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의 무게는 욕심의 무게

걷기,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1일 차

by 달여리
말레이공원~노크리유스호스텔(≈21km)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을 거쳐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호스텔.


새벽 6시, 작은 소리의 알람에도 기가 막히게 눈이 떠졌다. 위클로웨이 첫날이다. 더 자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어딘가 다른 침대에서도 계속 알람 소리가 울렸다. 조용조용 세수와 양치만 하고선 대충 짐을 챙겨 우선 로비로 내려왔다. 배낭 정리를 마저 마친 뒤 사과 하나를 꺼내먹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 됐다. 7시,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를 나섰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와서 걱정을 했는데, 파란 하늘의 아침이라 다행이었다. 쓰으읍 후.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번 내쉬었다. 이제 긴 걸음이 시작된다. 애써 담담한 척. 씩씩하게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배낭이 묵직했다.


여기서 위클로웨이 시작점인 말레이공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삼사십 분 가야 한다. 더블린에 3일을 머물렀지만 일반버스 탑승은 처음이었다. 전용 충전카드가 없으면 잔돈을 미리 준비해야 된다고 해서 전날 최대한 준비해 두긴 했다. 하지만 결국 딱 맞추지 못했다. 결국 0.1유로를 손해 봤다. (거슬러주지 않는다. 혹자는 잔액이 표기된 영수증을 들고 버스 창구 등에 가면 거슬러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 소액이라 그런지 내가 받은 영수증엔 아무리 봐도 잔돈 표시는 없었다.) 탑승 시 목적지를 말하면 기사님께서 금액을 알려준다. 돈을 내니 영수증처럼 생긴 티켓을 주더라.


토요일 오전에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버스라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버스에서 내릴 땐 다들 기사님에게 “땡큐~”라 인사하길래, 나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하차 뒤 조금 걸었다. 말레이공원 근처의 리들(Lidl) 마트까지 오니 7시 40분쯤이었다. 말레이공원도 리들도 모두 문이 닫혀있어서 잠시 방황했다. 이왕 기다리는 김에 리들의 8시 오픈에 맞춰 간단한 식사도 해결했다. 이제 공원의 문이 열렸다. 입구로 들어서자 곧 표시가 보였다. 아! 여기가 시작점이구나.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의외로 조촐한 시작의 표시였다.


드디어 트레킹이 시작된다. 갑자기 확 실감이 났다.

IMG_5228(Resize).jpg
IMG_5229(Resize).jpg
<127km의 위클로웨이, 조촐해 보인 그 시작점>

위클로웨이(Wicklow Way)는 아일랜드의 최초 장거리 트레킹길로, 여행작가 J.B. 말론이 개척한 127km 도보여행길이다. 더블린 주 남쪽에서부터 위클로 주 중심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 처음 개장하여 1982년에 지금의 코스로 완성되었다고 하니, 40여 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거다. 한국에서는 여행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위클로웨이 홈페이지(wicklowway.com)와 2019년에 나온 이영철 작가님의 책 <세계 10대 트레일> 그리고 구글 지도를 참고해 겨우 계획을 세웠다. 길 위의 요점이 되는 숙소는 몇 되지 않는 데다 있더라도 매진인 경우가 많아 준비하는 데 애를 좀 먹었다. 그래도 CTC보단 계획을 짜기 수월한 편이었다. 이왕이면 두세 달 전에는 숙소를 미리 구해두는 게 제일 좋을 듯하다. 나는 한 달 전에서야 계획을 짜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길을 꽤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생겼다. 픽업/드랍 요청도 몇 차례 필요했다. 위클로웨이는 총 7일간의 여정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트레킹.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닐 수 있겠지? 당연하게도 모든 건 직접 해봐야지만 알 수가 있다. 위클로웨이 표식인 옐로우맨만 잘 따라가면 된다. 미리 너무 걱정은 말자.

240824_A1_016(edit2)(resize).jpg
240824_A1_014(edit2)(resize).jpg
<위클로웨이의 시작점, 말레이공원>

8시 반, 위클로웨이가 시작됐다. 시작점인 말레이공원은 더블린 외곽지역에 위치한 거대한 공원이다. 주말 아침부터 운동하는 건강한 사람들. 공원은 특별한 조경이나 장식이 없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드넓은 잔디밭이 꽤나 평온해 보인다. 그 공원을 관통해 지나간다. 무심해 보이는 옐로우맨 표지가 적절한 위치마다 있어 크게 길을 헤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CTC를 대비해 준비해 둔 “Alltrails” 어플(유료버전) GPS도 혹시 몰라 켜두긴 했다. 유심이 터지지 않는 구간에서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을 테다.


