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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해 Jul 03. 2019

이러쿵저러쿵 묻지 않고 속아주신 것일 테지

매일 글쓰기 도전 중_이번 주 주제 : 계단

지금 나는 전형적인 FM 성격이다. 입사 이후 지금까지 지각 한 번 한 적이 없다. 어떤 때에는 고지식해 보이는 부분까지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초등학생 나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개구쟁이랄까 꾸러기랄까. 지각대장이기도 했다.


우리 집 현관에서 내려다보면 학교 운동장이 훤히 보였다. 교문이 반대 방향에 있어서 조금 더 걸어야 했지만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살았다. 원래 가까울수록 지각을 많이 한다지 않나? 이틀에 하루는 허겁지겁 달려서 등교했다. ‘TV유치원 하나 둘 셋’에서 깔깔 마녀가 나오는 것을 보고 집을 나서면 어김없이 지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아침이면 늘 뭉기적거렸다. 교문까지 가면 지각할 것 같아 담을 넘다가 옷이나 가방을 찢어먹기도 했다. 등교길에도 요령 피우기 좋아하는 꾀쟁이였다.


그런 내가 숙제를 제대로 했을 리 없다. 숙제는 빼먹기 일쑤. 개학을 앞두고는 밀린 일기 지어내느라 바빴다. 덕분에 일기장 날씨 칸은 언제나 공란이었다.


계단에 숨어든 그날도 숙제 때문이었다. 과목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개학날이었나 싶지만 그 역시도 잘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무언가를 30회 이상 반복해서 적는 숙제였다. 깜지 쓰기 같은 그런 숙제.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는데 하지 않았다. 채우지 못한 횟수만큼 손바닥을 맞는다고 했었다. 그때는 때리면 맞는 때였다.


전날, 나는 분명 그 숙제를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정말 그만큼 때리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선생님은 정말 때릴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끝내 숙제는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날이 밝았고 여전히 나는 숙제 걱정만 하고 있었다. 집을 나서지 않고 꾸물거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이끌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지만 도무지 학교 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제야 손바닥 30회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타지 않았다. 대신 비상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파트 계단이 다 그렇듯 잘 이용하지 않아 바닥은 더럽고 공기는 탁했다. 군데군데 누군가 침 뱉은 것, 담배꽁초 버린 것 등으로 지저분했다. 더러운 계단이라 앉을 수도 없었다. 나는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안 돌아가는)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몇 분 뒤면 엄마가 출근하신다. 또 몇 분 뒤면 학교에서는 종례를 한다. 내가 없으니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걸 테지? 엄마가 출근하면 얼른 집으로 가 전화를 받아야겠다. 배가 너무 아파서 못 갔어요. 그렇게 말해야겠다.’ 11살 머리로는 굉장히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작부터 어긋났다. 엄마가 언제 출근하시는지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실 때를 맞추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런데 엄마가 지나간 건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내게는 시간을 알 수 있는 어떤 것도 없었다. 핸드폰이야 없을 시절이고, 손목시계는 차지 않았다.


이미 출근하셨겠지 싶어서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가려고 준비하고 계시던 엄마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이었다. 베란다에 세탁기 도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빨래를 해두고 나가시려다 늦어진 모양이었다.


“뭐 두고 갔어?”

“아... 니. 배, 배가 아파서.”

“배가 아파? 어디가, 얼마나 아파?”

“으응. 아파. 배가 아파서 가다가 왔어.”


이런 비슷한 대화를 했다. 학교가 코앞인데 가다가 왔을 리 없는 시간이었다. 엄마는 병원에 안 가봐도 되겠냐는 질문을 끝으로 더는 묻지 않으셨다. 11살 딸내미의 거짓말을 눈치채셨겠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화가 울렸다. 학교에서 온 전화였다. 엄마는 화장을 하다 말고 전화를 받으셨다. 나의 시나리오를 전달하지 않았지만 내 시나리오대로 답하셨다. ‘네~ 선생님. 이걸 어쩌죠. ㅇㅇ이가 배가 많이 아파서요.’ 하는 말. 곧이어 수화기가 나에게 넘어왔다. 선생님이 바꿔 달라고 했나 보다.


“ㅇㅇ이, 왜 안 왔어? 배가 많이 아프니? 숙제 안 해서 안 오겠다 한 건 아니고?”

“아... 니예요. 했어요.”

“그래? 그럼 내일 검사한다~ 오늘은 푹 쉬고...”


그런 대화가 오갔다. 수화기 너머 엄마에게 들릴까 조마조마하며 겨우 통화를 마쳤다.


“아휴, 엄마 늦었다. 엄마 빨리 가야 하니 빨래 다 되면 널고... 티비 보고 놀아.”


엄마가 떠난 자리에, 나는 홀로 남았다. 침울했다. 내일 검사하겠다는 그 말씀 때문에 심란했다. 내가 이 난리를 피우며 땡땡이를 쳤는데! 속으로 엉엉 울었다. 내 거짓말은 작은 눈 뭉치였는데 데굴데굴 굴러 거대한 눈 덩어리가 되어 돌아왔다.


엄마도 선생님도 그날 내 거짓말을 아셨을 거다. 지금도 거짓말하면 티가 나는 난데, 그때는 오죽했을까. 이러쿵저러쿵 묻지 않고 속아주신 것일 테지.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을까? 기억나진 않지만 숙제를 하지 않아 거짓말하고 학교에 안 가는 일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숙제를 안 하는 일이 없어진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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