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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 그라운드 ( Coffee Ground )

3. 오리지날리티

by 달율밤


그 시절, 2000년대 초반.


국가에서는 정보통신망 발달에 기여할 공학 인재들을 배출하고자 노력한다. 정부는 교육진흥법에 기초해 영재교육원이라는 제도를 설립했고, 진호는 주중에는 소현과 학원을, 주말에는 희수와 교육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교육원에는 에이린도 있었다.


에이린은 하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생머리와 또렷한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겨울이면 붉은 계열의 숄과 베이직한 코트를 즐겨 입었고, 그녀의 목도리 사이로 반짝이던 태양 문양의 목걸이는 진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여름에는 하얀 드레스에 빨간 구두를 신고, 긴 은빛 귀걸이를 살랑이며 걸었다.


에이린은 수업이 끝나면 항상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2잔 뽑았다. 두 캔 중 하나는 코카콜라를 먹기 위해 동전 을 넣으려던 진호에게 건넸다. 진호는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응수했다.

"콜라보다는 커피가 좋아."


진호는 500원을 자판기에 넣고 콜라 버튼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에이린은 반환 레버를 당기고 커피 캔과 500원을 내밀었다. 에이린의 왼손 손가락 마디에는 캔커피 두 개가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진호는 콜라를 먹고 싶어 필사적으로 커피를 거부했다.

"나는 커피가 맛이 없어, 영인아."

하지만 커피를 사랑하던 그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너가 커피 맛을 몰라서 그래."

에이린은 고양이 같은 얼굴을 내밀고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부드럽고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게 해줄게."


진호는 뒤엉켜버린 기억속에서 혼미해졌다. 그녀의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과 입술이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금 기억속에서 에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호야 언젠가... 나와 함께 찻집을 열어보는 건 어때?"

"좋아."


순간 초록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가 망상으로 가득찬 진호의 머릿속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채로 꿈을 꾸었던 것이다.


그가 정신을 차리자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수업이 끝났다. 진호는 결국 마지막 문제 풀이를 받아적는데 실패했다. 학원 선생님은 일찍이 교무실로 들어갔고, 대학생 알바가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리다 들어와 칠판을 깨끗히 정리했다. 진호의 등 뒤는 땀으로 흥건했고 뜨거운 숨을 쉬고 있었다. 희수는 그의 열정을 보고 한 마디 툭 던지듯 손수건을 건넸다.

"이 새끼, 열정이 보통이 아니네."

진호는 아직 상상에 넋이 사로잡혀 있었기에 희수에게 대충 미소지으며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몇 가지 가정을 하며 상상을 이어나갔다.


'에이린은 지금 어디 있을까?'

진호는 그녀의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3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수업내내 에이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고민이 되어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일본에 있는 대학으로 떠나 영영 볼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 희수는 어머니 차를 타고 먼저 귀가했다. 진호와 소현은 오랜만에 이른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소현이의 손이 갈비탕 집을 향했다. 두 사람이 자주 먹던 의미 있는 음식이었다. 갈비탕 두 그릇을 시키고 두 사람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한 끼 먹고 낮잠만 자도 성장하는 청소년에게 3년의 공백은 너무나 컸다.


소현이가 갑자기 미소 지었다.

“진호. 너는 나이를 먹질 않냐.”

“내가 변한 점이 없나?”


소현은 진호가 스스로의 모습을 잘 모른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목소리만 두꺼워졌지, 기억 속 얼굴 그대로야.”

진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여과 없이 말했다.

“물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피부에 좋잖아.”

“...”

침묵이 길어지자 진호는 뒷말을 목 뒤로 삼켰다.



소현은 그를 예전 같은 소꿉친구로 생각하고 있을까. 소꿉친구라 해도 진호와 소현은 모래성 쌓기나 역할 놀이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하얀 벽에 페인트 냄새 풀풀 풍기는 곳. 앳된 초 중학생의 비릿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곳. 밖은 매연이 지배하고 안은 분필가루로 가득했던 곳이 바로 두 사람의 추억의 장소였다. 맞벌이 하던 두 사람의 부모들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안심하고 아이들을 교육할 학원을 찾았다. 다행히 동네 수학학원에서 아침에서 밤까지 두 사람을 붙잡고 교육할 수 있었고, 한 때 소현과 진호는 가족보다 서로를 의지하던 사이였다. 하지만 도시락 반찬을 바꿔먹으며 하루, 하루를 따분할 새 없이 뛰어놀던 그 때 두 아이가 지금 성인식을 앞둔 두 남녀와 같을까.


진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수현, 대학가면 뭐할 거야?”

“일단,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어.”

“연애?”

“응.”

“어떤 연애를 하고 싶은데?”

“추운 겨울에도 손발이 시리지 않을 그런 연애를 할 꺼다.”

진호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진호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혼자 산책을 했다.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파란 유리창이 색을 잃자 회색도시를 비추는 빛은 신호등과 전기 간판뿐이었다. 소현의 변신은 진호의 철학과 대척점에 서 있었다. 소현은 자연스러운 자신을 점차 버리고, 새로운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했다. 진호는 속으로 소현에게 되뇌였다.


'너는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어. 왜 어설프게 변해가는 거야.'


