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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퀘렌시아 Aug 02. 2024

자기 신화를 찾아가는 길

수정 없는 의식의 흐름

그럴듯한 말이다. 자기 신화를 찾아간다? 일단 자기 이야기에 신화를 붙였다. 신화는 신성시되는 존재의 이야기 아니던가? 한 개인, 그것도 자신이 신화라는 것을 남기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자기 신화를 나는 찾아가고 있는가? 자기 신화 찾다 길을 잃어버리거나 샛길로 빠져버릴 수도 있겠다. 그럼. 그럴 수 있어. 최근  공부한 내용들이 막 떠오른다. 동양 사상가. 자기 길 연마하는 것을 중도하차해 버리면 정약용이 말한 사단의 길엔 이르지 못하지. 인의예지 사덕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니까. 정약용 선생님 의견으로는 말이다.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대한 글을 오늘 읽었다. 연금술사에서 주인공이 자기 신화를 찾아가는 길 떠나지. 그리고 그는 성공을 해. 이름이 뭐였더라. 아까 읽었는데 금세 또 까먹었다. 이런. 잠깐... 내가 기억해 내겠어. 음.. 산티아고. 그래. 금방 기억나 좋다. 데미안에 대한 글도 읽었다. 주인공... 음. 싱클레어. 두 인물 다 자기 신화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다. 내 보기엔. 자기 신화를 찾으면 새가 알을 깨고 나가 비상한다. 죽음이 있다는 것도, 빛이 있다는 것도 다 수용 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 인물들은 그랬다. 산티아고는 딱 그렇게는 안 나왔어도 산전수전 다 겪어 자기 신화에 도달한 산티아고이기에, 인생의 빛과 어둠을 다 알 것이다. 그가 겪은 고난도 그는 수용을 했으니 말이다. 고통의 시간이 자기를 단련시킨다는 뻔한 얘기들. 식상한 얘기이지. 여기저기 아주 많이 인용하니까. 그런데 그 뻔한 얘기가 맞는 얘기라는 진실. 웃기지. 그게 사실이다. 진실은 심오하고 멋진 말이 아닐 수 있다. 장자 말대로 똥자루 안에도 도는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스탈린 아들은 똥을 잘못 다루었다고 수용소에서 구박을 당해서, 그런 자신의 존재에 한없는 가벼움을 느껴 전기 철조망에 뛰어들어 죽는다. 그 스탈린 아들이 수용소에 있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며 자기 신화를 찾을 수는 없었을까? 왠지 죽은 게 고결하고 멋져 보이는 구조로 얘기가 됐던데, 죽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 신화를 찾는 방법 있을 수 있지 않나. 빅터 프랭클 박사가 떠오른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 종전 후 정신 치료의 한 분야를 연 사람. 수용소 안에서 타인이 내 의지를, 내 생각을, 내 의미 부여를 관여할 수는 없어. 밖에서 날 육체적으로는 괴롭힐 수는 있어도 내 생각, 내 판단은 내 자유이거든. 그 안에서는 난 자유로울 수 있어. 이것. 이것 승화다. 승화. 아름다운 승화. 통찰. 발견. 이렇게 얘기하니까 정신 분석의 방어 기제 중 긍정적인, 아름다운 방어 기제인 승화가 떠오른 거다. 승화. 어렵지.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 들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난 원수처럼 똑같이 하지 않고 착하고 예쁘게 하는 것. 그런 것도 승화다. 난 최근에 승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세탁기 고장 났을 때 누군가를 굉장히 미워하기보다 난 그 대상과 똑같아지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예쁘고 마음먹고 행동했다. 결과는.... 마음이 평온했다는 것. 관계가 틀어지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게 승화겠지? 삶은 다양하다. 이 세상이 한 모습만 있지는 않다. 길을 가다 내가 가는 길에서 갈팡질팡할 때 자신이 없어진다. 갈 지 자로 걷는 느낌.. 소 뒷걸음질 치는 느낌. 가다가 그냥 멈추고 싶은 마음도 들고. 문득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떠오른다. 그 대상이 걷고 있는 길은 지금 아무것도 안 하는 있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는데, 어쩜 치열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망가지고 무력해진 하루하루의 생활이 습관이 되고 늪이 되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가 되지는 않았을까. 그 늪도 자기 신화를 가는 길일까. 코엘료 책과 헤세 책 내용 해석을 읽다가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객관화해서 품고 가야 하는 나는. 나는.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걸까. 내가 가는 나의 신화의 길은 무엇일까. 난 지금 잘 가고 있는 걸까. 길이 안 보인다. 갈 지 자로 헤매고 있다. 마음이 쾌청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더 자신이 없지. 오늘은 신화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엄마 글이 무슨 7천 조회수가 뜨나. 다음 메인에 뜨면 그런 건가 본데, 웃기다. 조회수 높다고 글이 좋은 건 아니다. 조회수 높은 건 운이다. 메인에 알고리즘에 의해 선택 됐을 때 숫자가 올라가. 나의 엄마 글, 할머니 간다. 가 어제오늘 스타가 됐다. 웃기다. 우리 엄마는 그 일을 모르는데. 손주 순댓국 끓여 준 거, 오늘 손자가 새로 해 준 밥이랑 순댓국이랑 엄청 잘 먹었다고 신나서 나에게 전화로 자랑하셨는데. 엄마 나한테 신나서 전화했지만 난 엄마에게 마냥 잘하셨다고 좋으셨겠다고만 하지 못했다. 손주 중 남자 손주한테만 건더기 많이 주시고 국물만 남은 순대 국물을 여자 손주한테 나중에 불러 먹으라고 했다니. 듣기만 해도 훅 올라오는 소리여서. 엄마 잘하셨다는 가면 멘트가 안 나갔다. 엄마 그러면 딸내미 열받아. 둘이 사이 안 좋아져. 늦게 먹는 애는 건더기 따로 덜어 놨다가 줘야지. 이런 잔소리 하나 얹었다. 엄마가 늙으셨다. 반박도 안 하시고 목소리 기운이 금방 죽으셨다. 기죽은 엄마 목소리 들으니 또 속상하다. 난, 난, 내 자식들 밥을 우리 엄마가 챙겨주는 것인데, 뭔 잔소리를 해 대는 걸까. 엄마는 할머니라 안 바뀐다. 내 말대로 어찌 바뀌겠는가. 점점 나이가 드시며 예전에 남녀 손주 차별 없던 분이 남자 손주에게 더 음식 잘 퍼주시는 건 어쩜 엄마 진짜 본연의 마음이 가면 없이 나오는 것, 그것일 것 같아. 아마 본연의 욕구가 나오는 것 말이다. 신화는 글을 길게 만들었네. 코엘료 책을 집에서 찾다 못 찾았다. 어디에 꽂아 놨는지. 한참을 찾아도 못 찾겠다. 다시 사긴 그런데. 다시 나중에 찾아봐야지. 다시 읽어보고 싶다. 데미안도 다시 읽어보고 싶다. 데미안은 두 번 읽었어도 어려웠었다. 자기 신화 찾아 떠나 그걸 성공한 걸로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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