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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 그라운드 (Coffee Ground)

5. 陽光滿溢(양광만일)

by 달율밤

陽光滿溢(양광만일)

햇빛이 가득 차 넘쳐 흐르다



진호는 에이린과 가까워졌고, 그녀의 지혜로움에 흠뻑 빠졌다. 그녀의 아이디어는 항상 신비로웠고, 도서관에서 아이디어와 관련된 책을 찾아보면 지식의 폭이 넓어졌다.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작은 휴대폰을 열어 에이린에게 메세지를 보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다. 어느 한적한 날 진호는 여느때처럼 호숫가를 산책하다 바위에 앉아서 메세지를 보냈다. 그녀에게 답장이 돌아올 때까지 호수에 펼쳐진 물결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진호는 그녀와 같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간다면 정말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진호는 환상을 보았다. 푸른색 코트를 즐겨입는 자신과 붉은 니트를 즐겨입는 그녀가 만드는 색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호숫가에 낙엽이 지고 바스러질 수 없는 나뭇잎이 호숫가에 쌓여갈 때, 떡갈나무 밑 바위에 앉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붉은 원서를 차분히 읽고 있을 그녀가 보였다. 그 옆으로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를 입고, 파란 목도리를 하고 나타난 미래의 자신도 보였다. 진호는 꿈속에서도 호숫가를 걸었다. 얼마전에 읽은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에서 처럼,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사랑스럽게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진호는 머나먼 우주에서 보내오는 전파를 수신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그 따뜻한 그림을 지긋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그려내고 있었다.


진호는 어느덧 중학생이 되었다.

진호는 중학교 입학식을 끝내고, 담임선생님에게 자신이 주말마다 교육원에 가야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전교조 출신의 교사로, 모범적인 학생을 만드는데 열성적이었다. 그녀는 학생들이 자신을 '최블랑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최 선생은 학업에 관심이 많은 진호를 동기들의 모범으로 삼기로 했다. 토요일, 진호의 빈자리는 아이들의 학업욕구를 자극할 것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진호의 교육원 활동을 수락했으며, 반 아이들에게 그의 높은 학업 성취를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선생님은 토요일 날 교육원 버스로 떠나는 진호에게 말했다.

"보고와서 느낀 점을 친구들에게 말해주면 좋겠다!"

그것은 교육 철학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였다. 학업이라는 프로파간다를 전파하고 공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모범생을 선전도구로 쓰는 행위였다. 그 안에 학생 개개인의 개성이란 없었다.


한 아이가 창밖을 보며 물었다.

"진호는 왜 혼자 하교하는거에요?"

그러자 다른 아이가 말했다.

"걔는 우리랑 달라!"


최 선생은 8년의 교직 생활 동안 담임을 역임했다. 그녀는 학업의 망쳐진 분위기가 너무나도 쉽게 전염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오직 성실한 아이들이 교실을 구원할 것이다. 성실한 아이에게 완장을 채워준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학급을 이끌어나가기 어려워짐을 잘 알면서도 최 선생은 그런 교육 방식을 택했다. 아이가 자라서 엘리트 주의에 빠질 수도 있을텐데.


다행히도 어린 진호는 상대적 우월함에 관심이 없었다. 단순히 클래스메이트들의 적극적인 관심에 기분이 좋았다. 어쨌든 그는 학교 안에서보다 밖에서 친구 사귀기가 더 적합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뭐만하면 '진호는 다르니까'라는 말을 남발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진호는 이때부터 급류를 타는 작은 카누처럼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자신이 끌려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공감받지 못할 하루하루의 일들을 일기장에 빼곡히 적어넣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자신의 운명이 틀어졌는지 나중에 가서 파악해볼 심산이었다.




교육원의 수업 강도는 초등학교보다 조금 더 강해졌다.


아이들은 이제 마냥 교육원 수업을 즐길 수가 없게 되었다.

앞으로는 정량적인 실험과 정성적인 실험을 구분해서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중학생이지만 대학생처럼 실험해야했다. 잘못 쓴 보고서는‘리젝’되었다. 교수님에게 따끔한 지적을 받기도 했다. 석박사 과정처럼 말이다. 과학은 수학을 도구로 쓴다. 수치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아이들의 상상력이 대략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세계가 아니었다. 가혹한 세상이었다.


어느 봄 초입이었다.

교육원의 같은 조, 중학교 2학년 누나가 진호에게 소리를 질렀다.

“너 반응속도 계산할 줄 몰라? 로그 계산도? 전혀?”


진호는 쩔쩔맸고 눈앞의 날카로운 눈을 가진 한 누나는 혀를 끌끌 찼다.

