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한 여름 밤의 꿈
입시 결과 발표 당일날이었다.
진호는 입시 학원에서 나와 호숫가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희수가 그를 멈춰세웠다.
"오늘은 어디가?"
진호는 아무말 없이 호수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우리 엄마 차 타고 갈래?"
진호는 고개를 젓고는 짧게 대답했다.
"오늘은 머리를 비우러가. 곧 면접 결과가 발표되거든."
진호는 발걸음을 다시 떼었다.
희수는 말이 없다가 멀어지는 진호에게 한 마디했다.
"야. 야 그냥 가냐? 좋겠다야. 나도 그 학교 지원하고 싶었는데."
진호는 허공에 손을 휘저어 인사할 뿐 더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릴적 친구에게 마음은 닫혔어도 티는 크게 내고 싶지 않은 진호였다.
이른 저녁이었다.
해는 이미 저물었지만 호수의 풍경은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진호는 호수 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둔덕에 올라 호수에 비친 달빛을 구경했다. 호수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바벨탑 철골의 일부가 그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신도시 옆에 신도시를 다시 짓는 중이었다. 시공사는 신신도시를 짓기 위해 천둥이 자주치던 고목과 주변 늪지대를 메워버렸다. 전통적으로 천벌 받을 짓을 서슴없이 하는데 이렇다할 분노가 하늘에서 들려오지 않았다. 갸냘픈 잠자리가 스르륵 진호의 귀를 스치며 날아다녔다. 무당벌레가 살 논이 사라지면 잠자리도 덩달아 사라지겠지. 우리의 욕심 때문에 이 광경도 추억도 돌아오지 않겠지. 그 생각 뿐이었다. 꿈 꾸었던 모든 순간은 한 여름 밤의 꿈이었다.
진호는 산잭로를 따라 발걸음을 흩으며 천천히 걸었다. 쓸려가는 낙엽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도 크게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걸음 한걸음, 움직일 때마다 가슴속 새겨진 일들을 되뇌었다. 그는 물결이 찰랑이는 모래톱 위 바위에 앉았다. 고등학생의 진호는 중학생의 자신이 꾸었던 꿈을 되돌이켜 보았다.
그는 교육원의 우등생 형 누나들과 갈등이 깊어지자 스스로 교육원을 그만두었다.
계속되는 괴롭힘과 멸시를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진호는 어머니에게 가서 자신의 심경을 고백했다. 진호의 어머니는 그가 공부로서 그 선배들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진호는 어머니가 추가로 보내주는 학원을 열심히 다니기로 했다.
진호는 눈을 한 번 더 질끔 감았다.
에이린과의 연애도 더 지속할 수 없었다. 모두가 입시를 위한 결정으로 힘들어 할 때, 진호는 에이린의 집에 들렀다. 에이린도 약속대로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집 안에서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문밖으로 들렸고, 에이린은 진호에게 문을 열어주기를 망설였다. 그녀의 손은 부르르 떨렸고, 도자기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에이린의 마음도 산산조각 났다. 그녀가 말했다.
"진호야.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다음에 와줄래?"
진호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에이린의 자부심은 무방비로 노출된 도자기처럼 깨져 으스러졌다. 고귀하지만 아주 깨지기 쉬운 형태였다. 창백하고 붉은 얼굴 위로 작은 눈물이 도르르 떨어졌다. 그녀는 진호에게 도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었고, 그것은 지나가버린 바람에 불과하게 되었다.
진호는 미안하다며 뒷걸음 쳤고, 에이린은 진호를 안아주었다.
"미안해. 너도 공부 때문에 힘든데."
진호도 답해주었다.
"괜찮아. 다음에는 정말로 집에서 커피를 만들어 주는거야."
에이린은 눈물을 흘리며 알겠다고만 답했다.
진호는 이후로 에이린과 쉽게 연락할 수 없었다.
우연히 입시학원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진호의 수상실적이 좋지 않아 특목고 진학이 불투명하게 되었다. 그때 에이린은 다시 진호를 안아주었다. 힘내라고 말해줄 뿐이었다. 그녀는 팔찌와 반지가 가득한 어머니의 손에 붙잡혀 멀리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진호는 학교에서 내신과 대회 준비를 병행했다.
무리한 나머지 눈에 혈액이 돌지 않아 눈앞의 광경이 흑백으로 바뀌기 일수였다. 그러나 학교와 선생님 그리고 주변 학생들은 그의 성적과 진학을 주제로 대화하는 일이 많았다. 다들 진호를 걸어다니는 성적표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린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진호에게 답장 한 번 주지 않았다. 진호는 매번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바람이 부는 동산 위로 올라갔다. 정상에 남긴 발자국의 개수가 늘어가니 도시는 점점 밝아지고, 근처 산은 깎여나가 사석(:Debris)이 흘러나왔다. 강 건너 마을 까지 펼쳐진 평야는 블록화(구획화)가 진행되었다. 반딧불이는 상류로 도망갔고 잠자리와 무당벌레는 점점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서늘한 강바람만이 변함없이 진호를 반겨주었다.
