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곳에 있어 줘서 고마워”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있다는 건

by 김명교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과 감정을 읽어주는 사람.

나를 너무나 잘 알아서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오해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바라봐주는 사람.

견딜 수 없이 버거울 땐, 체면 없이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

위태로운 순간 귀신같이 알고 잘 사냐, 무심하게 안부를 건네는 사람.

누가 뭐라 하든 무조건 내 편인 사람.

수개월 만에 만났는데도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일상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



코로나의 확산세가 잦아들던 얼마 전,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에 만나 내 인생의 절반 가까이 함께했다. 다름을 인정하고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덕분에 더 끈끈해졌다고 믿는다. 다 같이 만나면 더 좋겠지만, 아쉬운 대로 한 녀석과 약속을 잡았다.



사람이 적은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구석에 앉아 들깨 수제비, 해물파전,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요즘 근황과 고민, 회사 이야기가 오간 끝에 우리가 ‘젊은 꼰대’라는 결론에 가닿았다. ‘요즘 신입이 그렇단 말이야?’ ‘선배한테 그런 말을 한다고?’ 언제나 20대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90년대생이 몰려온 지금, 이미 기성세대가 돼버렸음을 깨달았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이야기는 다시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로 흘러갔다. 정제하지 않은 날 것의 언어로 떠오르는 대로 떠들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이 시간만큼은 회사에 소속된 직장인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그냥 ‘나’였다. 나의 20대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게 든든했다.



집에 가는 길,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일과 육아를 핑계로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이 미안했고, 그런데도 보고 싶다는 말에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게 고마웠다. 짧은 만남에 못내 아쉬워하는 나를 ‘또 만나면 되지!’라며 다독일 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취업과 결혼, 출산을 기점으로 인간관계에 변화가 찾아왔다. 취업하고선 일이 먼저였고, 결혼 후에는 가정을 우선했고, 아이를 낳고 나선 모든 게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오랫동안 이어졌던 인연이 끊어지기도 했고,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기도 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새롭게 경험하는 수많은 것들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충분히 많은 사람과 이어져 있었음에도 결정적인 순간, 떠오르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취업, 교통사고, 결혼, 출산…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이벤트를 함께 했다. 가식 떨지 않아도,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웃음과 눈물, 그 어떤 것도 받아주는 내 편. 나를 무장해제시키는 친구들이 문득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이 있음에, 참 다행이다.



마음 닿는 그곳에 있어 줘서, 늘 고마워.



오랜 친구들이 주는 축복 중의 하나는 당신이 그들과 함께일 때 바보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미국 철학자 에머슨>



*이 글은 조선뉴스프레스 온라인 매체 '마음건강 길(mindgil.com)'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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