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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해 Jul 01. 2019

내 양심에 구멍 난 계단

매일 글쓰기 도전 중_이번 주 주제 : 계단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사거리 횡단보도. 횡단보도에서 지하철역 개찰구까지. 출근길에 유일하게 달리기를 하는 구간이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달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 거리를 달려서 통과하진 않았다. 횡단보도를 천천히 건너, 계단을 내려가고 개찰구를 도착하면 이미 줄이 길게 서 있다. 잠시 줄을 서 개찰구를 지나면 띠리리리 하는 소리가 들린다. 곧 지하철 문을 닫겠다는 소리다. 그제야 허겁지겁 플랫폼을 향하지만 겨우 도착하면 퉁 하고 지하철 문이 닫혀 버린다.


횡단보도에서 파란불을 기다리며 지하철 앱을 확인했다. 열차는 전역 출발. 평소처럼 여유롭게 건너 계단을 지나 천천히 개찰구를 통과하면 또다시 투웅. 지하철이 떠난다. 그렇게 몇 번을 눈앞에서 지하철을 놓쳤다.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 개찰구를 1등으로 통과해봤다. 교통카드 태그하는 곳이야 여럿이니 적어도 5등, 아니 10등 안에만 들면 개찰구에서 줄 서지 않고 바로 통과할 수 있다. 플랫폼을 향해 또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면 지하철에 탑승 성공!


한 번 그렇게 통과하고 나니 자연스레 달리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전력 질주할 필요는 없고 일단 빨리 개찰구까지만 가면 되는 달리기였다. 그 트랙에서 가장 무서운 구간은 횡단보도를 막 건너온 뒤 만나는 계단이었다. 시멘트로 대강 발라 만든 계단이라 넘어질 뻔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횡단보도를 빨리 뛰어 건너더라도 이 계단 앞에서는 멈췄다. 마음은 급한데 몸은 굼뜬, 엉거주춤한 자세로 계단을 내려왔다.


그날도 어김없이 계단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내 뒤에 달려오던 여자가 나를 앞질렀다. 그녀가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 사건이 터졌다. 그녀는 발이 엉킨 것인지 울퉁불퉁한 계단을 잘못 디딘 것인지 긴 머리 휘날리며 고꾸라졌다. 손에는 가방을 쥐고 있어 땅을 짚지 못했다. 어딘가 잡을 새도 없이 턱부터 퍽 하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억 하고 짧고 둔탁한 신음이 들렸다. 옆에서 놀란 나는,


“어잇쿠!” 하고 말았다. 힐끔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개찰구를 향해 뛰었다. 그리고 지하철 무사히 탑승. 무사히? 이 상황을 무사히라고 할 수  있나? “괜찮으세요?”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일으켜주고 먼지도 털어주고 했어야 했는데. 지하철 문이 닫힌 뒤에야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다.


돌아보는 그 순간 잠시 망설이긴 했다. 얼른 가? 도와줘? 차라리 순간의 고민조차 없었다면 양심의 가책조차 없었을 텐데. 그때의 망설임이 후회로 졸졸 따라왔다. 어설픈 양심이 나를 괴롭혔다. 도와줄 걸 그랬어. 도와줬어야 했어.


나는 여전히 그 계단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계단에서 아슬아슬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또 움찔하고 놀란다. 내 양심에 구멍 난 계단을 보며 생각한다.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 늦었지만,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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