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시작
새벽부터 뭔가 투둑투둑 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가 했더니 집을 나설 시간이 되자 기어코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 저번에 여기 뒀었는데.”
당분간은 쓸 일이 없을 거라며 한 구석에 곱게 접어놓은 우산을 찾다가 평소보다 늦게 출발해 정류장까지 뛰어가야만 했다. 운 좋게 버스를 잡았다 생각했는데 이번엔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도보 포함 40분이면 오는 거리였는데, 오늘은 40분은커녕 1시간 안에 도착하면 성공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툭
조용히 들어와 비에 젖은 우산을 책상 밑에 놓고 시계를 보니 9시 10분이다.
‘하필 차가 막혀가지고..’
오늘도 일하기 싫다며 느릿하게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는데 뾰족한 목소리가 끼어든다.
“수미 씨 오늘 늦게 왔네?”
“비가 와서 그런지 차가 막히더라고요.”
“비는 수미 씨 사는 동네만 오나 봐?”
옆자리에 앉은 강대리였다. 금방 커피를 내렸는지 고소한 냄새가 내 자리까지 흘러왔다. 근데 왜 아침부터 시비야. 강대리는 항상 내가 하는 일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존재로서, 회사에서 가장 마주치기 싫지만 그런 티를 낼 수 없는 존재다. 강대리 입만 거쳤다 하면 잘못 소문나는 건 순식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자리를 소개해준 윤지의 지인이기 때문에 괜히 밉보일 필요가 없었다.
“하하.. 그러게요.”
“프로젝트 아이디어 디벨롭은 해왔어?”
“오늘까지 정리하려고요. 빨리 처리해야 하는 업무들이 있어서요.”
“…”
침묵 끝에 한숨을 내뱉는 강대리였다. 이런 반응이 고깝긴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강대리가 낸 아이디어를 제치고 내 것이 다수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나이는 얼마 차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업무 경력은 자기가 한참 위인데 결국 후배에게 밀린 꼴이 되니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겠는가. 나라도 그럴 것 같아 모르는 척 모니터를 바라봤다.
“잘했네”
햇살이 잘 드는 창문 바로 앞 위치한 팀장의 자리에서 칭찬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강대리가 지금 책임지고 진행하고 있는 거지?”
“네, 맞습니다.”
강대리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 아이디어 좋네. 결과는 출시해 봐야 알겠지만, 진행 과정을 보니 반응이 좋을 것 같아. 끝까지 잘해봐.”
만족한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대리는 자리로 돌아와 종이를 툭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이라도 가나.’ 강대리의 뒷모습을 흘긋 보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이 옆자리로 향했다.
‘하이브리드…’
이어진 글자를 따라 눈으로 훑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했지만 제대로 본 게 맞았다.
[하이브리드 육아 용품 플랫폼 기획안]
[책임자: 강희진]
분명 내가 제안해서 채택된 아이디어가 왜 강대리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윤지의 도움으로 회사에 들어왔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도 잘해보겠다며 노력했다. 몇 날 며칠 좋은 아이디어를 고심하던 나날들과 팀원들에게 처음으로 인정받으며 기뻐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머리에 주파수가 맞지 않는 티브이가 틀어진 것 같았다. 외부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그저 지지직 거리는 소리와 흑백의 점들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