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찾기
“수미 씨, 퇴근 안 하세요?”
어디선가 부드러운 코튼향이 나는가 했더니 민정이 오른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 나를 향해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저 아직 할 일이 남아서요. 먼저 들어가세요.”
민정은 알았다는 듯 살포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밖을 향해 나갔다. 어깨에 닿을 듯 말듯한 길이의 단정한 단발머리와 깔끔한 남색 니트, 잘 다려진 슬랙스에 스크래치 하나 없는 단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안 쓴 듯 신경 쓴 모습이 일도 잘하고 성격도 둥근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오늘 실수로 내 셔츠에 흘린 빨간 반찬 자국과 대비되는 모습에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출구 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바탕화면 작업 표시줄의 시간을 확인했다.
‘6시 5분.’
모두가 나가려면 6시 30분은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사무실을 비우기까지, 그리고 내가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25분이 남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머리를 젖혀 의자에 기댔지만, 어깨와 목은 여전히 뻣뻣하게 느껴졌다.
“수미 씨,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나가실 때 소등 부탁드려요.”
대식의 말을 끝으로 사무실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백색 소음으로 가득하던 낮의 사무실과 달리, 지금은 한 대의 컴퓨터 본체가 우웅-하고 작동하는 소리만 남아있다. 현재 6시 45분. 예정보다는 약간 늦어진 시각이지만 서두른다면 충분히 오늘 내로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진 마음에 어제의 메모를 떠올리며 첫 번째 작전부터 개시했다. 내가 프로젝트 아이디어의 원작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디어 리소스부터 발전 과정, 그리고 아이디어 발표 피피티까지 최대한 많은 자료를 찾아야 했다.
드라이브, 바탕화면 업무 폴더, 업무 다이어리 등 회사에서 일을 하려면 거쳐가야 하는 모든 경로를 쥐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최종, 최최종, 최최최종, 최종(이게 진짜)’와 같은 파일들에 중간중간 난관을 겪기는 했지만 시간을 들인 덕에 결국 필요한 파일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자료를 모두 수집하고 나서, 내가 어떻게 아이디어를 만들고 발전시켰는지 알아보기 쉽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를 했다. 팀장이 참고할 수 있도록 간단한 메모와 함께 말이다.
뿌듯함도 잠시, 이번 작전의 클라이맥스가 남아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다시 뻐근해졌다. 지금 강대리의 파일을 찾을 유일한 열쇠는 부서 공유 드라이브. 만약 그곳에 파일이 없다면 내가 갓 완성한 자료들은 쓸모가 없어진다. 게다가 강대리가 훔쳐간 아이디어도 되찾을 수 없겠지. 있을 수 있는 극단의 상황까지 상상하다가 고개를 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우선은 공유 드라이브를 확인해 보고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꾹 붙잡고 공유 드라이브 폴더를 빠르게 두 번 클릭했다. 많은 파일들 속에 내가 찾아야 할 것은 강대리의 것 하나다. 검색창에 ‘강희진’을 검색하고 잠깐의 시간을 기다리니 강대리가 올린 파일들이 하나 둘 뜨기 시작했다.
“어..!”
‘하이브리드 육아 용품 플랫폼 기획안_강희진’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그 파일이 눈앞에 있었다. 다행이게도 강대리가 며칠 전에 공유 드라이브에 옮겨 놓은 모양이다. 같은 파일이지만 강대리의 책상 위에서 봤을 때와 지금의 기분이 상반되게 느껴졌다.
그때는 당황스럽고 화가 났는데, 지금은 보물 찾기의 선물을 찾은 것 마냥 기쁘고 반갑다.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로 고양된 기분을 따라 경쾌하게 파일을 클릭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두 눈으로 훑다가 더 이상 스크롤을 내릴 부분이 없자 재판장처럼 결론을 내렸다.
‘강대리가 더 발전시켜 놓은 부분도 있지만, 아이디어와 제목, 전체적인 내용 측면에서는 내가 발표한 초안과 유사함.’
결국 강대리는 내 것을 훔침으로써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었다. 파일의 복사본을 바탕화면의 ‘증거’ 폴더에 넣으며 어깨가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강대리의 파일에 내 것과 겹치는 부분을 하이라이트 했다. 두 자료를 비교하며 열심히 형광펜을 긋다가 문득 내 자료로 칭찬을 받는 강대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팀장의 잘했어라는 한 마디에 우쭐한 모습이라니. 남의 것을 훔쳐갈 정도의 양심이면 그런 칭찬도 마다하지 않고 받는 건가? 나 같으면 부끄러워서 못했을 거야.
하긴, 그런 성격이니까 남들한테 빈정대고 다니는 거지. 저번에 비가 와서 늦었을 때는 ‘비는 수미 씨 사는 동네만 오나 봐?’라며 비꼬았잖아. 진짜 늦고 싶어서 늦은 것도 아닌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더니 우리 회사가 그꼴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이 기회에 팀장님께도 진실을 알려야지. 나를 포함한 다수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까…
“뭐해요?”
순간 엉덩이가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해졌던 어깨에는 다시 힘이 들어가고, 목 줄기를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잔뜩 긴장된 몸으로 설마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땐, 짙은 색 모자를 쓴 건물 관리인이 이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아이고, 많이 놀랐어요? 불이 켜져 있길래.
“아하하… 제가 너무 집중하고 있었나 봐요. 이제 거의 다 마무리되어가요.”
“그래요, 그럼 고생해요.”
관리인이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갔음을 알아채고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너무 놀란 탓이었는지 쉽사리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잔뜩 뻣뻣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계를 확인했더니 벌써 10시가 다 되었다. 형광펜 뚜껑을 닫고 종이를 세워 아래로 두세 번 쳐서 정리한 후, 책상 오른편에 위치한 서랍 가장 아래칸에 정갈하게 놓았다. 그리고는 가장 위칸 구석에 있는 열쇠를 찾아 잠그고 손잡이를 잡아 덜컥 소리 내어 한 번 더 확인했다.
할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쭉 편 뒤, 왼쪽 어깨에 가방을 툭 얹었다. 물리적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졌지만 더 가볍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서랍에 마음의 짐을 덜어놓은 것 같아 후련해진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