진호는 다시 선명한 햇살 까페로 돌아왔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는 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오랜 입시가 끝나가는 과정이었다. 진호의 어머니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합격이야 아들.수고했어.'
드디어.
진호의 어머니가 아들의 수험번호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먼저 결과를 알아냈고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유난이라면 유난이고, 호들갑이라면 호들갑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호는 짐을 놓고 까페 근처 피시방으로 달려가 결과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까페 2층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면서 진호는 혼자 중얼거렸다.
"다 끝났어.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떠나는거야."
진호는 유물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것은 닭일수도 있고 올빼미일수도 있었다. 아주 모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맑은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는 천진난만함이 오묘한 방식으로 청동에 새겨져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청동의 새는 그저 책상위에 올라앉아 한 소년의 투쟁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호가 식어버린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있을 때 구두굽 소리와 운동화 소리가 계단에서 들려왔다. 두 남녀가 티격태격 대화하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처음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계단을 올라온 사람은 희수였다. 희수는 진호와 눈을 마주쳤다. 희수는 어쩔 줄 몰라 계단마루에서 넘어오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진호가 여기있음에 떨떠름 했고 불편한 기색이었다. 다음으로 계단을 올라온 사람은 에이린이었다. 에이린은 놀랐다는 듯이 눈이 휘동그레해졌다. 4년만의 만남이었다. 인생 찰나의 시간동안 에이린은 많이 성숙했다. 그녀는 어릴적과 마찬가지로 태양 모양의 금목걸이를, 귀에는 눈물 모양의 은색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검은색 안경테, 붉은색의 니트와 갈색 버버리 코트. 진호는 그녀의 얼굴에서 억지로 눈을 떼야만 했다. 너무 많은 추억이 하나의 얼굴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진호는 희수를 노려보았다.
희수는 다급해서 손을 휘젓고 말을 많이 했다.
"너 옛날에 영린이랑 친했잖아. 나랑도 친해. 우리 어머니와 영린이 어머니가 친구야."
진호는 곰곰히 생각하다 답했다.
"그래. 희수야 다 이해할 수 있어. 이린아. 오랜만이야. 너도 입시 잘하고 있지? 대학교는 어디가게?"
에이린은 진호에게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창밖을 보다 달력을 보다가, 진호가 주문한 에스프레소를 보고는 생각 속에 깊게 잠겼다.
희수가 대신 말했다.
"어, 영린이는 오키나와 대학교에 가겠대. 거기가 따듯하고 좋다고 했어..."
그때 에이린이 희수에게 차분히 말했다.
"희수야. 자리 좀 비켜줄 수 있어? 우리 대화를 해야해."
희수는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보았다.
에이린은 이미 진호와 대화하기 위해 맞은 편에 앉았다. 그 때 아르바이트 생이 에스프레소와 물 주전자를 올려놓은 나무 도마를 들고 2층까지 올라와 에이린 앞에 내어놓았다.
"맛있게 드세요."
"네."
희수가 다시 물었다.
"영린아 우리 둘이 보내는 시간인데 왜 진호가 아니라 내가 자리를 비켜줘야해?"
그때 에이린이 차갑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어머니끼리 친한 사이지, 사귀는 사이가 아니잖아. 진호는 나와 사귀었던 사이야."
희수는 어릴적 느꼈던 질투를 다시금 맛보았다.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생각했다. '저녀석도 이린이를 좋아했구나. 이러다간 다시 친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공허한 진호의 표정을 보고는 에이린이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진호야. 입시는 잘 되가? 혹시 재수해야하는 상황이야?"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대학은 들어갔어. 좋은 대학이야."
에이린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너라면 잘 해낼 줄 알았어."
진호가 되물었다.
"너는? 여전히 커피에 애정이 있는거야?"
"커피."
에이린은 슬픈 눈으로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대학에 선발이 되었어. 조만간 오키나와로 떠나. 저 달력에 그려진 곳을 가게 될거야."
진호는 달력에 그려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얕은 바다 위로 다리도 서 있고 바위도 침식당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달력 프린트의 한계 때문일까, 노을진 바다의 붉고도 푸르스름한 빛이 바래 도드라지지 못했다. 아련한 추억회상을 머리에서 끄집어 내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였다.
에이린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오키나와에서는 커피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어. 대만과 지리가 가까워서 과일을 구하기도 쉬워."
