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남은 사람
잠을 설쳐서 그런가 온몸이 찌뿌둥하다. 복잡한 기분과는 달리 날은 왜 이렇게 화창한지. 북향이라 해는 잘 들지 않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맑은 날씨임을 알려준다. 평소에는 잘 꾸지 않는 꿈을 꿨다. 꿈에서 교복을 입고 있던 것을 보니 중고등학교쯤인 것 같다. 학창 시절 꿈을 꾸다니… 내 생에 가장 찬란한 시절. 모든 것이 완전하고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수미야~ 같이 급식실 가자!”
4교시가 끝난 점심시간, 왁자지껄한 아이들의 소리가 내 쪽을 향해 들려온다.
“좋아!”
“내가 수미 옆에 앉을래!”
“너 어제 앉았잖아. 오늘은 내가 앉을 거야. 히히”
중학교 때의 나는 활기차고 유쾌한 아이였다. 물론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당시엔 넘치는 게 에너지라 더욱 밝은 아이였던 것 같다. 주변에 어울리는 친구들이 많아 내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했고, 여중생들은 나뭇잎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깔깔대니까. 그땐 나 같은 아이가 더욱 빛났던 것 같다.
윤지는 어땠더라… 당시 윤지는 친구 무리를 겉돌고 있었다. 같은 무리이긴 한데 괜히 홀수면 둘이 짝을 짓고 한 명이 남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그게 윤지였다.
“윤지! 왜 아직 앉아있어.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오늘 탕수육 나온대!”
자기 이름이 불릴 줄은 몰랐는지 놀란 듯 내쪽을 쳐다보는 윤지가 보였다. 친구들이 윤지를 두고 급식을 먹으러 가거나, 매점을 갈 때 내가 항상 윤지를 챙겼다. 왜 그랬냐고 물으면 딱히 명확한 이유는 없는 것 같다. 명분은 그냥 ‘다 같이 노는 게 재밌으니까.’였다. 하지만 한 구석에 묻어둔 기억은 윤지가 혼자 남아있을 때의 표정을 봐버렸기 때문일 거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텅 비어버린,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이후론 먼저 가 말을 걸기도 했다. “너 어제 오빠들 나온 방송 봤어?”라고 운을 띄우며 말이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우리 주변으로 삼삼오오 모여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는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윤지와 같은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비록 대학교는 달랐지만 가까운 지역이라 계속 연락하고 지냈다. 그러면서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런데 우리의 관계의 균형이 안 맞는 것 같다니. 나는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걸 했는데… 윤지의 시선에서 내가 한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던 걸까? 내가 내민 손길도, 열심히 이야기를 들어주던 모습도 전부 말이다.
윤지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였다. 오래 알고 지낸 만큼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었고, 학교나 지역이 바뀌면서 자연스레 멀어진 친구들이 대다수였지만 윤지는 예외였기 때문이다. 메신저 대화 목록에 매일 떠 있는 유일한 빨간 알림. 그걸 누르면 그 안엔 그녀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를 위한 안부와 걱정이 들어 있었다. 윤지는 나에게 포근하고 안락한 안식처를 만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윤지에게 나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나는 예전처럼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윤지는 왜 우리의 관계의 균형이 맞지 않다고 했을까. 윤지가 나에게 살가운 친구처럼 굴지 않아도,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작은 부탁을 해도 괜찮았다. 내가 그런 친구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정의 지속을 위해 무언가를 더 요구하는 듯한 윤지를 보며 나는 관계의 덧없음을 느꼈다.
어제 통화의 충격으로 미처 하지 못했던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릇에 음식물이 말라붙은 자국을 수세미를 잡고 힘을 줘 벅벅 닦았다. 몇 번의 손길 끝에 그릇이 원래의 뽀얀 색을 찾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품이 물줄기를 타고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며 ‘내 인생도 이렇게 닦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참고 견뎠을까? 사실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둥글게 넘어갔던 내 성격이 인간관계를 이렇게 만든 걸까? 누군가 나에게 얼룩을 묻히면 스스로 문질러 닦고, 그것을 지우려 했던 노력조차 물에 흘려보내 버렸어야 했다. 모두가 아니라 나를 지키려면, 당연히 그랬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