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계약서는 나를 다시 꿈꾸게 했다. 늦은 꿈은 없다고 북돋웠다. 어렵다는 출판 계약까지 해낸 마당에 앞으로 더 나아가는 게 어떠냐고 속삭였다. 이참에 깊숙이 숨겨뒀던 어릴 적 꿈도 한 번 이뤄보는 게 어떠냐고 속삭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래, 못 할 게 뭐 있어. 한 번 해보자.
기자라는 직업을 꿈꾸기 전, 나는 다른 꿈을 그렸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게 좋았고, 누군가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도 좋았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이유로 진로를 바꾸고 이뤘지만, 내내 응어리처럼 남아있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책 원고를 쓰면서 그 길이 보였다. 책 내레이터 혹은 오디오 크리에이터. 해야 할 이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하고 싶었다. 간절함이었다.
첫날은 의지가 타올랐다. 시작만 하면 뭔가 될 거 같았달까. 이 야심 찬 계획을 담당 편집장과 가족들에게 펼쳐 보였다. 새로운 도전에 아낌없는 응원을 받고 있자니 벌써 이룬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는 할 수 있다! 자기 암시 글을 다이어리에 빼곡히 채웠다. 실행만이 남았다.
이튿날은 시장 분석에 들어갔다. 경쟁자도 찾아 나섰다. 단순히 꿈을 이루는 데 그치지 않고 인정도 받고 싶었다. 그래, 역시 잘하네. 내심 이런 반응도 기대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좋잖아! 책 낭독 유튜브, 오디오북, 팟캐스트 등 이쪽 시장을 선점한 이들보다 무조건 잘하고 싶었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어, 하다가 한편으로는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뜨거웠던 가슴이 급속히 서늘해졌다.
사흘째 되는 날. 현실 자각 타임에 빠졌다. 발성, 호흡, 문장 읽기, 학창 시절 내내 배웠지만, 20년 가까이 써먹을 일이 없었다. 고작 그때 배운 것만 믿고 덜컥 시작했다가 망신만 당하진 않을까, 겁이 났다. 기계치에 가까울 정도로 기계, 컴퓨터 프로그램 다루기 어려워하는데, 혼자서 녹음과 편집, 업로드까지 해낼 자신이 없었다.
계획은 세웠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실천하지 못할 이유만 찾았다. 시작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한 작은 시도만 하다 말아놓고 당장 눈에 띄는 결과가 없다고 실망했다. 이왕이면 잘하고 싶어서 제대로 준비를 마칠 날만 기다렸다. 완벽한 때를 기다렸다. 어느 날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다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고 불안에 휩싸이기도 했다. 지난 1년 동안, 작심삼일을 수십 번 반복했다. 맞다. 나는 전형적인 게으른 완벽주의자였다.
“실패 이력서인 줄 알았는데 ‘내가 시도했던 이력서’에 더 가까웠어요.”
가수이자 변호사인 이소은이 한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이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실패의 흔적을 이력서로 남긴다? 합격과 불합격 사이에서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그녀는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실패를 경험하기까지의 과정을 귀하게 여기기로 선택했다. 발상의 전환. 그녀의 이야기가 용기가 됐다.
어디에 내놓기 부끄러운 고백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작심삼일로 끝날 뻔한 실패기에 가깝다. 하지만 ‘도전기’라고 이름 붙였다.
사흘마다 포기하지만, 또 사흘마다 꿈을 꾼다. 사흘마다 뜬구름 잡는 계획을 세우다가 수정하고, 또 사흘마다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실패 자체를 두려워하던 게으른 완벽주의자가 좌절하고 내려놓으면서 기어이 해낼 힘을 기르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더딘 한 발이라도 내딛으려고 지금도 내 안의 게으른 완벽주의자와 싸우고 있는 나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기로 했다. 실패를 당연히 여기고 기록하고자 했다. 실패는 교훈이라는 흔적을 남기니까. 작심삼일이 어때서! 딱 100번만 해보자! 백 번의 작심삼일 후에 나는 아마도 꿈에 한 발 더 다가서 있을 것이다.
더딘 발걸음이지만, 나는 지금도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