2km쯤 걸었을까, 말레이 공원을 빠져나와 얼마간 도로 곁을 따른다. 샛길로 들어 Saint Columba's College란 곳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오르막이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GPS를 확인해 보니, 이제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오를 예정이었다. 킬마쇼그 숲(Kilmashogue Forest)에 들어선다. 벌써부터 이렇게 힘든데, 여기까지도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더 놀라운 건 앞으로 러닝 그룹들을 계속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트레일러닝에 엄지 척! 무턱 댄 존경을 표했다.

240824_A1_076(edit2)(resize).jpg
240824_A1_078(edit2)(resize).jpg
240824_A1_087(edit2)(resize).jpg
240824_A1_044(edit2)(resize).jpg
<킬마쇼그 숲(Kilmashogue Forest)을 지나 정상으로 오른다.>

왼쪽으로 내내 더블린시내가 내려다보여 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길은 계속 오르막으로 향했다. 평범하던 산책길이 점점 등산로로 바뀌더니 어느 순간 탁 트인 시야! 사방엔 보랏빛 꽃이 가득했고 저 멀리 능선 따라 구름의 그림자가 마구 흘렀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길은 좁게 계속 이어져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도 의외로 꽤 있었다.


왼편으로 언덕의 정상이 보였다. 거기서 볼 풍경이 궁금했다. 능선 위 갈림길에서 위클로웨이를 빠져나와 그 길로 잠시 올랐다. 더블린 마운틴 웨이라 표시된 길이었다. 정상에 오르자 캐언(cairn) 너머로 시야가 확 트인다. 더블린과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조망이 훤하니 시원했다. 아니,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누가 정상 아니랄까 봐 왜 이리 바람은 세찬지 금세 정신이 없어졌다. 7.7km 지점, 벌써 10시 20분이었다. 이미 거의 두 시간을 걸었다. 쉴 때가 되었다. 추워도 어쩔 수 없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었다. 물도 마시고 아침에 리들에서 산 망고 주스도 마저 먹었다.

240824_A1_060(edit2)(resize).jpg <능선을 따라 길게 길이 뻗었다.>

다시 출발. 올라왔던 길을 내려 위클로웨이로 다시 들어선다. 길게 뻗는 이 능선의 길이 참 예뻤다. 자꾸만 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이윽고 내리막 숲길이 시작됐다.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걸 잘 알기에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한참을 내려오자 갑자기 인도없는 도로가 나왔다. 오가는 차와 자전거에 계속 신경이 쓰여 상당히 피곤했다. 꽤 길게 느껴진 그 도로에서 벗어나 겨우 마을길로 들어섰다. 그제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몸도 살짝 느슨해졌다.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아닌가, 상상으로 맡는 걸지도 모르겠다. 없는 냄새도 맡고 힘까지 안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슬슬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나 보다. 마을의 아주 작은 다리인 보라나랄트리 브릿지(boranaraltry bridge)에 도착했다. 가방을 풀고 좀 쉬었다. 난간에 걸터앉아 한숨을 돌렸다. 11시 50분이었다. 아마도 11km 즈음의 중간 지점까지는 왔다. 어제 사둔 빵을 점심으로 꺼냈다. 돌처럼 딱딱한 그 빵은 놀랄 정도로 너무 맛이 없었다. 좀 과장하자면 똥을 먹는 느낌이랄까. 하는 수 없이 아껴둘 사과를 또 먹었다. 브라이튼에서 산 쿠키가 아직 남아 그걸로 허기를 마저 채웠다.

240824_A1_115(edit2)(resize).jpg
DSC00126.jpeg
<능선을 내려온 도로길에서 빠지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에서부터 행정구역이 더블린 주에서 위클로 주로 바뀐다고 했다. 20분 간의 맛없는 점심 시간을 끝내고 어영차 배낭을 다시 멨다. 곧 오르막이 시작됐다. 완만한 오르막이라 처음엔 만만하게만 봤다. 그런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다. 점점 가팔라지다 약 올리듯 살짝씩 낮아지더니 곧장 다시 가팔라지는 식의 반복. 15kg이 넘는 배낭은 말 그대로 짐짝이 됐다. 힘에 부쳤지만 꾸역꾸역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더 힘들 게 분명했다. 땀이 뚝뚝 떨어져도 그저 묵묵히 올랐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을 올랐다.