진호는 에스프레소를 한 입 삼키고 물로 입안을 가셨다.
심장박동은 요동치고 목 안은 바싹 말라갔다.
"이린아.부모님은 잘 계셔?"
조용했다. 평야를 가로지르는 날카롭고 빠른 밤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침묵을 깨고자 했다.
에이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짠맛이 조금 느껴졌는지 물도 마시고 손수건으로 입을 닦았다.
그리고 숨을 고르고서야 말할 기분이 조금은 생긴 모양이었다.
"두 분은 이혼하셨어. 어머니는 사이비종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어.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살기로 결정했어. 재산 분할이 있었지만 커피 기구는 내가 가져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진호는 깜짝 놀랐지만 이내 납득했다. 그녀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경험은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편협한 사고를 기른다. 어린 시절의 불행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겠지만, 앞으로 평생 사람을 가려 사귀도록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아마 먼 미래에 어머니와 닮은 자신의 모습을 저주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족은...
진호가 말했다.
"이린아, 약속은 지켜야지. 집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를 마시게 해준다면서. 나중에 내가 오키나와로 가면 되는거야?"
에이린의 눈이 휘동그레해졌다. 진호에게 원망과 불신의 반응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너져가는 자연, 거스를 수 없는 일생의 시간표, 어린아이에게 붙었던 목표달성의 딱지가 그를 무너뜨리기는커녕 더 강하게 다져놓은 것이었다. 에이린이 여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올거야?"
진호가 답했다.
"그럼. 가야지."
에이린은 입술을 앙 다물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눈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눈가는 촉촉해진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넌 내가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은게 화나지 않아? 온갖 관심을 가지게 유혹해놓고 네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면서 너를 멀리했는데?"
진호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미소를 지었다.
"왜 싫겠어?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사람에게. 단지 너가 날 좋아해서 안아준건지, 미안해서 안아준건지는 궁금하네. 그리고 시호 누나는 어디에 있어?"
에이린은 한숨을 쉬었다.
"이 가게는 우리 부모님 가게였어. 아버지가 이혼 위자료를 감당 못해서 결국 팔아야만했지. 시호 누나도 더 이상 고용을 유지할 수 없었어."
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린이 진호의 손을 잡았다.
"나랑 같이가자."
진호의 눈도 휘동그레해졌다.
에이린은 모든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대학 입시를 다시 하기 힘들다면 이쪽으로 편입해 들어와. 오키나와에는 한국인도 많이 살고 있어. 오래전부터 한국 요리들도 들어와있다고 들었어. 된장국도 백김치도 한국의 것과 같아. 같이가자."
진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단지 에이린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방금 인생에 가장 큰 목표를 이루었는데, 그의 뮤즈는 좀 더 먼 목적지로 가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호는 학업에 너무 열중한 탓에 그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를 잘 몰랐다. 대학생이 되면 번식기가 되어 짝짓기를 하고 나무에 떨어져 죽는 매미같은 인생을 살 줄로만 알았다. 조사를 더 하고 여유롭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진호는 오랫동안 고민을 하다가 입을 뗐다.
"오키나와는 잘 모르겠어. 놀러갈게. 방학이 오면."
에이린은 진호의 손을 더 세게 잡으며 소리쳤다.
"그걸로는 부족해!"
거친 숨소리 이외에 바람이 기어들어오는 소리만이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에이린은 허리에 힘을 풀고 기대앉았다. 마치 인생의 한 부분을 반복하여 영원히 살아가는 페레그린 마녀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그의 작은 선택을 바꾸어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진호는 덤덤했다.
"난 대학 입학 이후의 삶을 계획하고 꿈꿔본 적이 없어. 어려운 선택을 하려면 앞으로 시간이 좀 더 필요할거야."
에이린은 태연하게 답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나중에 연락하더라도 날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작은 손떨림을 숨길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진호가 과감한 선택을 하길 바랐다. 영화속에 드라마 속에 바보같은 주인공처럼.
진호는 잔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 더 이상 에이린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없었다.
"봄에 놀러갈게."
"알았어. 이리와."
에이린은 진호와 다시 한 번 포옹했다.
진호는 아마도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두 남녀의 포옹이었다.
사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바쁜 대학생활 속에서 진호는 차차 그녀를 잊고 다른 주변의 이성 친구에게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진호는 에이린에게 말했다.
"대학 합격 축하해."
"너도 축해해."
진호는 커피잔을 2층에 두고 까페에서 황급히 걸어 나왔다.
창문을 힐끗힐끗 보며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실루엣은 찾아볼 수 없었고, 가족 파티를 열고 대학에 입학하고 이사하며 서서히 그날의 일을 잊고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