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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마스쿠스 Jun 08. 2024

나의 이름은, 그집 며느리

My name

시집오면서부터 이상하게 나는 아무도 모르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었다.


40여년전에 이민을 오셔서 장사도 열심히, 교회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신 시부모님 덕에 나는 시집오자 마자 새 이름을 얻었다. '그집 며느리, (어머니 장사브랜드)집 며느리'.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관심 없고, 그저 "미국서 온 며느리". 그게 나를 지칭하는 문장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누구 엄마, 누구 와이프. 어디 며느리.


이십대의 순수했던 나는 그 사실이 한동안 굉장히 마음이 먹먹했다.

평생동안 이름을 불려오며 살았기에 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직장, 교회, 순서대로 차근차근 아이폰에 저장된 친구가 너무나 많아서 비는 시간이 없었는데...


그러나 막상 이민 온 파라과이에서 내 존재감은 0.

나는 누군가의 며느리 혹은 부인 혹은 엄마인 것이다.

흡사 나를, 아무도 모르는 새 학교에 새로 전학온 학생이라 치면 아무도 나를 알아가려고 하지 않는 느낌? 그리고 내가 찾아가기에도 모두들 바쁘게 자기 수업을 찾아 강의실로 달려가고있는..

어찌보면 끈떨어진 연이었다. 의지할 곳이 없었다. 다행히 한가닥의 끈에 위태로이 매달려 있었는데, 그 한가닥은 당연히 남편이었다.


이민 후 첫 5년동안 내 전화기에 저장된 이름중에 친구는 단 한명도 없었다. 어디 커피한잔 하고 싶은데 전화기에 아무도 연락할 사람 없는 기분 아는 사람? 애꿎은 스크롤만 계속 밑으로 넘겨봐도 내 전화번호부에는 즐겨찾기에 남편 하나, 자주 하는 연락처 시어머니 한명. 나머지는 뭐 고치는 사람, 교회분들 몇분, 번호만 형식적으로 교환한 남편친구 부인 서너명만 있을뿐. 참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필요했다. 아니, 누군가라도 붙잡고 어떤 얘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얘기조차 이민 사회에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누구집 며느리 어떻네, 얘기를 피하려면 말이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어버린, 이제는 그 이름도 내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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