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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쌀국수 한 그릇에 담긴다

세계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by 담아

6월의 어느 날, 묘하게 운이 좋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 매번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타던 전철은 그날따라 사람이 더 붐볐고, 하필 또 앞차와의 간격 조정으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할 뻔했으며, 비좁은 사람들 틈에서 누군가의 가방에 머리를 맞았던 날.


심지어 그것뿐이었나? 외근으로 인해 중간에 잠시 들렀던 쌀국숫집은 참 이상하게도 오직 내 주문만 누락이 된 데다 결국 20분이나 넘게 기다려 받은 음식에는 날파리가 한 마리 빠져있었던, 정말이지 재수 옴 붙었다고 할 수 있던 바로 그날.


얼마나 지치던 하루였는지, 퇴근 후 만난 연인에게 오늘 이런 안 좋은 일들만 가득했다고 조금은 어리광이 섞인 짜증을 내며 그 아이의 위로를 받았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다음에 더 좋은 일이 있으려나보다. 오늘도 고생 많았고, 정말 수고했어.'


분명 대부분이 나쁜 일투성이었던 하루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는 좋은 날로 기억이 남았던 날이다. 그 지친 하루를 위로해 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만으로 모든 게 풀렸었던 그 따뜻했던 날.




하지만 언제나 계절은 바뀐다. 그렇게 서로를 특별하다 여겼던 우리 역시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슬픈 이별을 겪게 되었고, 야속하게도 아픈 마음과는 달리 일상은 무미건조하게, 또 그대로 흘러갔다.


이별의 이유라 함은 보통 누구 하나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그럼에도 이번의 이별 사유중 뚜렷한 내 잘못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익숙함에 소중함을 잠시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너무 뻔하고 지루한 내용이라 적지 않으려 했으나, 이후의 얘기를 위해서 잠깐은 풀어나가야 할 것 같다.


똑 부러지면서도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일이 내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꽤나 스트레스를 느끼며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법한 일에도 금세 짜증이 나곤 했다. 이런 불같은 성격은 때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기도 했지만, 어쨌건 불은 불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조차 내 온도에 데어버릴 때가 많았고, 결국 떠나게 되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살아오며 뚜렷한 개성과 성격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는, 이 성격으로 사랑하는 사람조차 떠나가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으로 다가왔었고, 그로 인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내 성격의 일부를 고치기로 다짐한다.


그중 가장 핵심은, 일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도 쉽게 짜증과 화를 내기보단 '그래, 사람 살아가는 일에 그럴 수도 있는 거지'라는 생각을 가져보는 것과, 모든 사람은 다르다는 걸 한 발 더 깊게 이해하고 마음을 넓게 가지는 것. 물론 말이 쉬울 뿐 평생 동안 살아온 가치관이자 본성을 고쳐내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긴 하지만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고치려는 점에서 난 대단히 뿌듯함을 느꼈고, 또 조금씩이나마 차근차근 그것이 되어간다고 느껴질 때 성취감을 가졌다.




그렇게 이별 후 순조롭게 내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달래가던 날 중, 하루는 그 쌀국숫집을 다시 찾았다. 비록 위생도 별로인 데다 한번 주문이 누락된 경험도 있지만 맛만큼은 확실한 곳이기에, 더 솔직한 사실을 말하자면 대리라는 직책인 내가 사장님의 선택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았기에 다시 찾은 그 집.


그런데 그 말도 안 되는 장난질이 또 일어났다. 식당의 그 많은 사람들 중, 또 내 음식만 누락된 것. 중간에 가서 두 번이나 얘기를 했음에도 20분 정도 지연된 내 음식은 같이 방문한 사장님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에서야 나왔다. 직장인이 몰리는 점심시간이면 한 번은 그럴 수 있지. 비위가 약한 것도 아니라 날파리가 나온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주고 다시 방문을 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두 번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래, 음식이야 늦을 수 있어. 저번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다음번에 방문했을 때도 재수 없게 내 것만 또 누락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전에는 아무리 힘들고 지치던 날이어도 날 위로해 주던 네가 있었는데, 오늘은 대체 누가 날 위로해 주지?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누가 위로해 주지?


그 쌀국수가 마침내 나오는 순간, 어찌나 화가 나던지. 지금까지 이별 후 내 마음을 잘 컨트롤해 오던 나인데. 고작 이깟 쌀국수 하나가, 왜 잘 잊어가던 너를 또 떠오르게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거듭하며, 이젠 내가 삼키는 것이 정말 쌀국수인지 아니면 눈물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 뜨거운 음식을 차갑게 식어버린 내 안에 욱여넣었다. 그 한 그릇이 내게는 어찌나 짜증이 나고 서럽던지. 마음 같아선 펑펑 울고 싶은데 직장에선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지 얼마 안 된, 내 어른이라는 감투 속 아이가 얼마나 안쓰러웠다.


이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못난 점을 바꿔 나가야겠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각박한 시간들이 아니었구나. 오히려 나를 돌봐줘야 할 때였어. 쌀국수 하나 누락됐다고 이렇게 눈물 삼키는 나를, 쓰다듬어주어야 할 때였어.'




이십 대 후반이 되어버린 지금, 누군가에게 있어 힘든 것에 힘들다고 말하기도 점점 어려워지는 나의 사회적 나이. 다만 그것을 떠나서, 지금까지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겪었든 간에 언제나 내게 이별은 늘 힘들었다. 별 수 있나? 내가 뭔가를 잘해서 나이를 먹어간 것도 아닌 데다, 그저 가만히 있던 나를 시간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인데. 야속하게도 나의 성장과 시간의 흐름은 비례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한테 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혼자 버텨가기엔 더더욱 힘들었던 나. 이런 각박한 상황 속에 홀로 남겨진 안쓰러운 나를 위해, 적어도 나 스스로라도 내 편이 되어주자. 나만이 나와 같이 있어주고 얘기를 들어주자.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서, 온전히 스스로의 시간을 가져보는 거야.


여행을 떠나자. 모든 내 족쇄를 벗어던지고, 쉬고 싶은 만큼 쉬다 오자. 되도록 길게, 오랫동안.


그렇게 내 세계 여행의 다짐은, 이별의 슬픔을 마주한 쌀국수 한 그릇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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