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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커피 그라운드
( Coffee Ground )

1. 작고 소중한 기억

by 달율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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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고 남은 커피 찌거기는 버려진다.

커피를 마신 시간도 함께 사라진다.



커피는 영감의 원천이다.

나른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은 게으른 인간의 마음에 맥놀이를 일으킨다. 베토벤은 커피를 끓일 때 항상 커피 원두 60개를 세어 넣었다고 전해진다. 바흐가 “모닝커피가 없다면 나는 그저 말린 염소 고기에 그친다.” 라고 말한 사실은 유명하다. 천재 음악가 뿐만이 아니라 천재 작가들도 커피 찬양에 한 몫 거든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는 선율처럼 따듯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며 바흐보다 다소 미사여구를 둘러 말했다.


하지만 투 샷의 아메리카노, 보통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만들 때 버려지는 커피콩 찌꺼기, 일명 커피 그라운드(Coffee Ground)는 15g 정도다. 대한민국에서 1인당 연간 512잔의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어림셈을 해보자. 39만 7000톤 정도의 커피 그라운드가 대한민국 까페와 가정에서 흘러나온다.

사실 찌꺼기는 가루 형태니까, 쏟아져 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커피 그라운드를 일반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린다. 그러나 오일을 넣어 미용에 사용할 수도 있고, 건조하여 숯처럼 여과에 사용할 수도 있다. 비료 대신 화분에 공급해준다면 영양 과다나 그 반대를 예방할 수도 있다. 모래 또는 에탄올과 섞어서 바이오 원료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쓰레기처럼 소각되면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는 유해가스를 내뿜게 된다. 우리의 일상이 남긴 흔적이 상처가 되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무심코 버려지는 우리 삶의 일부를 돌아보자. 시간이든 물건이든 우리와 함께 했던 모든 것을 눈여겨보자.


여기, 진호라는 남자가 광장에 섰다.

진호는 과거의 기록을 헤집고 다니고 있다. 과거에 만났던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장소와 물건이 있었다. 진호가 애용하는 까페로 향하던 길이었다. 멈춰서 둘러보니 사람들이 많았다. 주말에 공원으로 나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찍힌 사진을 찍어보리라 다짐했었다.


찰칵.


사진을 줌 하여 드래그 해보았다.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는 연인, 과제하랴 운동하랴 진땀 빼는 학생, 무엇으로 기사를 쓸지 잘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기자, 캐리커쳐를 그려주는 사람, 오랜 친구가 찾아온 동네사람이 하나의 네모에 담겼다. 그가 사진기를 거두고 얼마 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던 한 아이가 나자빠졌다. 아이는 달려온 부모에게 투덜댔다. '오늘 같이 사람이 많은 날, 굳이 공원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야 했나요' 라고... 진호가 눈을 감자 그 아이가 미래에 그리워할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는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커피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반대로 커피 그라운드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혹시 커피보다는 까페에서 친구와 나누었던 숱한 이야기가 소중하지는 않은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잠깐의 여유가 소중하지는 않았는지. 소중하다면 커피 그라운드처럼 버려지는 하루의 청춘이 가치를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진호는 사진에 담긴 어느 한 명에게라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물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푸른 하늘, 떠다니는 구름의 그림자가 보일정도로 먼 정지궤도 위에, 우주 정거장에서 지구의 야경을 바라본다. 관찰자에게 다가가서 물어본다. '지금 숨이 멎을 것 같나요?' 모두가 거룩한 경험 앞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최초로 둥근 지구를 목격한 소련의 유리 가가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푸르고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리 가가린은 자신이 보았던 아름다운 장면을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조국의 로켓기술의 도약보다 더 중요했던 순간. 당장에는 해프닝으로 치부되겠지만, 그 아름다운 파편의 기억이 인생과 역사를 전환하는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커피에 대한 어떤 추억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건은 중요했다. 그는 서둘러 근처 까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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