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회고글의 시작은 늘 같은 것 같다. 아니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갔다고?!?!?! 진짜 띠용한 상태로 항상 글을 시작하고 있다. 올해 여름부터 진이 빠진 번아웃 상태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정말로 거짓말처럼 시간이 가면서 나아지는 것 같다. 휴일이 많았던 덕분에 쉬엄쉬엄 보냈던 10월이었다. 개인 시간을 더 가용해도 좋았겠지만 힘이 없었으니 아쉽지도 않은 지금을 나중에는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우선 지금 나의 관점으로 이번 달을 회고해 본다.
1. 사람들과의 대화
여름부터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능하면 미루려고 했다. 에너지가 없는 것도 있었고, 주말 교육으로 주말 시간이 거의 안되었다. 그렇지만 멀리서 또는 아주 오랜만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자리들이 잡혀서 9월부터 10월 이번달까지 사부작사부작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친구, 중학교 친구, 독서모임 구 멤버 등 1년 전과 달라진 모습들, 신혼 생활, 연애 소식, 결혼 준비, 새 회사 적응기, 우울증 해결, 시험 준비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다. 코로나 때 나는 재택근무로 일 파악도 잘 안 돼서, 제자리걸음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가만히 있는 일상까지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좋아서 했던 것들이 좋다는 감정이 빠지는 flat 한 순간이 오기도 하고, 일과 연애 등 단순히 좋다기보다 삶에서 중요하다고 느끼는 과제에 집중해 보아도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고 점점 삶의 과제가 버거워진다고 느끼고 있다가, 결국 에너지까지 정말 소진되다 보니, 아 나는 아직 원점인가 싶었다.
한편 다들 애매하고 불안한 시기를 거쳐 안정기를 찾았다며, 나에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에너지부터 충전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2. 오랜만에 러닝
10월 1일은 여의도 고구마런을 시작으로 두 번 정도 주말 아침 한강 러닝을 했다. 작년 풀마라톤 완주 이후로 올해는 정말 거의 안 뛰고 있는데, 역시 뛰고 나서는 느낄 수 있는 오랜만의 개운함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러닝을 한다고 해도 머리를 비워지지 않는 것은 여전했지만, 오랜만에 푸릇한 나무들과 한강을 보면서, 아 이런 온도, 공기, 햇살이 있었지. 세상이 꽤 아름다운 구석이 많았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가을도 곧 지나갈 것 같아서 아쉬워서 더 즐기고 싶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많이 없어서 아쉽긴 하다. 날이 좀 더 천천히 추워진다면 시간 내어서 올해 조금 더 뛰어봐야겠다.
3. 오랜만에 아지트
올해는 5년간 유지해 온 독서모임에 대해서 운영할 에너지나 시간이 제한적이라서 모임을 위해 대관해서 사용하는 공간을 렌트비만 내고 거의 비워두었었다. 아깝지만, 내가 잘 못 쓰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한담, 이런 생각이었는데 10월 연휴도 있고, 주말 교육이 취소되었을 때마다 아지트에 가서 노트북도 하고 강의도 듣고 오랜만에 시간을 보냈었다. (딴 이야기지만 개인 작업실이 있다고 해도 잘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기도 하고, 확실히 개인 작업실이라면 위치와 수면 가능 여부가 중요한 것 같다고 느꼈다. 다음에 내 공간을 만든다면 무조건 편히 잘 수 있게 꾸미고 싶었다. 그렇다면 꽤나 더 자주 활용했을 텐데 말이다.) 분명 개인 공부, 작업, 업무 외에도 모임용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고 있었는데, 계약 기간은 이제 반년만 남은 상태라서 아 역시 영원한 게 없구나. 다 끝이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보다 더 아쉽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일을 벌여야 할 텐데... 담달에 다시 힘을 내보기로!
4. 불꽃놀이
매년 여의도 불꽃축제가 열리는데 너무 오랜만이었다.. 서른이 되고서 바로 혼자 서울 북쪽으로 독립해 살다가 작년 이맘때 본가로 돌아왔고, 코로나도 있었다 보니 꽤나 오랜만에 들리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도 보이는 줄 몰랐다.(!) 원래 용산에 살아서 중고등학교 때도 야자 또는 학원 갔다가 저녁에 불꽃축제 하는 걸 멀리서 보곤 했었는데, 이 집에서도 보일 줄 몰랐다.ㅎㅎ 엄마가 보인다고 해서 뭐 엄청 작게 보이나 싶었는데 웬걸 생각보다 꽤나 잘 보았다. 예전과 같은 설렘과 신기함은 확실히 적었고, 돈낭비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동시에 삶이란 효율과 낭비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용산에 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ㅋㅋㅠㅠ
5. 감기
주말 교육으로 오래 답답한 공간에 있어서 그런가 기침과 콧물이 주말부터 심해져서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병원에 가진 못하고 회사에서 기침, 감기약을 계속 챙겨 먹었는데 기침을 많이 해서 배가 땅기고, 콧물로 인해서 휴지를 계속 사용해서 얼굴이 따끔할 정도로 오랜만에 감기를 세게 겪었다. 독감주사를 맞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아 이걸 또 겪고 싶진 않으니 뭐라도 맞으러 가야겠다. 병원 갈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위에서 왜 자기 몸 하나 챙기는 시간은 아까워하냐고 했는데, 너무 맞는 말이라서 기억에 꽤 남았다. 다른 사람 챙기고, 커피도 사면서 왜 스스로 아파서 병원 가는 시간은 없다고 안 가는 걸까. 결국 안 가고 약국 약으로 버티고 지나갔다. 스스로가 병원에 자주 가는 타입이 아니지만, 자기를 돌보는 걸 소홀히 한다는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6. 먹을 복이 차고 넘치는 나
