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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Feb 06. 2021

더디지만, 자라는 중입니다

계단식 성장

모든 게 멈췄다.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고, 새로 만날 선생님, 친구들에 대한 기대와 새 학년을 준비하느라, 새해 계획을 세우느라 활기 넘치던 2월이었다. 올해는 정적만 흐른다. 지난해와 올해의 구분조차 모호해 여전히 지난해를 사는 느낌이다. 지난 일 년,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말했다. 잃어버린 일 년이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꺼웠다. 너무 많이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란, 참 어쩔 수 없는 존재다. 일상의 소중함, 별일 없는 하루의 가치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어린이집이 긴급돌봄 체제로 운영된 지도 일 년이 다 돼간다. 처음 어린이집 휴원이 결정됐을 땐 막막했다. 육아독립군에게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가 일을 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양가 부모님은 물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어린이집이 갑자기 문을 닫는다는 건, 부부 중 누군가는 집에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 머리가 복잡해졌다. 맞벌이 가정을 위한 긴급돌봄을 운영한다는 어린이집의 공지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모른다.

 


긴급돌봄은 말 그대로 돌봄이다. 평소에 진행하던 교육 활동(누리과정)이나 특별활동 프로그램은 진행하지 않는다. 어린이집 재량껏 교육 활동을 진행할 수는 있지만, 전염병이 유행할 때는 우선순위가 아니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을 확보하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긴급돌봄을 신청한 아이들은 주로 자유롭게 놀이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도,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간이 길어지자 조바심이 생겼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경험하면서 한 뼘 더 성장했을 텐데.’

‘지금쯤이면 한글을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러다가 우리 아이만 도태하는 건 아닐까?’

‘집에서라도 뭔가 가르쳐야 하나?’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마음이 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즈음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유아 홈스쿨링 프로그램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왔으니까.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한 교육업체의 학습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매일 조금씩 하다 보면 남는 게 있을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이도 태블릿 PC로 학습하는 방식에 흥미를 보였다.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화면을 보면서 곧잘 따라 하고 집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태블릿 PC를 앞에 두고 딴짓을 했다. 장난감을 만지작거리거나 엉덩이를 들썩였다. 학습 영상은 영상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따로 놀았다. 조금만 더 하면, 조금만 더 집중하면 매일 해야 할 학습 분량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이의 관심은 온통 영상이 끝나고 난 후 먹을 아이스크림에 가 있었다. 엄마의 욕심을 내려놔야 했다. 안 그래도 집에서 복닥대는 시간이 많은데, 아이와의 관계에 적신호가 켜질 것만 같았다. 이러다가 학습에 흥미라도 잃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겠다 싶었다.



‘그래, 흥미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자.’

 


내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습을 강요하지 않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미리 앞서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쩌다 전해 듣는 다른 집 아이의 한글 뗀 이야기, 영어 실력이 출중한 어느 여섯 살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내 아이를 떠올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교육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적기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히 들었으면서 말이다.      

 


교육전문가 대부분은 조기교육을 반대한다. 어려서부터 공부에 시달린 아이는 성적은 물론 행복 지수도 높지 않다는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유아교육 전문가인 이기숙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명예교수는 “적기교육은 과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한 최고의 양육법”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적기교육은 배움의 적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유아기에는 마음껏 놀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지난 2016년 이 교수가 한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 내용이다.

 


아이에게 몰입할 기회를 줘야 한다. 유아에게 제일 좋은 교육은 몰입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내가 다 완성했다. 너무 재밌다. 난 할 수 있다’라는 긍정과 자신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중략> 요즘 아이들은 사교육 때문에 엄마를 포함해 친구 등 주변인과 관계를 맺거나 대화를 나눌 기회가 너무 적다. 먼저 출발한 아이가 먼저 도착하진 않는다. 늦은 것 같지만, 적기에 제대로 출발한 아이가 끝까지 제대로 도착할 수 있다.

<2016년 12월 2일 동아일보>


 

그리고 한 달 후. 드디어 아이가 숫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다!” 습득 속도는 신기할 정도로 빨랐다. 숫자 10까지 세는 것도 어려워했는데, 며칠 만에 20까지 세더니 더하기의 원리도 어렴풋하게 이해하는 듯 보였다. 자기 이름과 엄마, 아빠의 이름에도 흥미를 보였다. 몇 번 써서 보여주고 읽어 줬을 뿐인데, 이름을 구성하는 자음과 모음을 발견하면 아는 체하곤 했다.      

 





얼마 전,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넉넉하던 내복이 쑥 올라가 배꼽이 드러났다. 자기 배꼽이 빼꼼 보이는 게 퍽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엄마, 이것 좀 봐! 웃기지?” 아이는 깔깔 웃으면서 배꼽을 가리켰다. 11월생이라 또래보다 키가 작은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몇 개월 만에 아이가 쑥 자라버렸다. 멈춰버린 줄만 알았는데, 아이의 시간과 엄마인 나의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체감하지 못하는 순간, 아이도 나도 자라고 있었다. 정체기라고, 제자리걸음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조차 우리는 ‘성장’이라는 도약을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내공을 쌓고 있었다. 그렇게 쌓인 긍정 에너지와 내공은 ‘계단식 성장’을 가져왔다. 일희일비하지 않기, 내 아이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으로 ‘적기교육’하기. 흔들릴 때마다 지금의 다짐을 떠올리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을 생각이다. 우리는 작아진 내복을 들고 한참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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