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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 그라운드
( Coffee Ground )

4. 에스프레소

by 달율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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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토요일, 무더운 여름 날.


교육원이 끝나고 학생들이 귀가했다. 종착역에 다다르자 모두 버스에서 내려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희수가 PC방에 가자고 진호를 꼬셨지만 진호는 이미 에이린과 팔짱을 끼고 걸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희수는 맘대로 하라는 둥 실망한 듯 투덜거리고 두 사람을 놀려대다 건물 사이로 사라졌다. 에이린은 진호를 데리고 어느 까페에 들어갔다.


에이린은 까페에 들어서자마자 카운터에 있는 아르바이트 생에게 달려갔다.

"나 왔어 언니~"

아르바이트 생도 무척이나 반갑게 오도방을 떨며 에이린을 맞이했다. 진호는 입구 근처 에어컨에 서서 땀을 식혔다. 두 사람은 진호를 쳐다보다 서로를 보다 하면서 잠시 수다를 떨었다. 진호는 눈치채지 못한 척 먼 산, 도로 위 오토바이를 구경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몇 분이 흘렀을까, 아르바이트 생이 엄지를 치켜 세우고 에이린은 다시 진호에게 돌아왔다.


그녀가 수줍은 듯이 말했다.

"나랑 친한 언니야. 오늘은 우리 둘이 하루 종일 이 까페에 있어도 돼."

진호가 흐뭇하게 둘을 바라보는 친한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언니?!"

그러자 알바는 까르르 까무러지더니 겨우 안정을 되찾고 대답했다.

"시호 누나라고 불러~"


두 사람은 2층 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워낙 테이블이 커서 두 사람은 옆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꾸밈이 어색하지 않은 어른들이 주변의 작은 테이블을 메꾸고 있었고 다양한 냄새가 전실(全室) 안에 가득했다. 어떤 청동 부리새가 장식으로 놓여있던 테이블이었지만, 시호 누나가 곧 장식물을 치워주었다. 무언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 같아 주춤했지만 의외로 주변 사람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조금 기다리자, 에스프레소 두 잔이 나왔다. 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컵이 둘 앞에 놓였다. 커피 원액과 따뜻한 물이 담긴 잔이 진호와 에이린에게 주어졌다.


에이린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호, 스읍하고 살짝 맛을 봐봐. 이렇게"

그녀는 살살 입만 대는 시늉을 했다.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이었다. 그녀의 입술은 자신감으로 가득찼고 하얗고 창백한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창밖에는 도시 매미 떼가 지랄 울음을 터뜨렸고, 건물 안에는 탁자를 치고 바닥을 구두 굽으로 두들기는 소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진호가 그녀의 얼굴과 손짓, 그리고 옷에서 나오는 달콤한 요거트 같은 냄새에 집중했을 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고동치고 감각은 집중했다.


진호는 두리번 거리다가 오밀조밀하고 아담한 잔에 담긴 커피를 한 입 마셨다. 한약 만큼이나 쓴 맛이 혀를 타고 목으로 내려갔다. 진호는 일그러지는 입을 간신히 부여잡고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숨을 내쉴 때 진한 향이 목을 타고 코에 닿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이린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게 포장된 초콜릿을 꺼내 진호에게 건넸다. 진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포장지였다.


"자, 초콜릿."

진호는 에이린이 준 초콜릿을 건네 받고 깜짝 놀랐다. 이 무더운 날에 초콜릿이 주머니에서 녹지 않고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것이다. 붉고 단조로운 종이 봉지를 열자 은박지가 나왔다. 은박지 안에는 초콜릿 블록 한 개가 들어있었다. 색만 밤색인 마가린이나 버터조각이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봉지를 열어보니 초콜릿 냄새가 났다. 진호는 이미 의심스러운 눈빛을 띄고 있었고 에이린은 그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진호가 초콜릿을 한 입 베어먹자 달콤한 초콜릿이 사르르 녹아 혀를 감싸안았다. 방금전까지 텁텁하고 불편했던 에스프레소의 감정은 녹아 사라지고 진한 달콤함이 신경을 지배했다. 그러자 들리지 않던 주변의 소음과 매미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쿵쾅대던 가슴도, 심박 따라 흔들리던 눈의 미세한 초점도 가라앉았다.


에이린이 물었다.