진호는 진솔한 이야기를 겉으로 꺼내놓을 수 없었다. 그녀가 상처받을까봐 이기도 하지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오리지날리티를 향한 그의 사랑을 무어라고 말해야 좋을까. 세상에는 날 것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수정하거나 버리면 부작용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소현의 변신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자신만의 캐릭터를 상실해가는 과정이었다. 진호는 그녀가 진정한 자신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에이린 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바라고 또 확신했다.




아, 오리지날리티!


다시 2000년 대 즈음.

진호는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곳에서 자라왔는데, 도시와 자연의 경계가 아주 명확했다. 부모님은 진호가 주3회 수학 학원만 잘 다닌다면 크게 나무라거나 컨트롤 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그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짧은 학원 시간이 끝나면 그는 자유였다. 집 앞에 4차선 도로를 육교로 넘어가면 가신호를 보내는 점멸신호등이 여럿 보이고 그 뒤로는 관리되지 않은 자연이 펼쳐졌다. 진호는 산에 올라가 별을 보고 옆 내천으로 가 물길 속에서 놀고, 도시로 돌아가 오락실에서 게임하고, 논밭으로 들어가 잠자리와 귀뚜라미를 잡고 놀았다. 그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살면서 자연을 관찰하는 일에 두각을 나타냈다.


학원에서 소현과 놀았는데, 소현은 수학에 재능이 있었고 진호와 수학 문제 대결을 하는 것을 즐겼다. 수학과 과학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은 덕분에 진호는 언젠가 훌륭한 과학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학교는 그의 열정을 인정했다. 당시에는 토요일에 등교를 했는데, 토요일 하루를 통채로 교육원 수업으로 채울 수 있었다. 당시 개념이 생소했던 교육원을 허락해준 것은 학교 재량이었으므로, 아주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진호, 희수, 에이린 그리고 진혁은 같은 교육원을 다녔다. 진호가 찾던 삶이 거기 있었다. 너무나 행복했다. 라디오 키트를 한 번쯤은 조립해본 친구. 과학사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친구. 시키지도 않은 주기율표 암기를 해본 친구. 그런 과학꿈나무들이 한가득 있었다.


어느 겨울, 진호는 교육원이 위치한 대학의 교수님들과 함께 눈 덮인 교육원 앞 언덕에서 썰매를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해가 기울 무렵, 그는 귀가 하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귀가 버스에 사람은 많이 없었고, 빨간 목도리를 한 여자 아이가 하나 있었다. 에이린이었다. 에이린은 버스 정류장 끝 쪽에 홀로 석양을 보며 서 있었다. 버스 정류장은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끝에서는 산 아래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에이린은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담아 마시고 있었다. 진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이린이 진호의 발걸음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건넸다.

"난 노을이 좋아. 너는?"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에이린은 발걸음 소리 만으로 누가 다가오는지를 알 수 있었다.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싶을 정도였다. 진호는 잠시 주춤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답변할 때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나도 좋아해."


두 사람은 산 마루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아래로 흐르는 것을 보았다. 소나무가 천천히 흔들렸다. 사철나무가 느낄 정도로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그러나 에이린의 눈은 건조하고 날카로운 겨울 바람 앞에서도 촉촉했다. 눈가에 고여있는 물은 또르르 눈물이 되어 무너질랑 말랑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녀가 진호에게 다시 물었다.


"왜 좋아해?"


진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 눈에는 세상이 아름다워 보여."


에이린은 진호의 대담한 말에 어쩔 줄 몰라하며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려고 애썼다. 그러나 곧 마음을 추스리고 노을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눈빛은 하얀 피부만큼 차가웠다. 에이린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마지막 촛불이 타는 것 같아."


진호는 그녀의 대답에 당황했다. '곧 영인이가 죽나?' 그 생각에 어쩔 줄 몰라했다. 햇빛이 내리쬐는 그녀 품 안의 금빛 목걸이가 찬란하게 빛났다. 방사형의 금 목걸이는 햇살을 삼키고 주황 빛깔로 물들었다. 에이린은 주머니 속에서 약을 꺼내 입에 넣고 삼켰다. 그것은 아마 진정제나 안정제일 터였다. 그리고 뒤이어 마신 것은 약 복용 후 의사나 부모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커피였다. 입 가심을 마친 에이린이 다시 말했다.


"난 추위가 싫어.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하거든. 가끔 스트레스를 받으면 화장실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이 돼. 어느날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 '너는 죽음이란 녀석에게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 놈을 친구처럼 대해라.' 라고... 그래서 항상 하루가 끝날 때면 내 삶도 오늘이 마지막이 아닐까 고민하게 돼."


진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에이린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머니 몰래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어. 내 몸이 살아나는 느낌을 주는거야."

진호가 깜짝 놀라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 안 되잖아."

에이린은 고개를 가볍게 두 번 저었다.

"삶과 에너지를 주는데 안 마실 이유가 없지."



두 사람은 버스에 타면서도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에이린은 자신을 영인이라고 부르지 말고 에이린이라고 불러달라고 진호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진호를 집에 초대했다. 한국에는 아직 없는 다양한 커피와 바리에이션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진호는 호기심에 반드시 가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두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목전에 왔음에도 지켜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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