누나가 참다못해 진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너는 가서 플라스크나 닦아. 이물질 없게. 반들반들, 물때가 사라질 때까지.”


진호는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다시 한 번 큰 소리가 들렸다.

“네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거든?”


다행히 친구 희수는 조가 다르지만 진호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진호가 매주 중학교 2학년, 3학년 형 누나들에게 혼나는 반면에 희수는 모르는 게 없었다. 보다 못한 그는 학원 자료를 진호에게 나누어주었다. 덕분에 진호는 다른 형 누나들로부터 어느 정도 방어를 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엘리트, 교육원에서는 무능력 소리를 들었다.

진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에이린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송신 : 재밌는 삶을 살고 싶어.'

옆 교실에 있던 에이린에게 금방 답장이 왔다. 그녀도 심심한 듯 했다.

'수신 : 개성을 가지면 돼.'

진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송신 : 지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

진호가 키링을 몇 번 손가락으로 튕기자 답변이 도착했다.

'수신 : 너가 하기에 달렸어 ㅋㅋ'



수업이 끝난 어느 날, 희수는 어느날 진호에게 물었다.

"너, 영인이랑 사귀냐?"

진호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러다 두 사람이 사귀지 않고 있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희수는 여자친구가 필요한듯 보였다.


"아니, 아직 영인이 집도 들어가보지 못했는데."


희수는 얼굴이 벌개져서 신나게 웃더니 멋쩍어서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하기 시작했다. 희수는 다른 아이들보다 수염이 먼저 나기 시작했을 정도로 성숙했었다.

"둘이 가까워 보여서 그래. 아니 뭐 우리는 아직 어린데 여자친구 집에 들어가는 건 너무 부끄럽지..."


진호는 분위기를 좋게 만들기 위해 그 말에 긍정했다.

"응. 아직 사귀는 건 아니야. 그리고 아직 넘어야 할 고개가 많아."

"고개...? 고개를 넘어?"

"에휴. 병신아. 문해력을 높여봐라. 나는 이거 제출하고 버스타러 간다."

"야, 진호야. 키스는 했어? 야, 진호야. 귀뜸 좀 해줘라."


진호는 마지막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재빠르게 언덕을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희수는 진호에게 학원 자료집을 준 것에 비해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가방을 열어보니 이름모를 외국 과자 박스가 몰래 들어가 있었다. 모카맛 일본 과자였다. 박스를 이리저리 살피자, 포스트잇이 떨어져 나왔다.

'맛있게 먹어라 - 진호'


희수는 아주 만족했다. 중학교 1학년이 다 늙은 중년처럼 호탕하게 웃더니 진호의 뒤통수를 때리러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날씨가 따듯한 봄이었다. 산 중턱에는 벚꽃과 진달래가 피어나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알 수 없는 몽글함에 두근거리고 있었다.


진호의 어머니는 요즘들어 아들이 외국과자에 눈을 뜬 것이 영 불편했다. 하나같이 고가의 과자들이었다. 젊었을 때는 매미를 씹어먹어도 산딸기로 잼을 만들어먹어도 맛있었던 오래된 산기슭의 추억이 왜 아들에게는 생겨나지 못했는지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그러나 과자는 아들을 지나쳐 친구들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시호가 운영하는 까페에 다시 왔다.

진호는 간판을 유심히 보았다. 간판에는 <선명한 햇살 까페>라고 쓰여져 있었다. 유행하는 브랜드 샵도 아니었지만 꽤나 좋은 자리에 입점했다. 정확히 남향이었고, 강가까지 탁 트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2차선 도로 하나만 있었으므로, 2층에서 바라다볼 때는 시원한 뷰를 자랑했다. 낮에는 찬란한 햇살, 밤에는 정적인 고요함을 주었다. 벽에는 일본에서 온 풍경 달력이 걸려있었다. 진호는 그 강렬한 인상의 까페를 잊지 못할 예정이었다.


"언니~"


에이린은 시호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 하다가, 진호와도 대화했다. 그리고 시호는 커피 머신에서 커피 찌꺼기를 꺼냈다. 에이린은 그 커피 찌꺼기를 담을 비닐봉투를 꺼냈다. 시호는 그 봉투에 커피 찌꺼기와 구슬 몇 개 그리고 천연 방부제 역할을 하는 조개껍데기와 귤 껍데기를 갈은 가루를 같이 담아주었다.


진호가 궁금해서 물었다.

"누나. 이 가루로 뭘 하려는거에요?"


시호가 답했다.

