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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 그라운드
( Coffee Ground )

2. 이야기의 본질

by 달율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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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본질


이야기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도록 진호는 커피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쓰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책에 담으려면 매력적이고 강력한 글솜씨가 필요했다. 이 세상을 비추는 커다란 거울은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진호는 생각했다. '우리의 거울은 세상을 온전히 비추기에 너무 작다...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려 할 때 가슴이 아리고 답답한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좁은 거울 속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지난 날이 보이지 않는다...'


진호는 까페 2층 창가에 앉아 아까 사진을 찍었던 광장을 둘러보았다. 주문했던 커피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창가에는 커피의 입김이 닿아 풍경은 점점 흐릿해졌다. 진호는 커피로 입을 적신 뒤 다시 고민했다. '그렇다면 좋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그 답은 상상력에 있다. 이야기를 완성시키려면 기억에서 사라진 부분을 상상력으로 메꿔야 한다...'


"그렇다면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진호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TV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교수들이 만담을 나누며 과학 이야기를 하는 TV 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뇌과학의 권위자이자 대학교 교수인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창의성은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연결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상상은 뜨개질과도 같아요."
"아, 그렇습니까?" "뜨개질이요?"

교수는 큰 숨을 들이신 뒤 설명했다.

"서로 관계없는 두 날실을 어떻게 엮어낼 것인가? 어떤 패턴을 옷감에 나타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랑 똑같습니다. 뜨개질을 잘 하려면 또 어떻게 해야하나요?"

패널이 대답했다.
"그야, 영상을 열심히 보면 되겠죠?"

"그렇습니다. 뜨개질의 고수에게 착 달라붙어 비법을 전수받는 것이 빠르겠지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을 모방하고 복제한다.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까닭에 새로운 방식이 탄생합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상상력은 모방 능력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창의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친구로 삼고 곁에 두면 된다!"

진호는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정 교수님."
이야기의 본질도 바로 '깊은 모방'에 있었다. 그리고 진호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커피 소녀'는 모방의 대상이었다. 그녀는 고귀하고 독특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는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담으려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재구성 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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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가 간직한 커피 이야기는 SNS가 세상에 나오기도 전의 일이니까,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그는 이 이야기가 경험이 아닌 상상력으로 왜곡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상상의 노스탤지아 너머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단풍놀이 시기가 성큼 한 발 앞으로 다가온 가을이었다. 학원가에서 가을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풍채는 단풍만큼 화려하지 못했다. 진호도 사람다운 차림새 이상을 갖추지 못했다. 항상 그랬듯 줄무늬 상의, 청바지 그리고 검은 코트를 입었다. 진호는 길을 걸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가을 향기가 진호의 콧속을 스몄다. 실질적으로 점수가 반영되는 모든 내신은 끝나서였을까. 입시 학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홀가분했다. 1층에서 들려오는 신규 폴더폰의 광고 음악, 지하 PC방에서 스며나오는 담배 냄새조차 진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뒤, 진호는 넓고 비좁은 강의실에 들어섰다. 먼저 도착한 전국 각지 수험생으로 앞자리는 만석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뒷자리 좌석에 앉고 친구를 위해서 옆 자리에 가방을 올려두었다. 곧 도착할 친구 희수는 진호의 오랜 친구였다.


그런데 필통을 열고 손목운동을 하려던 찰나에 그의 가방이 밑으로 내려갔다. 모르는 여자아이가 가방을 내리고 진호가 맡아둔 자리에 앉았다. 상대방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오랜만이야. 호.”

나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 진호는 목소리의 주인이 과연 누굴까 궁금했다. 기억을 더듬다 가닥을 하나 잡았다. 한 소녀의 부드러운 볼 살과 오뚝한 코가 기억났다. 그녀도 기억 속 소녀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진호가 대답했다.

“소현이구나. 그치?”

진호는 상대방이 소현인지 아닌지 다시 한 번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이소현은 유진호의 고향친구였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두 사람은 3년간 서로를 보지 못했다. 진호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왜 그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나 자책했다.


