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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미안 May 29. 2020

세상에 듣기 좋은 조언이 어디 있어

일하며 들은 충고

 하루를 크게 웃었다. 얼마 전에 본 짧은 영상 덕분이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유재석과 조세호가 메인 엠씨로 나오는 길거리 퀴즈쇼다. 내가 본 것은 그중 일부를 짧게 편집한 동영상 클립이었다. 본방을 챙겨볼 정도의 팬은 아니라도 가끔 유튜브나 TV에서 만났을 때 채널을 돌리지 않을 만큼은 즐긴다. 인기가 시들했던 처음과 달리 몇몇 진정성 있는 사연과 인터뷰에 힘입어 점점 인기를 얻는 듯했다. 메인 컨셉인 퀴즈는 거들뿐,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탄생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보는 맛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화제가 된 에피소드를 보게 되었다.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는?"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라면 쉽다. 우선 목적이 다를 것이다. 잔소리는 소리고 조언은 말이라 의미의 무게감도 다르다. 하지만 상대는 기껏해야 초등학생이다. 아이에게 던져진 질문치고는 다소 버겁다. '방송은 이런 식의 불균형, 미스매치를 의도적으로 노리는구나'라고 생각한 건 아주 잠시였다. 영상 속 아이가 마치 먼저 예상이라도 한 듯이 망설임 없이 확신에 찬 표정과 성숙한 말투로 대답했던 것이다.

 

 "잔소리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데 충고는 (조언은) 더 기분 나빠요."

 

 아이같이 유치한 어른은 때로 비웃음을 사지만 어른처럼 진지한 아이는 웃음을 짓게 한다. 별안간 만난 귀여운 대답에 내 표정도 무장해제 되었다. 평소 엄마나 선생님 말씀을 안 들어 자주 혼이 나는 아이일 수도 있겠다. 가만 보니 얼굴에 개구짐이 묻어 있는 것도 같다. 언젠가 잔소리든 충고든 많이 듣게 되어 기분이 상했었나 보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도 웃음을 선물해주고 싶어 여기저기 가릴 것 없이 영상을 공유했고 함께 낄낄댔다. 듣는 사람이 원치 않는다면 기분을 망치기만 하는 것이 잔소리와 조언이다. 특히 조언이랍시고 내뱉어진 말들이 더 듣기 싫게 고깝다. 우리는 자신이 들은 최악의 조언을 앞다투어 소개하기도 했다. 경쟁할 것도 없는 것을 경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잔소리는 몰라도 조언이라면 나도 잘 안다. 일을 시작한 뒤 많은 조언을 들었다. 어떤 말은 너무 가벼워 내 마음을 몰라주었고, 어떤 말은 너무 무거워 감당하기 버거웠다. 거의 대다수는 자기만 좋자고 했던 말이라 듣는 내내 기분만 상했다. 아주 많지는 않아도 기분 나쁘지 않던 조언도 있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가 해준 조언이었다. 단지 그가 얘기했단 이유로 맘에 들어 했던 것은 아니다. 한참 전에 들은 말인데도, 일하며 들은 조언이라고 하면 나는 제일 먼저 그 말을 떠올린다.


 그때의 나는 많이 힘들고, 또 화가 나 있었다고 생각한다.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고작 2년 정도였다. 무엇이든 척척 해낼 정도로 일을 잘하지 못했고, 누군가에 기대자니 기댈 곳이 변변치 않았다. 벽인 줄 알고 기댔던 곳은 벽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버릴 듯한 녹슨 펜스였다. 기댈수록 오히려 내 쪽으로 점점 기울어져 와 나를 덮치고 짓눌렀다. 함께 일했던 내 담당 과장은 그런 사람이었다. 형편없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못된 인간. 어떤 기억은 지나고 나면 미화되기도 한다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나쁜 사람으로만 기억한다. '아냐 그래도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은 아냐'라는 설명은 예의로라도 덧붙이지 않는다. 6년이 지났어도 그렇다.


 깊이 잠들지 못해 깨는 새벽이 많아지고, 가끔 울기도 했던 날이 한 두 날 있었다. 회사 생활하며 그때만큼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일하며 듣는 얘기는 온통 책임없이 내뱉어지는 잔소리였고 조언이라고는 조언을 가장한 대책 없는 꼰대질밖에 없었다. 왜 항상 조언은 예전 자기 얘기로 시작해서 자기 자랑으로 끝나는 걸까. 그 정돈 아무것도 아니라는 무용담과 절대 이길 수 없는 불행 배틀로 마무리되는 걸까. 나는 아직도 그때 그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한번 깊이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업무가 너무 많아 조정이 필요할 것 같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정말 조심스레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그때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쭈굴대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당당함은 내가 할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고 나는 그 정도 존재감의 사람이었다.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우선 했다. 한숨을 내쉬며 어떤 말을 할까 고민하던 그 표정과 첫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한참 펜을 돌리다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일하기 싫다는 말이냐?"


 그래.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정말 누군가의 조언이 필요했던 것이 맞다.


 그로부터 며칠 뒤였을 것이다. 나는 퇴근하며 내가 평소 따랐던, 이제는 다른 팀에서 일하게 된 차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밤이 늦었고 밥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어서, 마침 날씨가 선선한 바람에 별다른 이유 없이 끌리듯 번호를 눌렀다.


 "차장님, 저 데미안입니다."

 "오랜만이네. 잘 지내냐. 무슨 일 있냐."

 "그냥 일하고 퇴근하다 생각나서 전화 드렸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자세히 얘기했던가. 뒷담화가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평소 살갑게 안부를 묻는 타입도 아니었던 내가 전화를 건 이유를 그는 미리 짐작했으리라.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 짧은 대화의 중간쯤, "그래. 힘들어도, 이겨내야지."라는 말이 있었다. 일하며 들은 조언 중 가장 듣기 좋은 조언이었다.


 그때 내가 겪은 어려움이 이겨내야 할 종류의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뜻 무심하게 들리는 그 조언이 나는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주지 않았지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견뎌내는 대신 이겨내라는 말이 마치 너는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응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되새기면 어떤 장면이 상상으로 떠오른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다가 몇 대 때리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한 아들과 속상해서 보다못해 한마디 하는 부모님이 생각난다. 이겨내라는 말은 그렇게 쪼다처럼 맞고만 있지 말고 너도 한 대 때리지 그랬냐는 부모의 말과 비슷했다. 그때 나는 정말 누구도 다시는, 그것이 과장이든 누구라도, 설령 삶이라 할지라도 나를 멋대로 대하지 못 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혹 그러다 또 한대 얻어 맞게 될지라도 그래야겠다고.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조언을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은 충고로 여태껏 기억한다.

 

 나는 어느새 그때의 나와 같은 사원들이 아래로 몇이나 있는 선배가 되었다. 조언을 들을 일도 많지만 해줄 일도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잔소리와 생각해보면 더 기분 나쁜 조언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엔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잔소리와 충고가 어쩌면,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기도라도 하듯이 빌었다.


Image by rabbits for carr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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