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불운한 사람 4화

크레마

by 담해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몸은 회사인데 영혼은 여전히 집에 있는 것 같다. 커피라도 마시면서 정신을 차려보려고 동그란 버튼을 꾹 눌렀다. 우웅- 하고 기계가 작동하며 드르륵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나자 나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수미 씨, 주말 잘 보내셨어요?”




목 뒤로 바람이 스치는 것 같더니 누군가 들어왔나 보다. 묘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목소리. 뒤를 돌아보니 한동안 여행을 간다며 연차를 썼던 민정이 있었다.




“아, 민정 씨. 그럭저럭요.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네. 평일이라 여행지에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더라고요. 다들 일은 안 가는 건지 참. 그래도 즐겁게 보내고 왔어요.”




민정은 나보다 몇 개월 후에 회사에 들어온 같은 직급의 사원이었다. 사교성이 있어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편이었다. 팀원으로서 옆에 있으면 편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비교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요새 프로젝트는 잘 진행되고 있어요? 도울 거 있으면 알려줘요. 제가 그동안 연차 때문에 팀 일에 신경을 못 썼네요.”


“아.. 그 프로젝트 지금 제가 안 하고 있어요. 강대리님한테 넘어간 것 같더라고요.”




다시금 아픈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내 내가 아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물론 강대리를 향한 팀장의 칭찬이나 옆 책상에서 본 내 아이디어는 쏙 빠진, 내가 말해도 되는 범주에서 말이다.




“엇? 그거 수미 씨가 진행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때 처음 맡는 프로젝트라며 엄청 설레어했었잖아요.”




민정의 목소리에 걱정과 궁금증이 묻어났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강대리가 내 아이디어를 가져갔다고?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말을 꺼내는 건,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 폭약에 스스로 불을 붙이는 거나 다름없었다.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어쩌다 알게 된 거라.”




엉망인 심정과는 다르게 멋쩍게 웃으며 말을 매듭지었다. 어디를 쳐다봐야 할지 몰라 시선을 돌려 멈춘 곳엔 다 내려진 커피가 있었다. 새 원두로 바꿨는지 크레마가 올라와 있었다. 커피 위에 떠 있는 거품을 물끄러미 보다가 문득 저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섞이면 사라질까, 아니면 그대로 떠 있을까. 하지만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저 먼저 들어간다며 민정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뒤 탕비실을 나섰다.








“수미 씨, 회의 자료 다 뽑았어?”

“아,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어요. 지금 뽑을게요.”




하던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황급히 강대리가 보내준 자료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더라… 저번 주에 받았으니 아마 메시지를 꽤 위로 올려야 할 것이다. 내 검지가 이렇게 빨랐나 싶었을 정도로 마우스 휠을 올리다 아직도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더 말씀하실 거 있으세요?”


“수미 씨, 내가 이걸 언제 부탁했는데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거야? 지금 회의 시작 15분 전이야. 회의 시작하고 준비하려고?”




왼쪽 손목에 있는 은색 메탈 시계를 확인하더니 아까와는 다른 격양된 목소리로 나를 쏘아붙였다. 분명 언제 부탁했는지 사실을 묻는 질문은 아닐 것이다. 강대리는 준비되지 않은 회의 자료에 대한 잘못을 나에게 묻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잘못’이라는 키워드를 넣은 문장을 말해야 그녀가 만족할만한 정답이 될 수 있었다.




예전이라면 정답을 말했을 것이다. 굳이 정답을 피해 가면서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회의 자료 준비는 원래 민정의 담당이었지만, 연차로 인해 강대리가 민정의 일을 나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나는 원래 해야 할 일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도와주기로 한 일을 놓친 것뿐이었다. 아직 회의까지 시간이 남아있고, 옆에서 내가 파일 찾는 걸 본 상황에서 고맙다는 말 대신 히스테릭한 태도라니.




내 아이디어를 가져간 것도 모자라 이런 억울한 상황까지 겹치니 스스로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모두를 지켜야 하는 게 아닌, 나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다짐 말이다. 이제는 나를 지켜야 할 차례였다.




“대리님, 지금 하고 있으니까 회의 전까지는 준비 가능할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일이었으면 깜빡한 게 문제가 되는 게 맞는데요, 저는 제 업무는 아니지만 선의로 도와드린다고 한 거거든요. 온전히 제 책임인 것처럼 말씀하셔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할 말을 다 내뱉고 고개를 돌려 다시 파일을 찾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악당을 물리친 것처럼 짜릿했다. 옆에서 강대리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멈추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시하고 파일을 계속 찾다가 드디어 일주일 전 메시지에서 파일을 발견했다. 통쾌한 마음을 담아 인쇄 버튼을 달깍 누르고 프린터기로 향하는데, 여전히 강대리의 시선은 나에게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화난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닌 할 말을 잊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혼자 교실에 남아있던 윤지의 표정. 그때의 윤지와 지금의 강대리 표정이 같았다. 하지만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할 일을 다했으니까.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돌덩이가 올라간 듯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월요일에도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다니, 여행은 민정 씨 대신 내가 다녀온 것만 같았다. 진작 이럴걸. 아냐, 후회는 자꾸 멈춰서 뒤만 돌아보게 한다. 내가 갈 곳은 창창하게 펼쳐진 꽃길 뿐이다. 마치 내 학창 시절처럼 말이다. 친구들이 내 주위를 빙 둘러앉아 함께 이야기를 하고, 모두가 즐겁던 그때처럼.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은 사람이다.




앞으로 이렇게만 한다면 충분히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길에 발을 내딛기 위해 내 것, 내 권리, 내 감정을 되찾을 차례다. 문득 잠깐 켜졌다 꺼진 휴대폰 화면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잡으려다 멈췄다. 아니, 아직 지금은 아니야. 기분이 상향곡선의 최대치를 찍은 상황에서 굳이 다른 곳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부재중 전화 3통 - 윤지]

[윤지: 수미야, 이거 보면 연락 줘.]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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