드디어 오르막을 다 올랐다. 와! 절로 탄성이 터진다. 뿌듯함의 휴. 길은 헤더(Heather) 꽃이 가득 핀 평탄한 오솔길로 이어졌다. 그 길이 참 고즈넉했다. 하지만 길의 아름다움이 무색할 정도로 파리들이 많았다. 온몸에 달라붙고 귓속말을 잔뜩 속삭였다. 그것만 빼면 다 좋았다. 파리를 쫓느라 거의 춤을 추듯 움직였다. 풍경을 즐기기는커녕,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240824_A1_157(edit2)(resize).jpg
240824_A1_165(edit2)(resize).jpg
<헤더 오솔길>

헤더 오솔길이 끝나자 고사리 숲이었다. 이내 가파른 내리막 돌길이 이어졌다. 오르는 건 몸이 힘들지만, 내려가는 건 몸이 아프다. 어렸을 때는 모르던 이런 몸의 느낌.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구불구불 넓은 임야 길을 지나 숲을 걸었다. Curtlestown Forest라 적힌 주차장에서 내리막은 일단 끝이 났다. 도로를 통과해 들어선 골목은 한적했다. 길은 다시 숲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흐려진 하늘에선 비가 몇 방울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진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노크리힐(Knockree Hill)을 오르는 길. 다행히 그리 가파르지는 않다. 벌목의 흔적들을 지나자 길은 갑자기 곶자왈 같은 곳으로 흘러갔다. 그리운 제주 생각에 빠지는 것도 잠시, 그렇게 얼마간 길을 내리다 보니 불현듯 오늘의 길은 완전히 끝이 나 있었다. 무사도착에 안도의 큰 한숨을 불었다. 길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한 자의 첫 트레킹. 이만하면 '성공적'이라고 해도 괜찮겠지.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은 다시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오늘의 숙소 노크리유스호스텔은 여기서 200m 정도만 더 가면 됐다.

240824_A1_181(edit2)(resize).jpg
240824_A1_206(edit2)(resize).jpg
240824_A1_219(edit2)(resize).jpg
240824_A1_226(edit2)(resize).jpg
<으슥한 숲길 지나 드디어 도착, 낯선 이방인을 반겨주는 호스텔의 고양이들>

2시 40분, 길의 끝 숙소 도착. 아침 8시 반부터 시작된 약 6시간의 트레킹. 확 트인 풍경 언덕에 위치한 호스텔은 깔끔했다. 곧장 체크인을 했다. 가방을 벗자 오른쪽 어깨와 등이 쑤셨다. 보호대를 찬 덕분인지 다행히 무릎은 괜찮았다. 곧바로 샤워하고 모든 옷을 손빨래했다. (계속 해오곤 있지만, 걸으면서까지 손빨래하는 건 참 못할 짓이라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내일 아침까지 잘 마르길 바라면서 침대에 설치한 빨랫줄에 옷가지를 널었다. 식사나 음료를 팔지는 않지만, 호스텔의 주방을 이용할 수 있었다. (식당은 여기서 1~2시간을 걸어가야 나온다고 했다. 당연히 대중교통은 없다. 내일의 조식을 신청할 수가 있다는 데, 간단한 구성에 비해 무려 9유로라 망설여졌다. 고민하다 결국 조식 신청을 포기했다.) 오는 길에도 마트나 식당 하나 없었는데, 미리 라면과 빵 등의 먹거리를 조금이나마 사 두길 잘한 것 같았다. 오늘 저녁 메뉴는 걷는 길에 이미 정해두었다. 후후후, 그것은 바로 감자면! 더블린의 한인 마트에서 사 왔다.


든든한 배도 식힐 겸 로비에 앉아 쉬는데, 다섯 시부터 갑자기 내린 우르르 쾅쾅 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게 삼십 분정도 내렸을까, 난데없이 비가 그치더니 말끔한 하늘이 반짝여서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신기했다.


아, 그리고 선물처럼 나타난 무지개!

<무지개로 하루를 마무리>

식당 로비에 있는 몇 안 되는 숙박객 중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해, 이 풍경은 오롯이 나만의 몫이 된다. 그걸로 고단한 하루의 충분한 보상이 됐다.


내일은 도중에 위치한 숙소를 잡은 탓에 원래의 2일 차 루트에 비해 5km 정도를 적게 걷게 된다. 그래서 마음이 좀 가볍다. 못 걸은 5km는 3일째에 마저 걸어야 하겠지만, 그건 이틀 후의 나에게 맡기자. 아무런 유흥거리가 없는 이곳에선 저녁이 무척 느리게 흘렀다. 고요가 시간의 전부라 아무래도 별 탈 없이 일찍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푹 자자. 그건 뭐 원치 않더라도 그리될 성싶다.



2024.08.24.

걷기, 위클로웨이 1/7

36,531보(25.1km)

매일의로고2024-0824.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