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는 정말 PTSD에 시달린 게 맞을까?
****스포 주의****
본 글은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의 중요한 스포일러를 가득 포함하고 있습니다.
정신건강 분야에서 일하면서, 미디어의 잘못된 영향을 인식했던 적이 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ADHD, 공황장애 같은 정신건강 용어를 다소 부정확하게 사용할 때가 그랬다. 물론 미디어를 통해서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그를 통해 정말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중요하다. 실제로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전달되면서 예전보다는 정신건강의학과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많이 감소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일부 진단명/증상명이 조금 과도하게 사용되는 걸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 기회가 허락된다면 조금이라도 그런 부분을 바로잡고 싶었다. 해리 포터에 대한 글을 쓰려는 사람이 왜 소설이랑 관련도 없는 이런 이야기를 서론에 쓰나 싶을 테지만, 이번 글의 주제가 자주 오해를 받는 진단명 중 하나인 PTSD이기 때문이다.
PTSD는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의 줄임말로, 우리말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한다. 말 그대로 큰 외상 사건을 겪은 후 나타나는 정신적인 고통과 관련된 질환이다. 정신장애 분류 체계를 살펴보면, PTSD는 '외상 및 스트레스'와 관련된 장애로 분류된다. 해당 카테고리에는 스트레스 사건/요인의 종류,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부적응적 행동이 무엇이냐에 따른 다양한 질환들이 포함된다. 하지만 사실 외상 및 스트레스 사건은 상당히 범위가 넓다. 사람마다 주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충격의 정도도 다르다. 그렇다면 PTSD의 정의에서 말하는 '외상 사건'이라는 건 어떤 상황을 가리키는 말일까?
PTSD의 진단기준에 명시된 외상 사건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건의 종류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부상, 성폭력에의 노출로 정의된다. 그리고 그런 끔찍한 상황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되거나, 외상 사건의 혐오스러운 부분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경우가 PTSD 진단기준에 부합하는 외상 경험에 해당한다. 사실 일상에서 우리는 PTSD라는 단어를 이런 상황 이외에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관용표현처럼 말이다. 하지만 실제 PTSD 진단 자체는 앞에서 언급한 특정 외상 사건 유형에 관련된 경우로 국한된다. 더 나아가 외상 사건을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외상을 겪은 후로 다양한 부적응적인 행동 변화와 고통스러운 증상들이 특정 기간 이상 나타날 때 PTSD 진단이 가능하다.
재미없는 배경지식 설명이 너무 길었다. 이제 정말 해리 포터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최근에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을 읽으면서, 해당 편에서 해리가 PTSD 증상을 경험한다고 느꼈다. 작중에 해리가 경험한 외상 사건은 바로, 불의 잔에서 세드릭이 볼드모트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목도한 것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하게 PTSD의 진단기준에 부합하는 외상 경험이다.
PTSD 여부와는 조금 무관한 이야기이지만, 외상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피해자가 자신과 친밀한 사람일수록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해리는 4편에서 의도치 않게 트라이위저드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또 다른 대회 참가자인 세드릭과 경쟁한다. 더불어 자신이 짝사랑하던 초가 세드릭과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가게 되면서, 세드릭에게 더욱 경쟁심과 시기심을 크게 느낀다. 그래서 대회의 2번째 과제인 황금알을 열어보는 과제에서, 세드릭이 힌트를 줬음에도 자존심을 내세워 힌트를 무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의 힌트를 따라 과제를 풀었고, 3번째 과제인 미로에서는 마지막에 세드릭과 협심하여 우승컵을 동시에 잡는다. 그렇듯 대회를 거치며 정서적인 교류를 나눈 동료였지만, 함께 우승컵을 잡아 도착한 묘지에서 동료가 살해당한다. 지난 편에서 해리의 구원자 콤플렉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해리는 세드릭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게 자책했을 것이 틀림없다. 비록 시리우스가 죽었을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렇다면 해리가 경험했던 PTSD 증상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5편 초반에 해리가 사촌 더들리와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더들리는 해리가 밤에 세드릭의 죽음과 관련된 악몽을 꾸면서 잠꼬대를 한다며 놀린다. 외상 사건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꿈을 꾸는 것은 PTSD 증상 중 하나이다. 외상과 관련된 불쾌한 기억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것인데, 전문용어를 쓰자면 이를 '침습 증상'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위의 악몽과 더불어 해리는 4편의 묘지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한다. 외상과 관련된 기억이나 생각, 감정 등을 회피하는 증상은 PTSD 진단에 필수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이는 5편 초반부에도 묘사되지만, 중반부에 해리는 초 챙과 썸을 타고 사귀게 되는데, 그때 초가 세드릭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대화를 회피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이 외에도 해리는 작중에서 여러 가지 PTSD 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온다. 진단기준에 맞춰 하나하나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들을 뭉뚱그려 말하자면 '외상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부정적이고 불안정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굉장히 과민해지고 분노를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외부 세계를 불신하게 되는 등의 증상이 여기에 속한다. 5편 전반에서 해리는 볼드모트가 돌아왔다는 자신의 증언을 믿어주지 않는 마법사 세계에 강한 분노를 느낀다. 또한 여름방학 동안 더들리네 집에 있으면서 마법사 세계에 대해 어떤 정보도 접하지 못했고, 아무도 자신에게 편지로 상황을 공유해주지 않았던 점에 매우 답답해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소원해졌다고 느끼고, 불사조 기사단 본부에서 마침내 친구들과 재회했을 때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분노가 폭발한다.
이처럼 소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묘사된 외상 사건의 유형과 증상의 종류 및 개수, 증상이 나타난 기간 등을 종합해 보면, 해리는 PTSD 진단이 가능한 수준의 정신적 고통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 진단은 단순히 증상의 유무를 넘어서 이보다 훨씬 신중하고 전문적인 평가 과정이 필요한 일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시는 누군가가 스트레스/외상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면, 인터넷에서 (이 글을 포함한) 정보를 찾아보기보다 빠른 시일 내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더불어 "진단" 자체가 갖는 의미와 부작용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번 글에서는 PTSD란 무엇이며, 소설 속 해리의 모습이 그에 부합하는지를 논의해보기만 하려고 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싶을 수도 있다. 단순히 증상만 나열해 봤을 뿐이니까. 그래서 해리 포터 PTSD 편은 다음에 한 편 더 작성할 예정이다. 다음 글에서는 외상 경험과 관련된 건설적인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