"어때? 맛있지?"

진호는 이미 목 뒤로 넘어간 에스프레소와 초콜릿을 쩝쩝 입맛 다시며 찾았다. 확실했다. 진호는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방법 하나를 알게 되었다. 진호가 답했다.

"새롭고... 맛있었어."

그녀는 대답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심장 박동은 계단 밑으로 떨어진 고무공처럼 통통 튀다가 곧 퉁퉁퉁, 작은 소리를 내며 사그라들었다. 진호와 에이린은 각자 해야할 숙제를 폈다. 진호는 집중하지 못하고 한 페이지 정도만 끄적이다가 말았다. 두 사람은 계속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두 사람은 까페에서 할 일을 마치고 산책을 나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진호는 마을에 있는 호수를 가장 먼저 찾았다. 진호가 호숫가로 가자고 제안했고 에이린도 좋다고 답했다. 진호의 마을은 자연과 도시의 경계에 있었고, 진호의 아파트 앞에는 거대한 호수가 있었다. 원래 호수는 2개였는데, 도시개발공사에서 작은 호수 물을 끌어와 큰 호수에 합하고 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흙으로 메꾸었다. 그 작은 호수는 이무기가, 큰 호수는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내려져오지만 공무원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진호는 그 전설을 에이린에게 소개하느라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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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살았다는 호숫가 답게 한여름에도 찬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의 온 몸을 식혔다. 호숫가와 거대한 강 사이에는 거대한 평야가 있었고 그 어떤 인공 건축물도 그곳에 들어서 있지 않았다. 넓은 호수 옆에 펼쳐진 갈대밭에도 불구하고 건너길 아파트 말고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문명의 작품이 없었다. 어릴적의 진호는 당연히 호수 한 가운데 섬에는 정령이 살고 있었을 것이라 믿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호수 옆 동산에 올라 바위턱에 앉았다. 산 밑으로 호수와 도시, 그리고 별빛이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진호가 신이나서 곳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붙였다.

"겨울에 길고양이가 저 섬으로 들어가는 걸 봤어..."


진호는 이상함을 느꼈다. 이렇게 무더운 공간, 숲에 있어도 모기 한 마리조차 두 사람을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진호가 말했다.


"그거 알아? 오늘 모기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걸?"


에이린은 자신이 뿌리는 향수에는 천연 모기 퇴치제가 들어있다고 설명했다. 진호는 신기했다. 선인장을 기를 때 어떤 약효가 있는지 생각하면서 사오는구나, 하고... 진호가 무심결에 말했다.

"이린아, 너네 집에는 신기한게 많을 것 같아."

진호는 자신이 입밖으로 꺼낸 말을 주어담을 생각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은 몇 초간의 침묵 뒤에 찾아왔다. 에이린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었다.


에이린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우리 집에 진짜로 올래?"

"응?"

진호는 순간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다음 주에."

에이린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싫으면 말고."

"아니야, 아니야 좋아. 너가 그랬잖아. 부드럽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게 해주겠다고."

에이린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빨개졌다.

"괜찮아, 오늘은 아니야."


에이린은 휴대폰 부재전화 목록을 보고는 서둘러 버스를 타러갔다. 진호는 에이린을 배웅한 뒤,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산책을 계속했다. 밤이 깊어지자, 멀리서 맹꽁이가 바위 위에서 우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한참을 걷던 그는 거대한 전시관 앞에 멈춰 섰다.


사라진 작은 호수는 이 전시관 앞에 있었고, 그 호숫가를 지키던 어릴 적 진호가 아끼던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채, 움푹 패인 땅 위에 차가운 아스팔트가 덮여 있었다. 옆 저수시설도 보였다. 비가 오면 그 호숫자리에 다시 물이 모여 넘칠까 염려하던 지방자치단체가 홍수를 방비하기 위해 설치했다.


진호는 생각했다. 새로 이사온 주민들은 왜 이 지역에 싱크홀이 그렇게나 많이 발생하는지 알기 힘들 것이다. 이 땅이 누구의 땅인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진호는 옛 호수터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육교에 올랐다. 기형적으로 가라앉은 육교 밑으로 푹 꺼진 4차선 도로는, 한때 이곳이 이무기가 웅크릴 수 있을 정도로 한가로운 호수였음을 묵묵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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