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다 보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설거지를 하다 여전히 손에 짜릿함이 남아있는 것 같아 거품이 한가득 낀 두 손을 내려다봤다. 친한 친구의 선배라는 이유로, 회사의 요주 인물이라서 내가 꾹 참아야 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진작 이럴걸. 문득 이 일을 소개해줬던 윤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오르자 망설임 없이 그 얼굴을 지웠다. 이제는 내 아이디어를 되찾아와야 할 때다. 시작하는 게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 내 생각의 흐름은 혼자 자전거 타는 법을 뗀 아이처럼 다음 단계를 향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직접 강대리에게 물어보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마주쳤을 때 여러 번 말이 혀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물어보지는 못했다. 강대리는 언제나 자기 말이 옳다고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팀원들이 강대리에게 항의하러 왔다가 어영부영 마무리되는 경우를 옆자리에서 종종 목격했다. 다른 팀원이 아닌 내가 강대리 앞에 서있는 모습을 상상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이디어도 못 찾고 강대리에게 휘말려 죽도 밥도 못 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래서 상급자에게 이 상황을 알려 중재하도록 하는 것이 내 앞으로의 계획이었다. 태블릿 펜슬로 화면을 툭툭 두드리며 팀장이 강대리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못한 사람은 그에 맞는 결과를 받아야 한다. 나는 내 권리를 되찾는 것이고, 팀장님은 이 일을 공정하게 판단해 주실 거다.
그러려면 우선 자료를 수집해야 했다. 내가 이 아이디어를 만들었다는 증거와 강대리가 만든 기획안이 필요했다. 마인드맵 정 가운데 ‘내 아이디어 되찾기’ 오른편에 있는 ‘내 자료라는 증거’를 중심으로 가지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디어 조사 자료, 메모, 발표 PPT… 어느새 오른쪽 화면이 가득 찼다. 그리고 한쪽이 가득 차자 반대로 텅 비어있는 왼편이 도드라져 보였다.
‘강대리가 가져갔다는 증거’ 강대리가 저번에 책상 위에 올려놓은 기획안 파일을 찾으면 될 것 같은데, 그 파일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팀 공유 폴더에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자기가 훔친 아이디어로 만든 기획안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려놓을까 싶기도 했다. 우선 공유 폴더를 찾아보고 없으면 다른 방법을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수집한 증거를 팀장에게 먼저 보여주거나 아니면… 그건 최후의 수단이니 나중에 생각해 봐야겠다며 다시 태블릿 펜슬을 두드렸다.
착수 시간은 모두가 퇴근하고 난 뒤인 6시 이후, 자료를 다 모으면 정리해서 팀장에게 면담 신청 메시지를 보내면 된다. 면담에서는 정리된 자료를 보여주면서 이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야기해야지. 나는 업무로서 이 일을 대하는 것이고, 팀원으로서 불합리한 상황에 맞서는 것뿐이야. 나도 모르게 생각에 깊이 빠졌었는지 손이 저린 걸 느꼈다. 손가락 끝이 하얘지도록 태블릿 펜슬을 잡고 있었다. 문득 나만의 007 작전 같다는 철없는 생각에 잠깐 미소가 지어졌다.
어느새 글로 가득 찬 태블릿 화면을 버튼을 눌러 끄고 침대 옆 협탁 한편에 밀어뒀다. 그리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알록달록한 맞은편 벽면을 쓱 둘러봤다. ’ 저건 작년인가? 전주 여행 재밌었지… 비빔밥 맛있었는데. 저 콘서트도 좋았어. 다음에 내한 또 왔으면 좋겠다. 이젠 회사에 다녀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갔던 여행 사진과 콘서트 티켓들을 보며 하나씩 떠오르는 추억들을 감상했다. 저번에는 곰팡이만 보이더니 이제는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들이 더 눈에 띈다.
문득 인터넷에서 봤던 심리 실험이 떠올랐다. 긍정적인 단어와 부정적인 단어가 섞여 있는 화면을 보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어를 말하는 실험이었다.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과 비슷한 결의 단어를 먼저 찾았다. 이제는 내가 곰팡이보다 좋은 기억을 먼저 찾아내는 것처럼, 더 이상 나는 부정적이고 운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 내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찾으면 더 좋은 일들이 펼쳐질 거야. 불운했던 수미에서 운이 따르는 당당한 수미로의 변화를 머릿속에 그려보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