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이별했다.
왜 헤어졌는지,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얘기는 줄이도록 하겠다. 프랑스에서 살았던 내가 스페인에서 살고 있던 그녀를 우연히 만난 것도, 해외의 온갖 아름다운 여행지들을 함께 돌아다녔던 것도, 우리만의 특별한 추억들을 한참 늘어놓는다 한들 이런 결과를 맞이한 건 결국 뻔하디 뻔한 러브 스토리 중 하나였다는 걸 테니까. 그냥 그렇게 됐다, 정도가 이별의 이유라고 생각해 주었음 한다.
언제나 이별은 쉽지가 않다. 상처가 나은 뒤 붙어있는 반창고 하나 떼어내는 것도 따끔한 느낌이 들곤 하는데, 내 삶에 엉겨 붙어있던 인연을 떼어내는 행위가 어떻게 고통을 수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저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라면 피부가 더 연하다는 것과, 엄살이 심하다는 게 이 이별의 고통을 더욱 실감 나게 표현하는 것뿐이겠지.
여러 번의 연애와 이별을 거치며 나라는 사람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지금까지의 난 실패에도 늘 주저앉지 않고, 힘든 시련이 와도 그저 버티고 또 버티어 결국엔 그것을 정복해 내고야 마는, 그저 그 방식만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과도한 긍정적 믿음과 근본이 뚜렷하지 않은 희망, 고집 센 의욕'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래도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 본 상대라 그럴까? 아니면 어떤 시련을 마주함에 있어, 근거 없는 긍정감을 그저 쌓기만 하다 결국 논리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스스로가 이겨내고 있다는 걸 하필 이제 와서야 깨달았기 때문일까? 늘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나는 괜찮다던 스스로의 다독임은, 어느샌가 방관자의 입장으로 바뀌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근원을 찾으려 하기보단 의미 없이 '괜찮아,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말만 되뇌는 일종의 자동응답기가 되어있었다.
허리까지 차오른 유속이 빠른 강 한가운데 서서 아무리 괜찮다고 외친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괜찮다고 여겨줄까? 지금 내가 딱 그러고 있는 꼴이었다. 남들은 나보고 괜찮냐고 계속 물어보는데, 정작 나 스스로만 본인을 이해해주지 못해서 혼자만 괜찮다며 끙끙 앓고 버텨내고 있는 모습이.
인생에서 처음 느껴보는 무기력함. 이전과 같은 방식을 채택한다면 분명 나는 또 어느샌가 이 시련을 극복하고 이겨낼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그게 정말로 맞는 방식인가? 비록 이번에도 역시 이 이별을 '이겨내기만' 한들 바뀌는 게 뭐지? 이전과 같은 일상을 되찾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일까?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상처 주면서 겪은 이별을 '이겨내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렇게 해서 되찾은 일상에 과연 내 자아성찰은 존재할까.
나는 무너지고 있다. 늘 이기는 것만이 마지막에 남는 것이라고 느꼈던 나는, 나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 다시 달려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멈추고 그냥 무너져 보기로 했다. 근데 이 기분,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내가 무너지고 있는 게 느껴지는데도, 막상 그래보니 지금까지 겁내왔던 느낌이랑은 좀 다르네. 늘 남들 시선을 신경 쓰며 그들보다 뒤처지는 것이 내 삶에 있어 가장 기피하는 것이었는데 말이야.
이십대 후반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 이 정도 됐으면 연애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는 알량한 어른의 허물을 벗어던지기로 했다. 솔직하게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괜찮지 않다면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돼. 무너지면 다시 쌓으면 된다. 못 이겨내겠으면 그냥 그대로 져보기도 하자. 강의 유속이 너무 세다면, 이번 한 번쯤은 그것이 흘러가는 대로 한번 내 몸도 같이 흘려보자. 그렇게 해서 내가 닿게 될 곳은 어디일까.
결국 내 천성이 그런 만큼 언젠가 난 다시 그것들을 쌓으려 일어나겠지. 다만 이번만큼은, 조금 더 길게 쉬자. 아니, 쉬는 것보다 아예 도망가버리는 거야.
그래. 떠나자. 나를 아무도 모르고, 찾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