소현은 어릴적부터 볼이 자주 빨갛게 달아올랐다. 반면에 밖에서 뛰어노는 일이 많아 피부는 타 까무잡잡 했다. 그 두꺼운 색을 뚫고 볼 위로 홍조가 떠오르면 바보같다고 놀리는 남자애들이 있었다. 초등학생 진호는 속상해하는 그녀의 뺨에 손을 올리고 따듯해서 좋다고 말해주었다. 커다란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 그리고 과거에 즐겨했던 동그랗고 차분한 보브 단발. 군살 없이 동그랗던 몸매. 소현이는 항상 편안했다. 모진 곳 없이 둥글고 귀여웠다. 얼핏 게슴츠레하게 보일 수 있는 민눈빛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완성했었다.


소현은 조심스럽게 얇은 니트로 짜여진 후드 코트를 정리했다. 진호는 추억에 빠져 아무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이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서 용기 내어 몇 마디 더 던졌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응. 못 알아봐서 미안해."

그녀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 물었다.

“조금 바뀐 데가 있지 않아?”


소현은 어릴적부터 자신의 까무잡잡한 피부를 싫어했었다. 현재 그녀는 BB크림으로 하얗게 칠하고서 진호 앞에 나타났다. 바뀐 곳은 하나 더 있었다. 소현이 쌍꺼풀 수술을 한 것이다. 진호는 그녀가 본인의 밋밋한 눈을 싫어했음을 기억했다. 과거에 진호가 수현에게 ‘너의 눈매는 매력적이야.’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진호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질문을 해주었다.

“붓기가 가라앉는 중이야?”

소현은 그제서야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응. 수술한지 얼마 안됐어.”

“이쁘게 될 거야. 분명.”


곧이어 진호의 친구, 희수가 가까스로 옆 자리에 앉았다. 그는 헐떡이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업에 희수는 필기노트에 ‘누구?’라고 적어서 옆으로 밀었다. 진호는 ‘옛날친구’라고 적고 종이를 되밀었다. 그리고 서둘러 가방에서 인스턴트 커피 2개를 꺼내 소현과 희수에게 나누어주었다. 소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럼 그렇지. 커피보이."

희수는 커피를 받자마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진호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캔커피를 조금씩 마시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구들을 회유하기 위해 캔커피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친구의 부모님들은 커피가 성장 중인 청소년에게 얼마나 유해한가 갑론을박 했고 아이들을 나무랐다. 진호의 부모님은 특히 주변 아이들에게 유해한 문화를 전파하는 진호를 크게 혼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밤샘 공부가 계속되자, 부모님은 혼내기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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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강사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바로 숙제 문제 풀이부터 들어갔다.


진호는 문제를 푸는 것보다 문제를 만드는 일이 더 흥미로웠다. 어떻게 행렬을 이용해 타원의 접선을 구할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아이디어를 문제집에 넣을 생각을 했는지. 그러나 강사는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풀이법이 유용하다고 할 뿐이었다. 이런 풀이방법이 교과과정에 나올 턱이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받아 적고 보기로 했다. 고통을 참고 삼키면 새 세상이 열릴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모방만이 지금 한 단계 앞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문제 풀이를 달달 암기한다면 수학적 사고라는 근원적인 정답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모방의 한계였다.


모방!


그 당시의 진호도 '모방'에 대해 무언가 생각이 많았다. 진호가 커피 중독자가 된 데에는 한 소녀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었다. 진호의 커피 애호 행위는 그녀의 모방에 불과했다. 그녀야말로 커피의 여신, 세상에 커피를 전해주기 위해 강림한 천사였다. 커피 소녀는 스스로의 존재에 질문을 던지고 인생에서 풀어야 할 숙제를 만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함과 동시에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지적이었다. 언제나 찾아온 이들에게 사랑과 커피를 나누어주었다.


그녀의 이름은 목영인(木榮燐).

그러나 진호는 그녀의 본명인 고바야시(小林) 에이린(榮燐)을 더 좋아했다.
에이린, 그녀는 일본에서 온 특별한 소녀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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