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불운한 사람 2화

어긋난 위로

by 담해윤






[윤지: 어디야? 나 도착했어]

[10분 정도 걸려. 금방 갈게.]



오늘은 윤지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다. 일을 쉬고 있을 때는 자주 만났는데, 회사에 들어가니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 겨우 날을 잡았다. 오랜만에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날 생각에 가슴 한켠이 설레었다.



“일찍 왔네.”

“나는 시간 맞춰서 왔지. 잘 지냈어?”

“잘 지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강대리가 말이야…”



나는 고된 하루 끝 안식처에 도착한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날숨과 함께 그동안의 일을 속사포로 내뱉었다. 강대리의 만행과 그로 인해 나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일, 그리고 충격을 받아 밥도 제대로 못 먹었던 나날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며칠간 밥도 제대로 안 들어가더라. 라떼로 겨우 연명했어.”


“고생했네. 근데 희진 선배가 네 아이디어를 가로챘다고? 그런 사람으로 안 봤는데.”


“내가 강대리 책상에서 자기 이름이랑 내 아이디어가 적힌 기획서를 똑똑히 봤다니까.”


“그래서 기획안 내용은 똑같았어?”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핵심 아이디어는 똑같더라고. 완전 짜증 나. “



처음엔 공감해주나 싶더니 나름대로 상황을 이해해 보려는 듯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윤지였다. 연약해질 대로 연약해진 내 마음은 날카롭지 않은 그녀의 질문에도 후벼 파였다. 내 편의 무조건적인 공감과 위로를 받고 싶던 마음에 컵 손잡이를 꾹 쥐었다 놓았다.



“그래서 저번에 소개팅은 어땠는데?”

“소개팅? 아니 그 남자가 말이야..”



이대로 가다간 무거워진 마음이 발치까지 내려갈 것 같아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침 기다리던 질문이었는지 윤지는 편하게 기대 있던 자세를 내쪽으로 고쳐 앉고 길고 긴 이야기의 포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았다. 너 바로 집에 가려고?”

“… 음… 나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그래, 조심히 들어가.”



소개팅했던 남자라도 만나러 가는 걸까? 테이블을 잠시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윤지는 카페 뒤편에 차를 세워뒀다며 사라졌다. 가는 길인데 같이 가면 이야기도 하고 좋을 텐데. 오늘은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 창밖 구경도 하고 오히려 좋지.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서늘한 밤공기를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 시원하다.”

[윤지: 잠깐 전화 돼?]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머리를 탁탁 털며 나왔더니 윤지에게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소개팅했던 남자에 대해 할 이야기가 남았나? 일 끝나고 약속까지 다녀와서 녹초가 된 상태였지만, ‘친구로서 이 정도 이야기는 들어줘야지.’라고 생각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왜? 잘 들어갔어?”


[응. 잘 들어갔지. 음.. 만나서 이야기할까 했는데 아깐 도저히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아서. 지금 통화 괜찮지?]


“괜찮으니까 내가 전화했지. 무슨 일인데?”


[우리가 친구가 된 지 10년이 훌쩍 넘었잖아. 나는 계속 너랑 잘 지내고 싶거든. 그래서 더 늦기 전에 하는 말인데, 나는 요즘 우리 관계가 기울어진 것 같이 느껴져서. 앞으로는 그 균형이 조금 맞았으면…]



갑자기 관계의 균형이라니, 옆자리에서 내 아이디어와 강대리의 이름이 함께 적힌 기획서를 봤을 때만큼 당황스러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철렁한 마음이 더해진 당황스러움이었다. 윤지가 우리 관계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녀가 해주는 모든 것이 나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고 나도 더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말 갑자기 해서 당황스러웠을 텐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 수미 너는 어떻게 생각해?]



윤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이랬다. 자기는 항상 나와의 약속이 있으면 집까지 태워다 주고는 했고, 좋은 일이 있을 땐 한 턱 쏘기도, 선물을 챙겨주기도 했단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처음엔 자기도 주는 게 좋았는데 그게 일방적으로 지속되는 것 같다고 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노력이 당연시되는 것 같아 이 관계에 의문이 든다고 말이다. 뇌가 입력받은 정보의 정리를 완전히 마친 순간, 차가운 무언가가 되어 머리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려운 편이었다. 평일엔 알바를 했지만 생활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날 땐 비싼 곳이라도 가면 불안하고 눈치가 보였다. 맛있는 걸 사줄 때면 고마웠지만 당장 보답할 수 없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어주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도와주고는 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했을까? 차라리 만남을 거절해야 했을까? 베풀 만큼의 돈이 있었다면, 데려다줄 차가 있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란 생각만 맴돌았다.



[수미야?]


생각의 회로가 끊김과 동시에 전화도 끊어버렸다. 예정보다 긴 통화에 휴대폰은 뜨거운데 잡고 있던 손은 왜 차갑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문득 방 한구석에 핀 검은곰팡이가 보였다. 지금의 나 같았다. 변명을 할 수도, 상황을 바꿀 수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다. 그만하고 자자. 자자 수미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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