결하고 싱크대 수돗물로 물병을 채웠다. (똥맛 같던 빵은 어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버렸다.) 예보상 오늘은 비가 온다는데 걱정이었다. 이미 아일랜드의 변덕스러운 날씨를 각오했음에도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적미적 날씨만 노려보다 결국 9시 40분에서야 숙소에서 출발했다.
우비 입기가 귀찮아 우산을 썼는데 숙소를 나선 지 10초도 안 돼 망가지고 말았다. 휙 불어온 강풍에 말 그대로 똑 부러져버리고 만 거다. 에잇, 그러게 진작 입고 나올걸. 주섬주섬 꺼낸 우비를 투둑투둑 비를 맞으며 덮어썼다. 커다란 배낭까지 덮었더니 우비가 꽉 꼈다. 벌써 반쯤 젖었지만 어쨌든 채비는 됐다. 둘째 날의 길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찝찝하고 축축했다.
일반적인 2일 차 루트는 노크리유스호스텔에서 올드브릿지까지 21km 정도다. 하지만 올드브릿지 인근에 남은 숙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길의 중간에 있는 Lus Mór B&B라는 숙소로 예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약 15km 지점에서 길을 빠져나와 숙소까지 30분가량을 더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덕분에 내일은 7.8km 정도(오늘 덜 걸은 6km에 숙소 Lus Mór 위치로 인한 1.8km 추가 거리 포함)를 더 걸어야 하게 됐다. 3일 차의 원래 루트가 꽤 짧은 편이니 나름 적절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 일단 한번 가보자.
길의 시작은 숲길.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잇길로 빠져 고사리밭으로 든다. 사유지라 표시되어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빨리 지나가라는 뜻이다. 오른편으로 냇물이 흘러 더욱 비 오는 풍경과 어울렸다. 건너편에는 노지 캠핑을 즐기는 가족이 있었다. 비 냄새에 섞여든 따뜻한 장작 향이 진했다. 어설픈 다리를 건넜다. 약간의 오르막과 도로를 거쳐 다시 숲으로 이어진 길. 입구의 주차장 간판엔 Crone Forest라 적혀있었다. 이때의 시간은 대략 10시 20분.
다시 얼마간의 오르막. 가파르진 않아도 확실히 오르는 길. 몸이 달아오른다. 이제 보니 어제치의 고난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있었다. 벌써부터 약간 힘에 부치는 느낌이 들었다. 20~30분 정도 올랐을까. 숲길이 평지로 접어 드......는 줄 알았는데 그건 잠시뿐. 반복해 오르막이 이어졌다. 비가 그치고 불현듯 햇빛이 내렸다. 하지만 빛은 겨우 찰나에 불과했다. 오를수록 날씨가 매서워졌다. 그럼에도 오가는 사람들은 꽤 있었다. 위클로웨이를 걷는다기보다는 이 숲을 산책 삼아 찾은 동네 주민들로 보였다. 가벼운 차림이 부럽다. 산책을 즐기는 강아지의 저 해맑음이 괜히 샘난다. 어깨가 아프다. 아, 온몸이 축축했다.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인 먼발치의 마을 풍경이 좋았다. 그러다 눈을 확 틔운 전경이 갑자기 나타났다. 저만치 높다란 폭포가 보였다. 반대편으론 어제의 무지개 뾰족산도 함께 보였다. 지도를 찾아보니 폭포의 이름은 파워스코트(Powerscourt Waterfall), 저기 저 뾰족산은 올드롱힐(Old Long Hill)이다. 11시 10분. 그래, 여기서 잠시 쉬어가자. ‘Jack and Sheila Cowan’ 벤치 앉아 신발을 벗고 풍경을 감상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에는 고인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공공 장소에 벤치를 기부하는 문화가 보편화되어있다고 한다. 걷다 보니 정말 명패가 달린 벤치가 자주 보였다.) 바람이 불어 춥긴 했다. 바람의 세기보다 그 소리가 더 매서웠다.
11시 반에 다시 출발. 대체로 평평하던 산길은 갑자기 골짜기 사이의 긴 내리막으로 바뀐다. 제주의 풍경을 닮은 돌담에 자꾸 눈길이 갔다. 산허리 중간중간, 양들은 열심히 식사 중이었다. 위클로웨이를 내내 수놓을 헤더꽃의 보랏빛은 여기에도 사방으로 한껏 펴있었다. 멋진 길이다. 연신 감탄했다. 그저 풍경에 넋놓고 걸었다. 이 길을 내려가면 얼마나 힘들게 다시 올라야 하는지 이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위클로웨이에서 가장 높은 화이트힐(White Hill)로 향하는 길이었다. 해발 620m. 그게 마의 장벽처럼 느껴질 줄이야. 완전히 낙담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걸어 올라갔는지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였다. 배낭 때문일까, 내 저질 체력 때문일까. 다들 잘만 올라가는데 나만 뒤처지는 느낌이었다. 비바람도 세차다. 아직 제대로 밥을 못 먹어 도무지 힘이 안 났다. 더 이상 못 걷겠다 느꼈다. 12시 반. 바닥이 온통 양똥밭이지만 여기서라도 쉬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나마 양호해 보이는 곳으로 아무렇게나 배낭을 던졌다. 분명 저 먼 마을 위로는 햇빛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여긴 흐리고 습하고 더군다나 춥다. 게다가 배까지 고팠다. 바람에 휙 날아갈까, 어찌저찌 어렵게 꺼낸 쿠키 부스러기로 점심을 연명했다. 라면을 빼고는 먹을 게 거의 다 떨어졌다. 이제 뭔가 장을 보긴 봐야 했다. 도무지 슈퍼나 식당이랄 게 없어 난감했다. 장도 장이지만,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가격에 상관없이 무조건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겠다 생각했다. 먹은 게 없으니 몸에 힘이 없다.