번아웃이라서 입맛이 좀 없었다가 지금은 이전으로 돌아왔다. 한편 입맛과 상관없이 여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무너무너무 잘 먹었다. 잘 먹을 수 있는 자리가 많았다. 라테 한 잔으로도 행복함이 많은데 진짜 과분하게 먹을 일이 많았다. 회사 출근하면 식당에서 점심을 정말 잘 먹는데도, 계속 먹을 일이 많았다. 얻어먹었으니 나도 사고하다 보니 먹을 일이 2배였던 것 같기도 하다. 번아웃이라고 해도 살이 빠지지 않았지만(물론 재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찌는 게 정상일 듯 하지만) 체력이 훅 빠져서 고통받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다.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혼자 먹을 것은 어디서든 찾아서 먹는 애라서 걱정 없다고 했었다. 요즘은 내가 찾아서 먹은 것은 아니지만, 굶는 사람이 아닌 것은 맞는 것 같다.ㅎㅎ
7. 루틴
어쩌면 나는 여전히 강박이 있는 것인지 생각을 했다. 전보다 매번 약속한 동일한 시간에 내가 운동을 못하거나 하기로 한 약속이 깨지거나 스스로 못 지켰을 때 그 상황이 엄청 싫고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자괴감도 들었다. 전보다 유연하게 시간을 옮기기도 하고, 다른 방식으로 하기로 한 걸 지키고 있어서 강박이 아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 나는 아예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구나. 강박이 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루틴을 지킨다고 과연 좋을 걸까, 이 주제로 글도 썼지만, 어쩌면 지독하게 어쩌지 못하게 이 굴레 속에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현타를 느꼈던 10월이었다. 날도 좋은데 크로스핏 대신 러닝을 해도 되고 하지만, 뭔가 짜놓은 루틴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은 나를 보기도 하고, 아침에 운동 못 간 날에 사실 하루 쉰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만, 이른 저녁에 운동 가려고, 힘든 퇴근길을 꾸역꾸역 일찍 나서는 나를 보았다. 안 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나은 것인지도 의문이 생긴 10월이었다. 그냥 안 하고 신경 안 쓰고 마음 편한 삶이 더 좋은 게 아닐까. 나란 사람에게는 어려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8. 워크숍
평일 하루 출근하지 않고 점심 뷔페를 먹고 뮤지컬 보는 워크숍을 다녀왔다. 내가 좋아하는 남산 뷰도 볼 수 있는 식사도 음식도 너무 좋았고, 뮤지컬 자리도 앞이라서 너무 좋았다. 근래 중에서 가장 생각 없이 마음 편하게 즐거워했던 하루였다. 아침에 운동 갔다가 여유롭게 옷도 고르고, 화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여유롭게 붐비지 않은 버스를 타고 출발해서 음식, 공연에만 온전히 집중했던 시간이 꽤나 오랜만이었다. 다른 고민이나 스트레스가 늘 머리를 맴돌았었는데, 오랜만에 잠시 오프 off 해둘 수 있었다. 뮤지컬도 너무 에너지 넘치는 스토리랑 분위기라서 나에게는 더 도움이 되었달까. 내게 마지막 뮤지컬이 작년 <레베카>였는데... 그걸 보았더라면 나의 무드는 약간 쳐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킹키부츠>의 엔젤들과 주인공들의 노래와 춤에서 나오는 에너지 자체가 너무 밝고 강해서 기분이 업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힘이 없다고 해도 혼자 있기보다 나와서 더 많이 보고 들으라는 말을 들었던 것인가 싶다.
밤 디저트 최고+_+
9. 평일 휴가
평일 워크숍 다녀와서 좋아서 또 평일 하루 쉬었다. 주말에 교육을 가니까 평일에 할 일 이 좀 있었다. 아침에 크로스핏 다녀와서 머리도 자르고, 아지트에서 공부도 하고서 저녁을 해방촌에서 먹고 남산에 짧게 산책을 갔었다. 워크숍 때처럼 마음 편하게 나와서 걷고 밖을 보았다. 여름부터 최근까지 마음 편하게 '툭' 비어 내본 적이 정말 없었던 것 같다. 운동하고서는 바로 출근해야 하거나, 교육을 끝나고는 집에 빨리 가서 저녁 먹고 한 글자라도 더 복습할까(설사 안 하고 못해도)하는 마음이 계속 있었고, 퇴근하고서 운동 가거나 약속에 안 늦으려고 서두르기 바빴다. 그 외 고민이 나를 사로 잡거나, 생각하다가 여러 감정에 훅 빠지게 되어서 마음이 계속 불편하고 불안했었는데, 너무 오랜만에 편안한 시간을 보냈었다.
용산 구민으로 남산 정말 좋아하는데, 야경도 좋고, 기회되면 날씨 좋을 때 산책 또 와야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진부하고 성격 급한 나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언이고 당장 해결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시간이 아깝고, 그렇게 시간을 기다릴 수 없다는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완전히 힘이 빠지니 그저 시간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니까 정말로 '인간'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구나.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도 '시간' 앞에서는 존재하지 않구나, 그저 순리대로, 흐르는 대로 왔다 가는 거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었기에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어리고 에너지가 있을 때 여행도 멀리 가고, 운동도 더 해보고, 일도 더 해보고 더 많은 경험을 하려고 했던 나인데, 삶은 복합적이라서, 방향도, 중요하고 페이스 조절도 필요하고, 본인의 그릇과 주위 환경, 운이 종합되니까. 양치기가 한계가 있겠다는 걸 체감 중이다. 올해 남은 두 달 동안은 애쓰지 말고, 순리대로 마음을 편하게 먹고, 시간에 쫓기기보다, 온전히 직시하며 단단해져야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