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나에게 후배였다.
그는 듣기에 따라 한껏 비밀스러울 수도 있는 얘기를 꺼내며, 선배한테는 먼저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미루고 미루다 함께한 점심에서였다. 나보다도 덩치가 큰, 곰 같은 녀석의 입에서 이토록 스위트 한 말이라니. 별 재미난 얘기도 아니었건만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허물없이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회사 후배다. 내가 대학생 티를 막 덜어내고 회사원 흉내를 시작했을 때쯤 그를 만났다. 대학 때 연극을 했다고 했다. 아마 내게 춤이 그렇듯, 취미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의 말투에서 연기 투의 어색함을 느낀다. 그렇다 해도 속마음에 대한 과장이 조미료처럼 묻은 그의 말투에서 진심을 찾는 건 쉬운 일이다. 그 날, 나는 평소 잘 듣는 사람이 아님에도 비밀스러운 그의 말을 조심스레 새겨 들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말의 내용을 잊는 대신 선배한테는 왠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는 그 한마디를 오래 기억했다.
애초에 사회화가 덜 된 탓에 후배라 부르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회사에 얼마 없다. 언뜻 세어도 한 손이면 충분하다. 매년 몇 명씩 신입사원들이 들어온다고는 해도 최근 1-2년 사이에 입사한 친구들에게는 어쩐지 반말을 하며 후배라 부르기 어렵다. 같이 하는 업무도 없을뿐더러 한 명은 가르치고 한 명은 배우는 일방적 관계도 아닌 탓이다. 그리하여 차라리 맘 편히 그들에게 존대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반말을 한다 하여 그들이 내 후배인 것은 아닐 테지만, 나는 그들을 후배라기 보단 동료로 여기곤 한다. 각자 맡은 일을 하고 한 팀에 소속되어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받는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관계라고나 할까. 다만 조금 건조한 사이라고 느낄 때는 있다.
그런 까닭에 나를 연종 매니저님 (최근 직급 체계가 개편되어 대리 직급이 매니저가 되었다.)이 아니라 선배라고 또렷하게 불러 주는 사람이 나는 반갑다. 그런 친구들에게는 나도 자신 있게 이 사람, 내 후배라고 소개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 나와 점심을 먹은 그 친구는 나와 1년 남짓 일했음에도 자신 있게 후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의 관계는 유별나서 그저 같은 회사에 다니며 사적인 얘기 몇 마디 나누고, 술 몇 잔 마신다고 해서 선후배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사전에서는 같은 분야에서 먼저 일하게 된 이를 선배, 늦은 이를 후배라 명명하는 듯 하나 내 마음에 드는 정의는 아니다. 요새는 나이를 기준으로 으스대는 이들을 꼰대라고 경고도 하는 마당이라 더욱 그렇다. 나이도 그저 먹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이 들린다. 그러니 그저 일하는 시점만을 기준으로 선후배 관계가 된다는 것이 과연 맞는 말인지 싶다.
나는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함께한 시간의 길이, 순서, 그리고 양과 같은 계산 가능한 정량적 수치가 아니라고 여긴다. 함께한 시간의 밀도야 말로 가장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가장 오래된 친구가 아닌 것처럼, 회사 선후배 관계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일하며 많은 경험을 공유하고 고생도 하고, 때로 마음 상할 정도로 싸우고 또 풀어지는 그런 순수한 전우애 같은 관계가 회사에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저 함께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함께 고생한 선후배 사이라고 서로 간에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