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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Dec 05. 2020

다른 건 몰라도 ‘평냉’ 조기교육은 해야지

경험 대물림

첫인상은 낯설었다. 면에 물을 붓고 송송 썬 대파 조금, 고운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낸 모습에 잠시 얼어붙었다. 맛을 보니, 더 가관이었다. 고기향을 머금은 국물은 ‘고기로 우려낸 육수’라는 정체성만 알려줬다. 면을 한 젓가락 들어 올려 입속으로 넣었을 땐, 앞에 앉은 선배가 원망스러웠다. 삶은 메밀면의 맛과 식감,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심심한 음식을 즐겨도 이건 아니었다.



‘이걸 먹자고 택시까지 탔다고?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회사 근처 맛집을 두고 굳이 충무로까지 온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선배는 흔들리는 내 눈빛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더니, 큰소리로 ‘소주 한 병’을 외쳤다. ‘소맥파’인 나는 이날 혼자 소주 한 병을 비워냈다. 평양냉면과의 첫 만남이었다.      



다신 생각 안 날 줄 알았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고기를 담갔다 뺀 육수’, ‘무(無)맛에 가까운 음식’에 끌릴 줄은 몰랐다. 마음이 답답한 날, 기분전환이 필요한 날, 더운 날씨에 진이 쏙 빠진 날, 딱히 당기는 음식이 없는 날, 선선했던 바깥 공기가 차가워지는 날, 낮술이 당기는 날, 그리고 술 마신 다음 날….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평양냉면이 생각났다.      



“잘라 드릴까요?”      



종업원의 호의는 고맙지만, 정중하게 사양한다. 둘둘 말려있는 면을 풀어서 길면 긴 대로, 짧으면 또 짧은 대로 후룩 넘기는 게 좋다. 씹을 새 없이 넘어가 버리지만, 공들여 씹다 보면 메밀의 구수함이 배어 나온다. 냉면 육수의 맛은 첫 숟가락에 알아채기 어렵다.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시원함 뒤에 가려진 맑은 고깃국물의 깔끔함이 나타난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상태로 절반 정도 먹고 나선 면 위로 식초를 조금 흘려보내고 다시 젓가락을 든다. 국물이 조금 깊어진 느낌이다. 두세 젓가락 정도 남을 즈음이면 배가 부르지만, 국물을 남기지는 않는다. 돌아서면 생각나 종일 아쉽기 때문이다. 한때 평양냉면 붐이 일어 유명 인사들이 평양냉면 예찬론을 펼쳤다. ‘자고로 평양냉면은 이렇게 먹어야 한다’며 먹는 방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입맛 따라, 취향 따라 즐기면 그만이다.      



부부는 닮는다지만, 무엇보다 다행은 입맛이 닮은 점이다. 평양냉면 잘하기로 소문난 곳을 찾아다니면서 음식 칼럼니스트가 된 양,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입맛에 잘 맞는 곳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를 낳고, 한동안 외식을 할 수 없을 때 평양냉면이 그렇게나 그리웠다. (평양냉면은 식당에 가서 먹어야 더 맛있다) 여느 부모처럼 외식 메뉴를 고를 때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인지부터 고려했다. 평양냉면의 맛을 알기에는 마냥 아이가 어리다고만 여겼다. 얼른 자라서 이 맛을 함께 즐길 수 있길 바랐다. 그때까지는 맘껏 먹지 못해도 조금만 참아보자 했다. 그러다 ‘조기교육’이 떠올랐다.      



‘수학도, 영어도 조기교육을 하는데, 음식이라고 하지 말란 법 없잖아. 엄마, 아빠가 좋아하니까 너도 함께 즐기자.’      



그래서 우리는 ‘평양냉면 조기교육’을 시작했다. 지난해 5월 1일, 필동면옥에서 처음 평양냉면을 맛보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에 한껏 상기됐고, 이날은 세 식구가 처음으로 평양냉면을 즐긴 ‘역사적인 날’로 기록됐다. 다음 목표는 봉피양(본점). 아이 입맛엔 이곳이 더 잘 맞는 듯했다. 내 몫을 나눠 먹으려고 한 그릇만 주문했는데, 절반 이상을 빼앗겨(?) 버렸다. 식사를 마칠 무렵 아이는 아빠를 따라 무거운 유기그릇을 들고 육수를 들이켰다.      



평양냉면 한 그릇에는 많은 것이 담겼다. 업무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어느 날, 이야기를 들어주기 위해 평양냉면과 소주 한 잔을 사준 선배의 위로와 응원, 연인의 취향을 좇아 기꺼이 함께 냉면 투어에 나서준 남편의 공감과 배려, 여기에 우리 가족의 잊지 못할 ‘처음’이 소복이 쌓였다. 아이가 자라면서 평양냉면을 즐길 기회가 많아질수록 의미 있는 추억과 긍정적인 경험은 더해질 테다.      



살다 보면, 돌부리에 넘어지는 날이 있다. 누군가 곁에서 손을 잡아주면 좋겠지만,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순간이 온다. 그럴 땐 맛있는 음식만큼 힘이 되는 건 없다. 좋아하는 음식을 한 입 맛보고 나면, 그 순간만큼은 고민과 걱정이 잊히기도 한다. 이런 경험을 아이에게 대물림해주고 싶었다.      



훗날, 아이가 이유 없이 마음이 헛헛하거나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할 때 엄마, 아빠와 평양냉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나눴던 살가운 말 한마디, 눈을 맞추며 웃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길 바란다. 그 속에 담긴 추억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육수에 녹아든 긍정적인 경험을 들이키면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길. 지금의 나처럼….     



다른 건 몰라도, 평양냉면 조기교육 하길 참 잘했다.



*이 글은 조선뉴스프레스 온라인 매체 '마음건강 길(mindgil.com)'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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