"이건 '커피 그라운드'라고 불리는 커피콩 찌거기야. 굉장히 영양이 풍부하고 재활용의 가치가 커. 그런데, 사람들은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일반 쓰레기에 섞어 버리지. 그걸 영린이는 회수해서 식물의 비료로 쓰려는거야."


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경을 지키는 일은 아주 작은 아이디어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커피 그라운드로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시호가 말했다.

"두 사람, 에스프레소 가져다 줄테니까 2층에 앉아있어~!"


진호는 노곤하여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교육원은 이전과 같이 교수와 재미있게 놀 수 없었다. 어른들은 성숙함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호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하는 게임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가슴아팠다. 에이린이 말했다. "우리의 인생은 커피 그라운드 같아. 자신을 증명하는데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갈아넣어야 하지. 그렇게 소모된 우리의 소소하고 즐거웠던 시간은 기억속에서 사라져가는 거야." 진호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때 14살의 진호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야 했다. 어째서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진호의 눈에 방울이 맺혔다. 하얗고 뽀얗던 그녀의 얼굴이,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마도 지금이 에이린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에이린은 진호의 손을 잡고 나긋이 말했다.

"진호, 너도 이제 입시 준비를 해야지."

진호는 잔을 들어 입에 에스프레소를 머금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입시.

에이린이 그런 말을 할리가 없었다. 진호에게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상징이었고, 창의력의 원천이었다. 진호는 자신의 스케쥴을 되뇌어 보았다. 월요일에서 금요일, 집앞에 종합학원을 다녔다. 소현이와 몇 안 되는 아이들과 간단한 문제를 풀고 집으로 돌아가서 스타크래프트를 한다. 밖에서 산책하고 줄넘기를 하면 하루의 일과는 끝이었다. 부모님은 진호를 터치하지 않았다. 학교 시험은 벼락치기를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린이의 삶은 위로부터 아래로 이미 설계된 방식을 강요받고 있었다.


소현이는 어느 날 진호에게 말했다.

"진호, 너 좋아하는 애가 생겼지? 보면 딱 알아."

소현은 진호가 쓰고 있는 작은 편지지를 들고 흔들었다. 진호는 기억해냈다. 그래. 그 편지는 보랏빛으로 물든 한지로 만든 편지지였어. 진호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다. 나도 멋있는 남자랑 사귀고 싶은데."

아마도 소현이가 진호와 멀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진호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린아, 우리가 무슨 준비를 해야한다는 거야?"

그러나 까페는 비어있었다. 에이린은 커피를 남겨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녀가 남겨놓은 샴푸냄새와 비누냄새만이 계속해서 진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린아, 어디로 간거야?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지 넌 알고 있지?"


진호는 눈을 깜빡였다.

봄날 어느 까페의 따스함은 기억속의 편린이었다.

진호는 다시 18살의 고등학교 입시생으로 돌아왔다.

아직 늦가을이었다.

14살의 진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18살의 진호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언젠가 어린 시절을 다시 그리워할 날이 올 것을. 현재 나이의 두 배가 되는 날에, 지금의 순간으로 돌아오고 싶을 것을, 천천히 이해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열었지만 아무런 메세지도 없었다. 진호는 눈물을 닦아내고 바위에서 일어났다.


그는 호숫가를 산책하고 있었고,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물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낙엽이 잔물결에 침몰하는 것을 지켜보던 참이었다. 진호는 고등학생이 되어서 에이린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그녀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발길은 오래된 까페로 향했고 그곳에는 여전히 '선명한 햇살'이 자리잡고 있었다.




까페 안에 들어서자, 같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진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진호가 찾던 시호 누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커피머신도 이전과 달리 미국의 방식을 따라 자동화 되어있었다. 커피를 구운 냄새는 좀 더 독해졌고, 환기하지 못한 공기는 누적되어 매캐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저희 1시간 뒤에 마감하려고 해요."


진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두 사람이 앉던 자리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모든 책상과 세팅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들어온 것은 평야에 무수히 많이 세워지고 있는 빌딩의 축조와 철골이었다. 건물에 부착된 크레인 타워는 5초 정도를 주기로 계속 깜빡이고 있었고 그런 완성되지 않은 건물이 20개에서 30개 정도 보였다.


그곳에는 새의 형상을 하고 있는 오래된 유물과 달력이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올해까지 누군가 달력을 매달 갱신하는 수고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력은 8월에 멈춰있었다. 그 해 서늘한 여름, 8월 달력의 풍경은 오키나와의 코우리 대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진호는 단지 인쇄되었을 뿐인 풍경을 지긋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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