뭐라도 입에 넣고나니 그래도 걸을 힘이 났다. ‘지금의 나’는 ‘이미 지난 나’라고 상상했다. 힘듦은 결국 지나가는 법. 그렇게 과거의 나는 현재를 미래처럼 한 걸음씩 올랐다. 숨이 차면 뒤돌아 풍경을 봤다. 흐려도 이쁘긴 이뻤다. 그 이쁨으로도 충전이 되긴 됐다.
한차례 긴~~~오르막이 멎자, 위클로웨이하면 떠오를 법한 비탈길이 나왔다. 능선을 따라 난 아주 좁은 길. 혹여나 발을 헛디뎌 능선 아래로 구를까 조심스러웠다. 이리저리 떠미는 듯한 바람. 바람에 방향이 없어 걷기가 더 어려웠다. 진흙탕으로 된 이 길이 뭔가... 정말 아일랜드 느낌이랄까. 뭐 그랬다. 약간의 오르막도 여기선 즐거웠다. 전에 없던 새로운 풍경이었다.
능선이 끝나자 이제 막바지, 화이트힐로 향한다. 나무 데크로 외줄 길을 길게 만들어 놓았다. 오르막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제까지의 바람은 모두 약과. 여기서부터 자비 없는 비바람이 사방에서 정신없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바람이라 균형 잡기가 도무지 쉽지가 않다. 배낭 커버가 바람에 벗겨져 날아갈 뻔한 걸 운 좋게도 붙잡았다. 콧물이 떨어져 뒤로뒤로 자꾸만 흩날렸다. 귓속 가득 바람 만 있다. 그 소리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게 맞는 거지? 꿈인가.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결코 헤어 나오지 못할 어떤 곳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길처럼, 눈 앞의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눈앞에 탁! 테이 호수(Lough Tay)의 풍경이 화들짝 펼쳐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거도 미래도, 환상도 꿈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오후 1시 50분. 바로 여기, 이 길의 창시자 J.B.말론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바람이 여전히 셌지만 바로 떠나지 않고 조금은 머물러 있었다. 풍경도, 이 길의 시작도, 잠시 기억했다.
아래로 내려오자 얄밉게도 햇빛이 났다. 우비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산책길을 지나 음산한 숲으로 든다. 지도를 보니 숙소로 가려면 슬슬 위클로웨이에서 빠져나가야 했다. 어둡고 습한 그 길을 나오자 도로가 나왔다. R759도로. 이곳에서 오늘치 위클로웨이는 마무리가 되었다. 오후 2시 30분. 아마 15km 정도 걸었을 것이다. 이리 힘들 수가 있나. 앞으로 남은 길이 걱정됐다. 어제보다 시간도 더 걸렸다. 숙소까지는 아직도 1.8km가 남았다.
위클로웨이 방향을 등지고 도로를 따라 30분을 더 걸어갔다. 이 길은 고스란히 내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길. 은근히 멀었다. 들판이 양들이 빤히 반겼다. 그래도 녹초가 된 여행자를 밝게 맞이해 주는 호스트가 있었다. 내부가 참 깔끔했다. 개인 화장실은 없지만 싱글룸이라 마음도 편했다. 얼른 샤워를 하고 손빨래를 했다. 앞뒤 잴 것 없이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뻑뻑하던 몸이 노곤히 녹았다.
숙소 자체 저녁식사 메뉴는 없지만 원한다면 저녁 6시 반부터 2시간 동안 인근 마을 레스토랑에 데려다줄 수는 있다고 한다. 망설일 것도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내일의 점심 도시락도 신청할 수 있다길래 그것도 미리 주문해 두었다. 시간을 기다리며 인스턴트커피 한 잔으로 몸을 녹였다. 넓은 창의 정원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좀 쉬었다. 눈이 감기고 삭신이 쑤셨다. 이런 몸으로 CTC와 산티아고순례길까지 걸을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지금의 이 위클로웨이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다 그 생각 자체를 아예 접었다. 힘든 건 순간일 뿐이라는 걸 또 잘안다. 온 정신을 오늘의 저녁 식사에 집중하자. 메뉴는 어떤 게 있으려나.
인근의 라운드우드(Roundwood)라는 마을에서 식사를 했다. 숙소에서 미리 예약해 주어 쉽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메뉴 중 쌀밥이 포함된 치킨 카레가 있어 그걸로 시켰다. 기네스 생맥주도 빠질 수 없었다. 부드러운 한 모금에 피로가 싹 가신다. 시끄러우면서도 나긋한 이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그간의 여행 중 제일 비싼 식사였다. 몸보신(?) 정말 제대로 했다. 맛도 나름 괜찮았다. 역시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사는구나. 신체적 나약함은 곧 길에 적응할 거라 믿는다. 오늘은 제대로 못 먹어서 힘들었다고 치자. 결국 모든 것은 재빠르게 지나갈 거다. 이 낯섦도 차차 익숙해지리라 믿는다.
테스코로 연명했던 지난날들이여 당분간 안녕. 오늘의 포식을 기억 속에 또렷이 저장해 두자. 불면은 걱정도 없이 눕자마자 그대로 꿀잠 예약이다. 숙소 싱글방의 푹신한 솔로 침대가 포근히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 그전에 할 일이 있지.
익스큐즈미. 원 모어 기네스 플리즈.
2024.08.25.
걷기, 위클로웨이 2/7
27,812보(18.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